'공약 후퇴' 화난 사람들.. "'서민의 정부' 아니다"

이영경·곽희양·남지원 기자·최병태 선임기자 2013. 2. 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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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치성 희귀질환인 '다발성경화증'을 5년째 앓고 있는 안정숙씨(45)는 22일 "더 이상 뉴스를 보고 싶지 않다. 심란하다"고 말했다. '4대 중증질환 치료비 100% 국가 보장'을 약속했던 박근혜 당선인의 말이 "꽝난 것이죠?"라고 되물었다. 박근혜 정부의 140개 과제에서 빠진 것이다. 인수위에서 선택진료비·상급병실료·간병비 지원이 어렵다는 얘기가 흘러나왔지만 꿈을 놓지 않았다고 했다. 하루하루가 절박하기 때문이다.

안씨는 병을 얻은 지 1년도 안돼 치료비 1000만원을 갚지 못해 빚쟁이가 됐다. 집 팔고 십시일반 돈을 빌렸지만, 특진료·간병비에 자기공명영상(MRI)·유발전이검사까지 건강보험이 적용 안되는 검사·치료비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남편인 김재식씨(53)는 월급보다 많은 간병인 비용을 부담할 수 없어 회사를 그만뒀다. 김씨는 "박 당선인이 대선 전부터 구체적으로 4대 중증질환 예산을 내놓지 않더니 결국 백지로 만들었다"면서 "온가족의 기대가 절망으로 바뀌었다. 박근혜 정부는 서민의 정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직인수위가 지난 21일 5대 국정목표, 140개 세부 국정과제를 발표한 뒤 서민과 이해당사자들의 격앙된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틀어지고, 말 바꾸고, 내용이 후퇴해 눈물과 한숨이 터진 것이다. 돈 없고 힘든 사람일수록 민생공약이 허물어져 속앓이가 깊었다.

특히 어려운 노인들이 그랬다. 노후를 대비해 6년 전 국민연금에 임의로 가입한 김모씨(63)는 울분을 터뜨렸다. 그는 "57세부터 한 달에 8만9000원씩 국민연금을 내 4년 뒤인 67세부터 16만쯤 받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소득하위 70%(국민연금 가입자)여서 인수위 안대로라면 내년 7월부터 기초연금 15만4000원 정도를 받게 된다. 김씨는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않았으면 기초노령연금 20만원을 그냥 받는 것인데 국민연금에 가입해서 낸 돈을 생각하면 내 처지에선 손해"라며 "국민연금을 끊을지 말지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김선태씨(74)는 노인 임플란트 건강보험 공약이 '65세 이상, 모든 치아'에서 '75세 이상, 어금니 2개'로 축소된 것을 두고 "말이 안된다"고 했다. 그는 "어금니 2개는 이가 아예 없는 노인들에게 임플란트로 지지대 역할을 해서 틀니 사용을 자유롭게 하겠다는 것인데 틀니를 지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4개의 어금니가 있어야 한다"며 "임플란트를 단계별로 적용한다고 하지만 사실 노인들은 임플란트보다 틀니를 무상으로 지원하는 정책을 더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박 당선인도 60이 넘었지만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어려운 사람들을 너무 모르는 것 같다"며 "박 당선인 지지율이 얼마 전 49%까지 떨어진 것도 그런 노인들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박 당선인이 월수입 130만원 미만 비정규직의 고용보험료·사회보험료를 100% 지원키로 했다가 올해 절반만 지원하는 것에 대해 서울의 한 대학 청소노동자 김모씨는 "책임지지 못할 공약을 내놓고 말 바꾸니 정치를 못 믿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월수입이 117만원인데 고용보험·국민연금을 떼고나면 100만원이 될까 말까"라며 "내년 최저임금이 어떻게 결정될지 모르겠지만 저소득 근로자의 사회보험료는 국가가 책임지는 게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서울 관악구 신원시장에서 20년째 정육점을 해온 진병호씨는 "경제민주화가 국정과제에서 왜 빠졌는지 의아스럽다. 문구가 있고 없고는 천지차이일 것"이라면서 "박 당선인이 손톱 밑의 가시를 뽑겠다고 했는데, 골목상권이나 자영업자를 위한 정책이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부산에서 중소기업을 하는 박모씨는 "현대와 삼성이 잘못되면 중소기업도 함께 죽는 현재 경제시스템으로는 경제가 탄탄해질 수 없다"면서 "그런 불합리한 것을 고쳐나가는 게 경제민주화로 알고 있는데 그게 빠졌으니 37년 중소기업을 해온 사람으로선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경제민주화는 돈 들어가는 게 아니라 법을 만들고 집행해야 하는 실천의 문제"라며 "이런 신호들로 인해 재벌의 로비는 강해지고 관료는 더 움직이지 않고, 국회는 차일피일 미룰 가능성이 생겼다"고 우려했다.

박 당선인의 공약이 모호해지고, 장기 과제로 늦춰진 데 대한 혼란과 불만도 이어지고 있다.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하는 정승훈씨(44·서울 송파동)는 "선거 전에 선행학습 규제 얘기가 많이 나와 '정말 학원을 안 보내도 될까' '어떤 변화가 있을까' 기대를 많이 했는데, 아직 구체적인 얘기가 하나도 없다"며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란 실망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교육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선거 전 진행한 온·오프라인 서명에 2만명에 육박하는 시민이 참여했다"면서 "사교육 시장을 바로잡아 달라는 절박감이 그만큼 큰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음달 입대하는 대학생 장모씨(22)는 군복무 18개월 단축 공약을 접은 박 당선인에게 화가 난다고 말했다. 그는 "박 당선인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 공약은 내내 관심이 높았다"며 "이렇게 공약을 쉽게 내걸었다가 뒤집어버리면 정부를 믿을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서울의 한 경찰 간부는 검경 수사권 조정 공약이 유보된 데 대해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다. 이렇게 빨리 말을 바꿀 줄은 몰랐다"며 "말 바꾸는 정부를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경찰청의 한 인사도 "캠프 내에 검찰 출신들이 많이 들어갈 때부터 분위기가 역전될 거라는 우려가 있었다"고 말했다.

< 이영경·곽희양·남지원 기자·최병태 선임기자 samemind@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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