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총장이 온다, 배를 띄워볼까
2004년 6월 이라크에서 김선일씨가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정부에 대한 비난이 들끓고 있는 가운데 외교부 장관이 6월 23일 야당인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찾아왔다. 당시 외교부 장관은 반기문 현 유엔 사무총장이었다. 야당이 당시 정부의 허술한 교민대책에 대해 호된 질책을 가하던 시기라 기자들은 긴장했다. 하지만 만나는 순간부터 다른 참여정부 인사들과의 만남과는 확연히 달랐다. 박 대표는 반 장관과 만나자 따뜻한 말을 건넸고, 뜻밖에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당시 기자들 사이에는 박정희 정부에서 일한 바 있는 반 장관에 대한 박 대표의 호의로 해석했다. 박 대통령의 인사(人事) 스타일을 보면 유독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 당시에 근무한 공직자 또는 그 공직자의 아들딸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는 것이다. 알게 모르게 아버지의 밑에서 일한 관료들에 대한 신뢰감이 박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 친박(친박근혜) 사이에 언급되는 반기문 추대론의 실체를 유추해볼 수 있다.
지난해 말 친박의 홍문종 의원이 ‘반기문 대통령-친박 총리’ 구도를 내세우면서 대망론이 활짝 피었다가 가라앉은 적이 있다. 반기문 총장의 대망론은 최근 여당 내부에서 이전의 상황보다 더욱 각별하게 다가오고 있다. 여당의 참패로 끝난 총선 이후 김무성 전 대표와 오세훈 전 서울시장,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등 여당의 잠재적 대권주자들이 몰락한 가운데 반 총장이 한국을 방문하기 때문이다. 대구·경북(TK)의 한 친박 의원은 “안동을 방문하는 행사가 있는데, 지역을 찾는 만큼 자연스럽게 지역 정치인들과 만나는 자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당의 한 친박 측 관계자는 “지금 상황에서 정치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 최경환 의원 같은 친박 핵심 중진들이 반 총장과 만나는 자리는 없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반 총장 대망론은 5월 15일 박 대통령이 충북 제천 출신의 이원종 전 충북도지사를 신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하면서 본격적으로 재론됐다. 이 비서실장은 반 총장의 고향인 충북 음성과 가까운 지역 출신인 데다, 비슷한 시기에 고시를 거쳐 관료생활을 했다. 때문에 이 비서실장이 박 대통령과 반 총장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할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았다. 하지만 이 비서실장은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반 총장과의 사이에 대해 “같은 고향인 정도”라면서 “각별하게는 뭐…”라고 말했다. 특별히 친한 관계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5월 17일 친박의 반대로 상임전국위와 전국위 개최가 무산되면서 친박의 위력이 드러났다. 전체 122석 중 80~90석에 이르는 친박계 당선인들의 힘이 나타난 것이다. 이날 이후로 친박과 비박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가 생겼다. 친박의 노선이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향후 전당대회에서 친박 대표가 등장하고, 내년에는 친박에서 미는 대권후보가 새누리당 후보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는 반 총장이다.
친박의 홍문종 의원은 5월 16일 YTN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대권후보로서의 반 총장에 대해 “상수”라고 표현했다. 반드시 필요한 대권후보라는 것이다. 친박 측 한 인사는 “반 총장이 유력한 후보이기는 하지만 반 총장만으로는 힘들다”면서 “정부와 여당에서 잠재적인 대권후보에게 이에 걸맞은 직책을 부여하면서 여러 명의 대권주자들이 경쟁하는 구도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반 총장 대망론과 관련해 최근 여당 내부의 움직임을 보면 TK(대구·경북)와 충청의 연합구도가 눈에 띈다. 상임전국위원회가 열리기 바로 전날인 5월 16일 국회 정론관에서 친박 의원들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여기에서 이장우·김태흠 의원이 눈길을 끌었다. 충청권 친박을 대표하는 두 의원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정 원내대표가 마련한 비대위 구성안과 김용태 혁신위원장 임명안을 반대했다.
충청권 친박이 충청권 원내대표의 결정을 반박하는 기자회견에 앞장선 것이다. 충청권 이들 두 의원은 친박 중에서도 최경환 의원계로 분류된다. 한 TK 친박 의원은 “TK 의원이 서명에는 들어가 있지만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왜 TK는 앞에 안 서고 뒤에 있느냐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고 말했다. 서명과 기자회견을 주도하는 가운데 미묘하게도 충청권 당선인과 TK 당선인에 대한 비중이 거론됐다는 것이다. 기자회견과 서명에 앞장선 의원들이 TK와 충청권 의원이었다는 사실에서 향후 반 총장을 둘러싼 두 지역의 연계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이들 충청 의원이 최경환 의원계로 분류되는 것에 대해 한 친박 관계자는 “이들 의원이 최 의원계가 아니라 엄밀하게 말하자면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바라는 계보’”라고 표현했다. 이 말 속에는 박 대통령이 역대 충청지역 선거에서 선전한 이유로 육영수 여사의 고향이 충청지역이었다는 사실을 밑바닥에 깔고 있다. TK와 충청의 연합구도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박정희 전 대통령(TK)+육영수 여사(충청)’의 지역 연합구도와 닮아 있다는 것이 정가의 분석이다. 여기에서 반 총장 대망론이 싹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야 전체의 틀을 놓고 보면 ‘TK+충청’의 연합구도는 ‘PK+호남’의 연합구도와 맞설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친박이 반 총장을 내세워 TK와 충청을 근거지로 삼는다면, 문재인 전 대표나 안철수 대표는 자신의 고향인 부산과 야권의 텃밭인 호남을 연결시키고 수도권을 차지하는 전략을 내세울 수 있다. 공교롭게도 PK지역은 김무성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한 새누리당 비박계가 주류다. 여기에다 이번 4월 총선에서 더민주가 새누리당의 철옹성을 무너뜨리고 예상밖의 선전을 거뒀다. 내년 대선에서 PK지역은 여권과 야권이 뜨겁게 혈전을 벌이는 지역이 될 가능성이 높다.
상수로 반 총장과 문 전 대표·안 대표가 거론된다면 변수는 정계개편에 있다. 여당의 분란으로 파생되고 있는 정계개편의 씨앗은 비박과 비노 사이에 뿌려지고 있다. 비박 의원들이 탈당해 정의화 국회의장이 만드는 정치결사체나 국민의당으로 가면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에도 새로운 구도의 변화가 싹틀 수 있다. 더민주에서는 벌써 손학규 전 대표와 박원순 서울시장·안희정 충남도지사가 적극적인 대권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반 총장의 대망론이 떠오르면서 덩달아 같은 지역의 안 지사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비박 측 한 인사는 “반 총장이 충북이고 안 지사가 충남이기 때문에 야당이 맞불을 놓는다면 여당으로서는 위협적인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여의도 정가에서 반 총장의 대망론은 이미 오래되고 익숙한 카드다. 하지만 쉽게 현실화될 가능성이 없는 카드로 보고 있다. 문재인·안철수·박원순·안희정·김무성 등의 대권주자들이 권력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반면, 올해 말 임기를 마치는 반 총장은 한 번도 대권에 대한 의지를 표명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 대표는 “총선 전이라면 반 총장에게 유리한 정치지형이었지만 현재로서는 반 총장이 나서기에 어려운 여소야대 지형”이라고 말했다. 엄 대표는 “정치 경험이 없는 후보를 옹립하는 절차도 여당 내부에서 마련해야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친박이 나서면 오히려 반 총장에게는 부정적 이미지만 덧씌워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윤호우 선임기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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