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학도병들, 이범석을 따라 O.S.S.로

2008. 11. 27.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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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갑수 기자]

장준하를 비롯한 청년들이 처참한 심정으로 시간을 축내고 있던 터에 임정 청사에 한 장년이 찾아왔다. 첫 날의 감격과는 달리 임정에 온 한국 청년들은 두세 달 동안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무용한 세월을 보내고 있던 차였다. 청년들은 키와 골격이 장대한 군복 차림의 인물에 호기심을 느꼈다. 그는 마당에 서 있는 장준하 일행을 보고는 손짓으로 불렀다.

"나는 광복군 참모장 겸 제2지대장 이범석이오. 같이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이범석은 청년들을 청사 안에 있는 회의실로 데려갔다.

"나는 탁상공론을 일삼는 임정 분위기가 체질에 안 맞아 서안에 나가 있었소."

장준하는 이범석의 생각이 자신들의 것과 같아 반가웠다.

"지금 서안에서 광복군은 미군과 협조하여 국내 침투 작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귀가 번쩍 뜨였다. 그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으시오. 내가 말하리다. 나는 여러분들을 동지로 맞이하고 싶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이라면 함께 갑시다."

청년들은 곧바로 김구 주석에게 가 상의했다.

"이 장군의 말은 사실이다. 만일 여러분이 진실로 그것을 원한다면 그곳에 가서 위국하는 것을 말리지 않겠다."

장준하와 김준엽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의 표정에는 마침내 나라를 위해 할 일을 하게 되었다는 기쁨이 넘쳤다. 이범석은 청년들에게 가명을 지어놓으라고 지시했다. 정보가 새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장준하는 김준엽과 의논해 자기 이름은 김신철로, 김준엽의 이름은 김신일로 정했다.

회중시계를 들어 보이는 백범

젊은이들이 가는 곳이 사지임을 아는 임정요인들은 숙연한 표정으로 그들을 격려했다. 젊은이들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조국의 노 혁명가들이 보여준 친절과 배려에 감사를 표했다. 그들을 보내는 노인들이나 떠나는 젊은이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안타깝고 서운했다.

김구는 작별사를 통해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여러분의 젊음이 부럽소, 젊음이. 내 꼭 한 번 여러분의 훈련장에 가 보리다."

김구는 굵은 눈물을 큰 주먹으로 닦았다. 그러자 주먹을 타고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는 두루마기 안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더니 높이 쳐들었다.

"오늘 4월 29일은 내가 윤봉길 군을 죽을 곳에 보냈던 날이오. 그 날도 시간이 이른 아침이었소. 여러분도 다 알 것이오.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일본군 침략 원흉들에게 폭탄을 던지고 순국한 윤 의사 말이오. 그는 낡은 내 시계를 차고 대신 새로 산 이 시계를 내게 주었소. 나는 지하에서 만나자고 작별 인사를 하였었소. 나는 지금 여러분의 눈망울에서 윤 의사의 눈동자를 보고 있소이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모양이오. 아마도 하늘의 뜻인가 하오."

장준하는 목이 시렸다. 그는 슬픔을 짓눌러 목 안으로 넘기고 있었다. 김구는 일일이 모든 청년과 악수를 나누었다.

청년들은 4대의 트럭에 나눠 타고 중경 비행장으로 향했다. 비행장에 이르자 미군 장교가 그들을 맞이했다. 미군 장교는 하사를 시켜 카멜 담배 한 갑씩을 나누어 주었다. 이어 그들은 곧바로 수송기에 몸을 실었다. 그들은 프로펠러 소리를 들으며 기창을 통하여 중경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얼마 후 그들은 기내에 한 처녀가 한 사람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의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그녀는 주석 판공실장 민필호의 딸 민영주였다. 그들은 민필호가 임정 건물을 중국 정부로부터 얻어낸 인물이라고 알고 있었다.

민필호와 신규식

사실 민필호는 젊은이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순수하고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중국군 우편국에 근무하며 월급을 쪼개 임시정부를 도왔고, 중일전쟁 때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한 공로로 중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그는 한국군의 대령 정도에 해당하는 중국군 고급 장교였지만 김구의 요청을 받고 조국의 부름에 기꺼이 응한 사람이었다.

젊은이들은 민필호가 불과 12세의 나이로 휘문의숙을 마치고 단신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것은 젊은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인 데다가, 민필호 자신이 자기의 공로를 드러내지 않는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젊은이들은 모르고 있었다. 민필호의 형 민제호는 4개 국어와 국제정세에 능통했던 초창기 임시정부의 브레인이었다. 건강이 안 좋았던 그는 애석하게도 1935년 타계했다. 그리고 민필호의 아내 즉 민영주의 어머니는 한국 독립운동의 초석을 다진 예관 신규식의 딸이었다. 예관은 임시정부 창업의 제1 공로자였다. 그는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와 법무총장을 지냈다. 그가 임시정부의 모태로 삼고자 만들었던 박달학원에서는 무려 200명이 넘는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지금 그들을 인솔하는 광복군 참모장 이범석도 예관의 지도와 알선으로 중국 군관학교에 진학한 것이었다. 이범석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김좌진이고 다른 하나는 예관 신규식이었다. 이범석이 유독 그 두 사람을 존경했던 것은, 그들이 사심과 정치성이 없는 가장 순수한 독립운동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비행기는 동북방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맑은 날씨라서 기창 밑으로 보이는 산과 강들의 윤곽이 뚜렷했다. 소음 방지 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전시 수송기라서 대화를 할 때는 거의 고함을 질러야 했다. 장준하가 이범석에게 물었다.

"대장님, 광복군 제2지대에는 동지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이범석은 200명 정도라고 소리쳤다. 그들은 세 시간 만에 서안 비행장에 착륙했다. 봄바람이 훈훈하게 감돌고 있는 비행장 풀밭 사이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대기하고 있던 미군 트럭에 올랐다.

광복군 제2지대는 서안 비행장에서 40리 서북방에 있었다. 종남산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은 광복군 병영은 낡은 산사를 개조해 지은 것이었다. 트럭이 연병장에 들어서자 200명에 가까운 한국인 동지들이 모두 나와 그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들은 트럭 아래로 몰려와 손을 내밀었고 내리는 동지들을 포옹으로 맞이했다.

청년들에게 미군 피복과 모포와 야전침대가 지급되었다. 침대에 누운 장준하는 6천리 여정에서 겪은 일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불과 몇 달 안 된 일인데도 까마득한 과거처럼 느껴졌다. 그는 들판의 밭에서 또는 산비탈의 숲에서 잠을 자던 때를 생각했다. 돌베개를 베고 광야에서 잠을 잤다는 야곱과 자신을 대비해 보기도 했던 기억이 다소 쑥스럽게 느껴졌다.

아마도 편안한 개인 침대 때문인가 보았다. 그는 실로 오랜 만에 고향에 두고 온 아내 희숙을 떠올려보았다.

"편지에 로마서 성경 구절이 있거든 내가 일군 병영을 탈출한 걸로 아시오."

면회실에서 새하얗게 질리던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아내에게 써 보냈던 로마서의 구절을 암송해 보았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로마서 9:3)'

미군 오에스에스에 편입되다

그들은 미군의 오에스에스(Office of Strategic Service) 대원이 되기 위한 훈련에 돌입했다. 오에스에스는 미군의 전략첩보대였다. 일본 본토 상륙 작전에 대비한 예비특공부대라고 할 수 있었다. 해외에서 정보 활동과 유격 활동을 병행하며 적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것이 주 역할이었다.

부대의 지휘관은 다나반 미군 소장이었고 본부는 운남성 곤명에 있었다. 장준하가 속한 부대는 뚜취 지구대였는데 대장은 사젠트 미군 소령이었다. 훈련은 예비 과정과 정규 과정이 있었고 훈련 기간은 3개월 속성이었다. 그들은 종남산의 불교 사찰이 보이는 숲에서 주로 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도강법과 낙하법, 폭파술, 은폐· 엄폐술, 그리고 암벽 등반술 등을 배우고 익혔다.

장준하는 미군의 교육법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일본군과 대조적이었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교육대였지만 그들은 모든 시설과 여건을 완비해 놓고 있었다. 물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인적 구성도 매우 효율적으로 되어 있었다.

대장인 소령 밑으로 대위와 중위와 문관과 하사관이 있었다. 그리고 심리 장교, 정보 장교, 정훈 장교 등이 있어 대원의 개인적 적성과 능력까지를 훈련에 반영하고 있었다. 그것이 정규 훈련 과정에 참작되고 이에 따라 임무 부여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교관은 20명 정도 되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노련하고 숙달된 전술사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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