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증명서'로 애타는 '조선적' 재일교포

입력 2009. 12. 20. 08:02 수정 2009. 12. 20.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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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적자에 국적변경 종용"영사관 "종용한 적 없어..발급 여부는 공관 재량"(오사카=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본인도 얼마든지 갈 수 있는 한국이잖아요. 일본에서 차별받는 것도 서러운데 '조선'(朝鮮) 국적이라고 한국에 갈 수도 없다니 너무 화가 납니다."

한국 정부가 최근 들어 한국을 방문하려는 조선적(朝鮮籍) 재일동포들의 '임시 여행증명서' 발급 시 국적변경을 종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재일동포 사회에서 높아지고 있다.

20일 주일 한국 영사관 등에 따르면 재일동포 중 조선 국적을 가진 사람이 한국을 방문하려면 일본 각지에 있는 한국 영사관으로부터 '임시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한다.

이 여행증명서는 1999년~2004년 1만1천819건이나 발행되는 동안 거부된 사례가 4건에 불과할 정도여서 조선적(籍) 동포들은 한동안 어려움 없이 한국 여행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들어 국적이 조선적이라는 이유로 임시여행증명서 발급이 거부되거나 한국 국적으로 전환할 것을 무리하게 권유받았다는 사례가 늘고 있다.

◇"영사관이 국적변경 종용" = 조선적인 20대 여성 재일동포 3세인 A씨(동경 거주)는 지난여름 모국 여행을 준비하다가 '임시여행증명서'를 발급받지 못해 여행을 접어야 했다.

여행증명서 발급 불가 통보를 받은 뒤 영사관에 비공식적으로 알아본 결과 A씨는 국적이 문제가 돼 발급을 못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행증명서를 신청한 뒤 영사관에서 전화가 와 "국적을 바꿀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던 것에 "바꿀 생각 없다"고 답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이미 항공권과 호텔 예약을 마쳤던 A씨는 결국 항공비의 일부와 호텔 예약비 등을 날려야 했다.

A씨가 가지고 있는 '조선적'의 '조선'은 북한을 뜻하는 '북조선'의 '조선'과는 분명히 의미가 다르다.

일본 정부는 해방 직후인 1947년 일본에 있는 한반도 동포들을 외국인으로 등록시키면서 일괄적으로 '한반도'(조선반도) 출신이라는 뜻의 '조선'을 국적으로 표기하게 했다.

조선이 이미 사라진 나라인 만큼 국적상 조선은 실제 국적이 아닌 외국인 등록상 기호로서의 국적인 것이다.

이후 일본이 한국과 수교를 하면서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도 있고 일본으로 귀화한 사람도 있지만 A씨처럼 '조선'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여전히 7만명 가량이나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북교류협력법은 '외국국적을 보유하지 않고 대한민국의 여권을 소지하지 아니한 외국거주 동포가 남한에 왕래하려면 여행증명서를 소지해야 한다'며 조선적 동포들의 모국 출입을 보장하고 있다.

◇인권위 진정ㆍ행정소송 잇따라 = 강제연행된 할아버지의 후손으로, 한류 팬인 50대 여성 B씨의 경우, 한국 방문을 위해 평생 지켜오던 '조선' 국적을 최근 포기하고 한국 국적을 얻었다.

B씨는 2002년 이후 이미 10차례 가까이 임시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한국을 방문했지만 작년 주오사카 한국총영사관으로부터 "이제는 조선 국적으로는 한국에 못 가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B씨가 그동안 '조선'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것이 분단된 조국의 상황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총영사관이 여행증명서 발급시 국적을 바꿀 것을 글로 남기게 종용했다는 사실에 대해 행복추구권과 국적선택에 대한 자기 결정권, 양심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의 시정 권고를 받는 일도 생겼다.

한국의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하려던 오모(26)씨는 지난 5월 주일 오사카 한국 총영사관에서 임시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으려던 중 국적전환을 강요받았다.

오씨는 총영사관 관계자와 전화통화에서 "국적변경을 안 하면 여행증명서 발급이 힘들다. 국적을 바꾸면 임시여권을 발급해 주겠다"는 말을 들었고 이 같은 대화 내용을 녹음해 이를 토대로 국가인권위에 진정, 인권위로부터 해당 총영사관의 재발방지대책 수립을 권고하는 결정을 받아냈다.

대학의 연구원인 정모(28)씨 역시 학술제 참석차 한국을 방문하려다 조선적이라는 이유로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지 못해 결국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정씨는 서울행정법원에 '임시여행증명서 발급거부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했고 이달 말 결심 판결이 예정돼 있다.

◇ "발급여부는 재량사항" vs "특수성 고려해야" = 조선적 동포들의 주장에 대해 주오사카 한국 총영사관측은 "여행증명서를 발급하는 것은 영사관의 재량으로 판단할 일이며 한국 방문이 안보에 해가 될만한지를 판단하는 게 공관의 업무다"고 밝혔다.

총영사관 관계자는 "한동안 여행증명서 발급이 느슨한 경향이 있어서 더 신중하게 발급하는 것일 뿐이다"며 "여행증명서나 여권 발급에 대한 절차를 자세히 설명하기는 했지만 국적 변경을 강요한 적은 없다. 다만 직원들에게 국적 변경을 강요한다는 오해를 살만한 행동은 하지 말도록 주의를 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여행증명서를 발급하는 것은 법률이 정한 대로 외교통상부장관이 재량에 의해 결정할 사안"이라며 "일부에서는 조선적 재일동포를 무국적자로 보기도 하지만 북한에 우호적인 사람인지를 가려 국가 안보에 위해가 될만한 가능성이 있는지 검토하는 것은 해외공관으로서 당연한 일이다"고 강조했다.

반면, 조선적 동포들이나 이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시민단체들은 "조선적 동포들이 갖는 무국적자로서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시민단체 지구촌동포연대의 배덕호 대표는 "조선적 재일동포들의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해 한국에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옳다"며 "정부가 일제 식민과 분단으로 인권의 사각지대로 내몰린 조선적 재일동포들을 다시 가슴 아프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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