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삐라를 타고 삐라는 풍선을 타고

박근영 기자 young@sisain.co.kr 2008. 11. 20.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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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3일 오전 9시. 북측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로써 판문점 적십자 채널을 통한 남북 당국 간 직통전화 라인을 끊겠다던 북한의 통보는 사실로 확인됐다. 12월1일부터는 군사분계선을 통한 모든 육로 통행이 엄격히 제한·차단될 예정이다. 이런 순서대로라면 개성공단이 폐쇄되는 것도 현실이 될 수 있다. 북한 군부는 이미 두 차례나 이를 경고했다.

'삐라' 때문이다. 10월2일 군사실무회담에서 북측은 삐라 800여 장이 담긴 상자를 남측으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삐라 살포가 계속되면 개성공단 사업과 개성관광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이 삐라는 탈북자단체 자유북한운동연합에서 풍선에 실어 북한으로 날려보낸 것이다. 군사실무회담이 열리기 열흘 전인 9월23일, 자유북한운동연합 박상학 대표는 뉴욕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을 만났다. 버마 등의 반체제 인사와 함께한 자리였다.

이날 박 대표는 부시 대통령에게 북한에 날려보낸 것과 같은 전단을 건넸다. 둘이 다정하게 삐라를 들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뉴스 채널 CNN을 통해 전세계에 방영됐다. 박상학 대표는 "9월28일 한국 정부 쪽에서 전화가 왔다. 전날 북한이 갑자기 10월2일 군사실무회담을 열자고 제의했다며 미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라고 말했다. 북한은 10월28일 2차 실무회담에서도 "삐라 살포를 멈추지 않으면 군사적 대응도 강행하겠다"라고 강경한 발언을 했다.

비닐 삐라에 1달러 넣어 북으로…

민간단체에서 북한에 삐라를 보내기 시작한 것은 5년 전이다. 한 번에 평균 10만 장씩 5년 동안 100회 정도 보냈으니 1000만 장의 삐라가 북으로 가는 풍선에 오른 것이다. 자유북한운동연합 사무실에는 지금도 삐라 뭉치 10만 장이 북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삐라는 종이가 아닌 특수 비닐로 제작된다. 종이보다 가볍고 물에 젖지 않아 운송과 보관에 용이하다는 것이 자유북한운동연합 측 설명이다.

인쇄된 양면의 삐라는 가운데가 벌어진다. 100장에 한 장꼴로 이곳에 1달러나 5위안, 10위안짜리 지폐를 넣는다. 박 대표는 "1달러면 북한 주민이 한 달을 먹고살 수 있는 돈이다. 돈이 들어 있는 것을 알면 너도나도 이것을 줍고 싶어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삐라 뭉치를 싸놓은 큰 비닐 끝에는 가느다란 금속 고리를 투명 호스가 감싸고 있다. 헬륨 풍선에 매달아 보내기 직전 이 호스에 화학물질을 주입한다. 액체와 금속의 산화작용에 걸리는 시간이 삐라가 살포되는 시간이다. 과거 국방부가 북한에 삐라를 보낼 때는 시한폭탄을 이용해 시간을 조절했다. 시한폭탄 방식은 기술도 복잡할 뿐 아니라 비용도 많이 들어 민간단체에서 활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자유북한운동연합은 남측의 한 화학과 교수에게 부탁해 화학적 살포 방식을 개발했다고 한다.

삐라를 보내는 데는 돈도 많이 든다. 삐라 100장에 한 장꼴로 1달러를 넣는다고 쳐도 한 번 (10만장) 보내는 데 현금 1000달러(약 140만원 상당)가 필요하다. 거기에 인쇄비용, 대형 풍선을 띄우는 비용이 든다. 9월18일 서해에서 보낼 때는 배를 빌리는 비용도 꽤 들었다.

자유북한운동연합 운영비용은 미국 교민사회의 지원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한다. 9회 서울평화상을 받은 수전 솔티가 회장으로 있는 디펜스 포럼 등 미국 민간단체도 도움을 준다고 한다. 처음 삐라가 언론에 소개됐을 때는 만원 단위의 소액 성금도 적잖이 들어왔다. 덕분에 삐라 50만 장을 한 번에 날려보내기도 했다. 삐라 제작에 미국 정부 자금이 흘러든다는 소문도 있다. 그러나 박상학 대표는 "우리 단체에서 미국 정부에 다섯 차례 제안서를 냈지만 아직 1달러도 받지 못했다"라며 이를 부인했다.

사무실에 쌓여 있는 삐라 뭉치가 언제 북한 주민의 손으로 들어갈지는 아직 모른다. '조만간 바람이 북쪽으로 부는 날'이라는 것만 안다. 한반도의 기상 특성상 가을에 북쪽으로 바람이 부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11월5일 임진각에서 풍선을 띄운 것도 바로 전날 결정됐다.

풍선이 떠오를 다음 장소는 강화도다. 자유북한운동연합은 비무장지대(DMZ)와 북방한계선(NLL) 주변에서 적합한 장소를 선정한다. 강화도는 지형과 기상 상황이 잘 맞아 가장 무난한 장소다. 그래서 이곳에서 가장 많은 풍선을 띄웠다.

뒷짐 진 정부, 개성공단 입주 기업은 '벌벌'

김대중 정부 시절이던 2000년, 처음으로 정상회담을 갖고 6·15 공동선언을 발표하며 '상호 비방을 자제한다'는 문구를 넣었다. 그리고 남북은 동시에 삐라 보내기를 중단했다. 이전까지 남한은 국방부에서 직접 삐라를 북한에 뿌렸다. 북한이 삐라를 문제 삼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북한운동연합 측은 "합법적인 NGO 단체가 하는 활동이니 당연히 합법적이다"라는 방침이다. 정부 역시 "현행법으로 막을 수 없다"라며 사실상 이들의 행위를 방조했다. 북한의 반발이 거세지자 김하중 통일부 장관이 "삐라 살포를 자제해달라"고 발언한 것이 그동안 정부가 삐라에 대해 취한 모든 조처다.

북한은 압박하고 한국 정부는 뒷짐 진 형국이다. 가장 불안한 것은 개성공단에 입주한 업체다. 북한은 10·2 군사실무회담에서 '삐라 살포가 개성공단 사업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고, 11월6일 김영철 국방위원회 정책실장은 북한 군부조사단 5명과 함께 개성공단을 찾았다. 그는 남북 장령급 군사회담에 북측 대표단 단장으로 참여한 인물이다. 이날 개성공단 입주 업체에 그가 던진 질문 중에는 "완전히 철수하는 데는 얼마나 걸리느냐?"도 포함되어 있었다. 개성공단 관리위원회 언론담당 김민경씨는 "중앙군부에서 개성공단을 공식 시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라고 밝혔다. 개성공단 기업협의회 사무국 부장 이임동씨는 "정권이 바뀌고 통일부 장관이 교체되면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지금은 위기감이 완전히 고조된 상태다"라며 개성공단에서 사업을 철수해야 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한다.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이 취한 강경한 태도가 '삐라 때문만은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심지어 자유북한운동연합 박상학 대표도 "우리가 5년간 꾸준히 전단을 보냈다. 그런데 이번만 문제 삼는 것은 억지다"라고 말했다. 그는 개성공단은 절대로 폐쇄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번도 북한의 '엄포'일 뿐이란다. 박 대표는 "북한이 당장 현금이 들어오는 개성공단을 왜 포기하겠느냐? 그들은 지난해에도 북한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려달라고 요구했을 정도로 개성공단에서 나오는 현금에 욕심을 낸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개성공단은 북한 군부로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장사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개성은 이북 땅이고 서울을 공격하는 축선상에 있는 최전방 지역이다. 김 위원장은 3개 여단과 장사포를 다 밀어내고 개성공단에 내준 것이다"라고 말했다. 북한은 개성공단 사업을 시작하면서 남한에 전략적 요충지를 내어준 셈이다. 반면 예상과 달리 북한 경제에 대한 효과는 크지 않다. 그나마 개성공단에서 더 많은 북한 노동자를 수용할 수 있는 기본 시설인 기숙사도 당초 약속과 달리 남한 측에서 착공을 미루고 있다. 개성공단 입주자들은 "이런 속도라면 개성공단 폐쇄는 시간문제다"라며 위기감을 전했다.

김하중 통일부 장관이 11월13일 개성공단 입주자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삐라를 중단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보겠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한 자유북한운동연합 측 견해를 듣고 싶어 박상학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날 개성공단 입주자 대표들을 만나기 전에 자기도 김 장관과 면담할 예정이라고 기자에게 말했다. 그러나 만나지는 못했다고 했다. 그는 김 장관의 말을 전해 듣자 흥분해서 이렇게 말했다. "전단지를 보내지 못하게 하겠다는데 대화할 필요가 뭐 있나. 우리는 우리대로 바람 불면 가서 또 준비한 거 날려버리면 된다."

박근영 기자 /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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