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멈출 수 없는 발걸음

2014. 4. 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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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기획] 원내 진출 10년 맞는 진보정당 활동가들의 고뇌와 희망"격무에 생활고, 상실감 크지만, 우리는 약자들의 마지막 지푸라기"

그것은 꿈이었다. 새로운 세상을 상상한 적 있는 이들에게 2004년 4월의 승리는 손에 잡히는 희망이었다. "아, 세상이 바뀌었다."(김상철 노동당 서울시당 사무처장)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판을 흔들 수도 있구나."(이보아 녹색당 탈핵특별위원장) "당시 민주노동당에 모였던 사회적 기대감은 상상 밖이었습니다."(서주호 정의당 서울시당 사무처장)

43년 만의 진보정당 원내 진출이라는 쾌거를 넘어, 두 자릿수 의석(10석) 확보는 기적에 가까웠다. 대학을 갓 졸업한 숱한 20대가 민주노동당으로 뛰어들었다. 당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 뒤 10년이 지났다. 희망은 가뭇없이 흩어졌다. 탈당과 분당, 재창당을 거듭하며 15%를 육박하던 지지율은 풍화됐다. 환호도, 동지애도, 전망도 사그라졌다.

지난 3월8일 세상을 등진 고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는 환호가 꺼진 진보정당운동의 복판에 있었다. 꺼져가는 불씨를 붙들고 고군분투했다. 이상이 휘발돼가는 자리에서 현실마저 그를 짓눌렀다. 이를 두고 < 한겨레21 > 이 만난 진보정당 운동가들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고 입을 모았다. 상처 입은 과거와 팍팍한 현재, 전망 잃은 진보정당운동의 미래 앞에서 젊은 운동가들은 거듭 자문하고 있었다. "나는 왜 운동을 그만두지 못하나."

'별을 따려고 손을 뻗는 사람은 자기 발밑의 꽃을 잊어버린다'고 영국의 어느 철학자는 말했다. < 한겨레21 > 은 2004년 전후 민노당에서 당직 생활을 시작한 운동가 10여 명에게 그들이 겪어온 절망과 희망을 물었다. 이상이 높은 만큼 상처도 깊었다. 무엇보다 '별을 따는 데'에만 골몰해온 진보정당운동이 '발밑의 꽃'을 돌아보는 것에서 다시 시작하지 않는 한, 이 상실의 시대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요원한 일일지 모른다. _

편집자

"과거는 더 이상 미래를 밝게 비춰주지 못하고 정신은 어둠 속을 행군하고 있다." -알렉시 토크빌(프랑스 정치학자)

"우리는 행군의 발길을 한시도 멈추지 않았지만, 않을 것이지만, 우리의 발길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확신치 못한다."

-이재영(전 진보신당 정책위의장)

"SNS에도 올리고 보도자료도 보냈는데…"

어둠을 밝힌 것은 장미 한 송이와 촛불이었다. 지난 3월25일 저녁, 서울 광화문 서울파이낸스센터 앞 계단에 스무 명 남짓한 이들이 모여 앉았다. '우리 서로에게 장미 한 송이를'. 생활고를 비관한 죽음이 잇따르자 노동당이 기획한 추모제 자리였다. 사회를 충격과 비탄으로 몰아넣었던 연쇄적 죽음의 휘발성에도 불구하고, 행사는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다. 흰 장미를 헌화하면 붉은 장미를 나눠준다는 이야기에 젊은 연인 몇몇이 발걸음을 멈추고 헌화에 동참했다. 행사 주최를 맡은 김일웅 노동당 서울시당위원장이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SNS에도 올리고, 보도자료도 보냈는데…. 역시 언론에 안 나니까 홍보가 안 되네요."

의원 한 명 내지 못한 정당에 언론도, 시민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비정하나 당연한 이치다. 지난 19대 총선에서 득표율 2%를 넘기지 못해 정당 등록이 취소됐던 진보신당(현 노동당)과 녹색당은 그 이치를 잘 안다. 원내정당이라곤 하나 분당과 내란음모 기소사건 이후 불신의 늪에 빠진 통합진보당과 정의당도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노동당이 의원 10명을 배출하며 기성 정당을 위협하는 제3당으로 떠올랐던 2004년 총선 이후 지난 10년 동안 진보정당운동은 출구 없는 긴 혼란기를 겪어왔다.

1997년 민주노동당의 전신인 '국민승리21' 단계부터 함께한 김상철(39) 노동당 서울시당 사무처장은 그 희망과 절망의 역사를 당내에서 지켜봤다. 희망과 절망은 고스란히 그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2004년 민노당 서울시당에 들어와 2008년 분당 이후 진보신당, 노동당 서울시당에서 일했다. "뭔가 되겠구나 싶었죠. 진보정당이 국회의원 10명을 내며 원내정당이 됐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기 때문에, 단꿈을 꿀 수 있는 시기였던 것 같아요. 그곳에서 함께할 수 있으면 영광이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는 서울시당 의정지원부장을 맡게 된 2004년 7월을 이렇게 돌이켰다.

'영광'은 잠시뿐이었다. 더 많은 시간 '상실'을 겪었다. 원내 진출로 제도권 정치에 진입한 민노당 내부에선 정파 갈등이 깊어졌다. 혼란을 거듭했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 이재영의 눈으로 본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 > 에서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이 시기(2004~2007년) 진보정당운동은 낯선 제도정치의 문법을 익히면서도 그것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체적 역량에서 제약이 존재했다. (중략) 민주노동당은 원내 진출 이후의 시기에 걸맞은 목표와 비전을 제시하면서 실천 속에 갈등을 해소해가는 리더십의 작동이 봉쇄되었다. 리더십의 부재는 이익과 이념을 추구하는 정파들 간의 갈등을 낳았다."

정파 갈등 끝에 빚어진 탈당과 분당 사태는 구성원들 모두에게 깊은 내상을 남겼다. 가장 뼈저린 감정은 '쓸쓸함'과 '미련'이었다. 2006년부터 천영세 의원실에서 정책보좌관을 지낸 김상철 사무처장은 2008년 진보신당 창당 뒤 서울시당으로 돌아왔다. 당 살림을 꾸려가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다시 한번 상실을 겪게 될 줄은 알지 못했다. 2011년 민노당과의 통합안이 부결되고 노회찬·심상정·조승수 의원이 탈당하면서 당은 다시 위기를 맞았다. 조직과 가치의 영역에서도 위기였지만, 당직자들 개인의 삶도 크게 흔들렸다. "그 시기 (진보신당) 당직자를 한 사람들 마음속에 병이나 생채기 하나씩은 있을 겁니다." 그는 돌이켰다.

"상실감과 우울, 정직하게 응시해야"

당시 서울시당 상근자 4명 가운데 그를 제외한 이들이 모두 탈당했다. 오래 관계 맺어온 동지들과의 왕래가 대개 끊겼다. 쓸쓸하고 외로웠다. "그때 굉장히 고립감을 느꼈거든요.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나만 남고 다른 이들은 모두 사라진 거죠." 누군가는 '상실감'과 '우울'에 대해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김 사무처장의 생각은 다르다. "상실감을 극복하려면 먼저 응시하는 것이 약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한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것이 아닌가."

서주호(40) 정의당 서울시당 사무처장에게도 지난 10년 동안 가장 힘들었던 건 당내 갈등이다. 학생운동과 2005년 이후 민노당 당직자 활동 기간까지 20여 년을 합해 그는 "지금이 가장 힘들다"고 했다. 통합진보당 분당 사태 때 그는 옛 민노당의 당권파 그룹과 참여당·진보신당 그룹의 타협을 주장했다. "희망을 보여주려 통합한 것이니 우리끼리 싸우지 말고 타협하자"며 이석기 의원의 사퇴를 촉구하는 글을 당 게시판에 올렸다. '동지'들로부터 비판이 쏟아졌다. 마지막까지 버티다 2012년 10월 탈당했다. 변절자라는 비난,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손가락질이 빗발쳤다.

정의당 창당 뒤엔 '이석기 제명안'을 두고 당 지도부의 의견에 맞섰다. 현 정부의 '민주주의 후퇴' 상황과 관련해서도 정의당이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당직자가 뭐하는 거냐"며 일부 당원들은 사퇴를 압박했다. '쿠데타' '항명 파동' 등의 언어가 그를 절망케 했다. 2012년 분당 이후 2년, 무력감이 쌓여가고 있다. "세상은 심각할 정도로 절망적인데 진보정치는 풀어야 하지만 풀 수 없는 과제를 앞에 두고 있고…. 원래 술을 잘 못 먹는데 요새 자꾸 술을 먹으면 분노가 많아져서 걱정입니다."(서주호 사무처장)

영구임대아파트라는 축복

과거를 잃은 진보정당 운동가들의 고통을 가중하는 것은 오늘의 자화상이다. 노동당과 녹색당은 원외 정당의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 녹색당 1호 상근자인 이보아(37) 탈핵특별위원장은 노동당 대변인을 맡았던 고 박은지 부대표의 어려움을 십분 이해한다. "창당 전에 제일 많이 한 게 퍼포먼스예요. 신문에 사진이라도 실리려면 그것밖에 할 게 없었어요. 그림 나오는 회견 아니면 언론이 우리를 보러 오지도 않았으니까요." 새로운 정책을 만들고 현장에 가는 등 아무리 공을 들여도 당원이 아니면 누구도 녹색당이 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경남 밀양 송전탑 전국대책회의 대변인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방송과 신문은 그의 말 몇 자, 몇 초를 잘라 쓸 뿐이었다. 답답함에 이가 갈렸다.

이보아 위원장은 2005년 민노당 강남구위원회 사무국장으로 당직자 생활을 시작했다. "2004년 총선에서 정치의 역동성과 가능성을 봤다." 관심받지 못하는 진보정당을 꾸려가는 지금, 이 위원장은 가끔 2004년에 대한 회한이 든다. "그때가 기점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성취가 없었다면 일거에 추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싶어요."

원외정당에는 현실적으론 국고보조금 문제도 있다. 소속 의원이 1명이라도 있으면 국고보조를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노동당과 녹색당은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한다. 정당 국고보조금은 승자독식 구조를 공고화한다. 국고보조금을 지원받는 거대 양당은 당원들로부터 금전적 자원을 받지 않아도 재정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사회적 지지 기반을 확대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가난한 정당들은 당직자의 삶을 돌볼 겨를이 없다. 퇴직금은 언감생심이다. 교통비 등 활동비만 지급받고 일하는 당직자도 있다. 지금은 노동당 당직자가 아니지만 서울 마포에서 지역운동을 하고 있는 정경섭(41) 민중의집 대표는 이렇게 돌이킨다. "30대 초반 민주노동당의 지역 조직 위원장을 시작으로 골목대장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단체를 스스로 만들면서 리더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모두 빛나는 자리만은 아니다. 거기에 따르는 경제적 대가는 아예 없었고, 오히려 정반대로 운영비를 만들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빌리고 갚은 돈이 억대는 될 것이다."

많은 운동가들이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것은 그런 이유다. 정경섭 대표는 지난해 마포구의 국민임대아파트를 분양받았다. "가계경제의 큰 어려움을 해결했다"며 기뻐했다. 서주호 사무처장도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18평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그는 그것이 "축복"이라고 말했다.

어차피 가난은 감수하기로 작정한 불편이었다. 누구도 군색한 삶으로 당을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개인 없는 조직문화가 운동가들을 고갈시킨다. 헌신만을 요구하는 운동권 조직의 문화가 1990년대 이후의 감수성과 충돌한다. 살림이 어려우니 상근자는 적다. 적은 상근자에게 대부분의 당 실무가 맡겨진다. 악순환이다. "당이란 게 온전히 상근자 중심으로 돌아가잖아요. 상근자는 24시간 문자, 카카오톡이 열려 있어야 해요. 늘 민원이 들어오죠. 그럼 그 사람의 민원은 누가 해결해주나요?" 전일 상근을 그만둔 한 진보정당 당직자 ㄱ씨의 설명이다. 실무라인인 상근자에겐 업무의 권한이 없고, 자기계발 시간은 더욱 없다. "개인을 채워주는 건 없이 조직에 의해 소모돼요. 조직과 개인의 동시 발전이라는 것도 없고요. 능력 있는 놈만 살아남으라는 거죠." 이 당직자는 덧붙였다.

열매 누린 선배 세대, 우리는…

이름을 밝히길 꺼린 전 민노당 당직자 ㅇ씨는 이런 분위기 때문에 진보신당 분당 사태 직전인 2007년 당을 떠났다. 아직 최악으로 치닫진 않았지만 "많이 지쳤던 것 같다"고 그는 돌이켰다. 마침 지인을 통해 소규모 출판사의 자리를 제안받았다. "학생운동을 통해 제가 꿈꿨던 진보정치와 실제는 달랐어요. 개인을 배려하지 않고, 곁에 있는 동지들이 행복한지에 관심을 두지 않았죠. 그 직전인 2005년에 민주노총 박상윤 사무처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고민이 많았어요. 저 자신이 행복해지는 게 그때 가장 중요했던 것 같아요."

진보 진영에서 '힐링' 담론은 이미 구문이다. 땜질식 위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현 정의당 대외협력실 국장은 '객관화'에 답이 있다고 말했다. "운동판에서는 객관적인 지표가 없으니까 젊은 세대들이 조직에서 보상을 받지 못해요. 미래가 보이지 않는 거죠. 정실주의로 운영되니까 주변의 인간관계나 일의 성과에 대해 잘못된 아집으로 빠지기가 쉽고요." 전문기관의 컨설팅을 받아 객관적인 당내 평가지표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게 최 국장의 설명이다.

몇몇 활동가는 '세대'의 문제도 지적했다. "운동 규모는 커졌는데 그 열매는 80년대 학번들이 누렸고, 제가 만나는 90년대 학번의 활동가들은 아직도 조직에서 실무에만 바빠요. 이들은 설 자리를 제대로 못 찾고 있는데, 이전 세대들은 각종 위원을 맡고 강의를 다니면서 명망을 유지하고 경제적으로도 뒷받침을 받아요." ㄱ씨는 운동권이 재생산되지 못하는 데에는 이전 세대들의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세대가 적체되면서 개인적 전망마저 가려진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정당의 당직자 ㄴ씨는 "우리 세대는 전체적으로 수도 적고 혼재돼 있다"고 설명했다. "누구는 과도하게 빨리 출세하고 누구는 중요한 일을 다 해도 보상을 못 받기도 하지요. 그에 비하면 선배 세대들은 대부분 출마나 '우두머리' 자리를 통해 많은 걸 얻었고요."

유혹은 늘 있다. "너, 노동당만 아니면 다른 것도 해볼 수 있을 텐데…." 김상철 사무처장이 당 안팎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종종 듣는 말이다. 김 사무처장은 보좌관을 지낸 경험이 있다. 국회에 가면 돈을 더 벌 수도 있었다. 여의도는 든든한 권력이었다. 금세 손에 쥐어지는 결과물도 있었다. "의원실로만 돌면 내가 하는 일이 운동이 아니라 생활이 될 것 같았어요. 운동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출발점을 만들기 위한 건데, 입법은 그냥 최종 결과물일 뿐이죠." 입법 과정에서 애초의 문제의식과 요구사항이 '협상'과 '실용'의 이름으로 변질되는 것을 보았다.

"나의 관점, 나의 정책 대안들이 집단의 고민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공간은 지금으로선 노동당이 유일해요." 김 사무처장은 말했다. 막다른 길에 내몰린 사람들의 민원도 그가 노동당을 그만둘 수 없는 이유다. "국민권익위, 감사원, 서울시장 트위터, 다른 정당들까지, 가볼 데 다 가본 분들이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고 찾아오는 데가 노동당이에요." 해결되지 않는 민원을 들고 오는 약자들은 새누리당이나 민주당만큼 '노동당'을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막다른 길에 몰렸을 때 자신들을 도와줄 수 있는 곳이라는 것만은 금세 눈치로 안다. 노동당이 그들에게 벼랑 끝 지푸라기가 돼주는 것만큼이나, 그들 스스로가 김상철 처장에겐 진보정당운동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하는 벼랑 끝 무엇이다.

스스로 먼저 행복해져야 한다

이보아 녹색당 탈핵특별위원장에겐 '밀양'이 그런 존재다. 밀양에서 이 위원장은 기존 운동으로 포섭되지 않는 수많은 개인들을 만났다. 오래 만나지 못하고 등졌던 '동지'들도 밀양에서는 뜻을 모을 수 있었다. '적색'과 '녹색'의 평화적 연대가 가능한 공간이었다. "'탈핵'이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탈성장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해요. '탈핵'만으로도 몇십 년 운동할 수 있는데, 밀양을 통해 희망을 봤어요."

"행복해지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10년 전 민노당의 캠페인이다. 유럽 사민주의자들이 현재를 일구는 데 걸린 시간은 100여 년이다. 지금이 한국 진보정당운동의 '실험과 개척, 정비의 시기'라면 무엇보다 먼저 돌아볼 것은 지친 운동가들의 내면이 아닐까. 스스로 먼저 행복해지지 않는 한, 누구도 그 구호를 믿을 수 없을 테니.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 참고 문헌

< 이재영의 눈으로 본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 > (이재영, 해피스토리)

<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장석준, 개마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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