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과 미국이 이단으로 취급해도 난 당당하다"
[한겨레]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
“저, 저분이랑 사진 좀 찍어주실래요?” ‘정전 60주년 국제포럼’이 열리던 8월 말의 서울 프레스센터, 20대 청년 하나가 카메라를 건네면서 내게 부탁했다. 엉겁결에 청년의 카메라를 받아 들었지만 사진을 찍기 위해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검은색 양복을 입은 백발의 노신사 주변엔 그에게 인사를 건네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한국 현대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 브루스 커밍스. 올해 만 70살을 맞는 그는 정년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여전히 시카고대학 역사학과의 석좌교수이자 학과장으로 왕성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저분이 아까 뭐라고 말했어요?” 카메라를 부탁한 청년이 내게 물었다. 오전에 있었던 커밍스의 발표는 정작 듣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북한은 50년대 이후로 미국의 핵무기 협박에 공포감을 느껴왔고 북핵은 그런 맥락에서….” 떠듬떠듬 커밍스 발표의 요지를 옮기려는데, 청년이 다급히 말을 잘랐다. “잠깐만요, 지금 찍으면 되겠네요.” 기회를 놓칠세라 청년은 커밍스 곁으로 냉큼 다가섰다. 청년은 커밍스의 발표보다 커밍스라는 “살아 있는 전설”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인들에게 그 존재 자체로 하나의 메시지였다.
커밍스가 1981년 출간한 <한국전쟁의 기원>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누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느냐보다 어떤 맥락에서 전쟁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연구는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국 현대사 연구의 차원을 높인 역작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불온한 사상을 고취시키는 이념서적으로 격렬한 성토의 대상이 되어 왔다. 지난 반세기 우리가 보지 못한 우리의 뒷모습을 날카롭게 파헤친 미국의 사학자, 그러나 우리가 그에 대해서 아는 바는 그리 많지 않다. 브루스 커밍스는 우파 논객들이 단언하듯 친북 좌파인가, 그는 한국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커밍스를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눴다.
아버지는 내게 CIA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유년기 얘기부터 시작해 보자. 당신 아버지도 시카고대학에서 독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던데 시카고대학과 인연이 깊은 것 같다.
“그렇다. 어머니 역시 시카고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다. 두 분은 도서관에서 처음 만나 학교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커밍스는 1943년 아버지가 로체스터대학 교수로 근무할 때 태어났다. 인디애나, 오하이오, 아이오와 등으로 자주 근무지를 옮기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느라 12년 동안 11개 학교를 전전하며 어린 커밍스는 수줍음 많은 소년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중앙정보국(CIA)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는 게 사실인가?
“아버지는 당신이 75살이 될 때까지 내게 시아이에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1970년쯤 내가 컬럼비아대학원을 다닐 때 우연히 <누가 CIA에 있었나?>(Who’s Who in CIA?)란 책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 우리 아버지 이름이 있었고, 내 이름도 있었다. ‘아들 브루스 커밍스’(웃음) 그 책을 보고 아버지한테 물어봤지만 아버지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커밍스의 아버지는 원래 진보적 ‘리버럴’(자유주의자)로 민주당 지지자였다. 커밍스가 아홉살 되던 1952년 무렵, 아버지는 아이오와에 있는 코(Coe)칼리지 학장이었는데, 친구인 해리 로지츠키(미국 언어학자로 CIA 스파이 양성 전문가가 됨)의 권유로 중앙정보국에 들어갔다. 1950년대 미국은 히틀러의 나치정보국 일부 요원들을 처단하는 대신 시아이에이에 끌어들여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첩보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해방 후 미군정이 친일경찰을 앞세워 좌익 색출에 나선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아버지가 맡은 임무는, 나치정보국을 통해 동독에 파견된 요원들 중에 이중간첩을 가려내는 일이었는데, 심문 과정에서 가혹행위(harsh treatment)를 할 때도 있었다. 1년 만에 아버지는 시아이에이를 그만두고 강단으로 돌아갔다.
-처음부터 아버지는 시아이에이와 맞지 않았던 것 아닌가. 왜 시아이에이행을 거절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매카시즘이 위세를 떨치던 50년대, 시아이에이는 리버럴들에게 일종의 ‘피난처’였다. 당시 시아이에이는 리버럴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매카시를 혐오하고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을 옹호하는 사람들(Roosevelt New Dealers)이었다. 아버지와 시아이에이에서 일하던 어른들이 나누는 얘기를 어깨너머로 들은 기억이 있다. 엘에스디(LSD, 환각제의 일종)를 쓰면 사람들이 진실을 말하게 되는지, 시아이에이가 사용해보고 있단 얘기도 들었다. 내 부모님과 친구였던 분 중에 그때 자살을 한 여성도 있다. 당시 그분들은 자신의 나라를 위해서, 나라가 택하지 않는 방향으로 싸웠던 리버럴들이었다.”
아버지와 그 지인들의 삶을 통해, 커밍스는 독단과 증오의 시대가 남기는 깊은 상처를 지켜봤다. 커밍스는 “전쟁도 안 겪어 보고 미국에 편안히 앉아서 펜대만 굴린 사람”이 아니라, 같은 시대 다른 공간에서 한국인들처럼 냉전의 아픔을 겪어낸 동시대인이었다. 커밍스의 아버지는 학계로 복귀했지만 불운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커밍스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인 60년대 초, 아버지는 일련의 불행한 일들을 겪으며 재산의 대부분을 날리고 말았다. 집도, 모아놓은 돈도 없이, 월세를 전전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데니슨대학에 입학한 커밍스는 여름방학마다 철강공장에서 막노동을 해야 했다.
-백인 대학생이 철강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당시 흔한 일은 아니었을 텐데?
“나 말고 다른 정규직은 모두 흑인들이었다. 거대한 33개 플랜트에 석탄을 퍼 넣어 24시간 동안 화력을 유지한 뒤 다시 퍼내는 일이었는데 정말, 정말 뜨겁고 힘든 막장노동이었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인부들은 소금 테이블을 옆에 두고, 일하는 틈틈이 찍어 먹었다. 그래도 그때 철강노조가 힘이 있어서 보수는 다른 데보다 나았다.(웃음)”
나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는
말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한국의 3년상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생리를 잘 표현한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아버지처럼
뉴딜파 민주당, 루스벨트 리버럴
나더러 친북이라는데 북한은
내 여권을 훔쳐가기도 했다
흑인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배운 것도 많았다. 흑인들에겐 투표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도, 흑인은 백인과 같은 술집에 출입할 수 없다는 것도 커밍스는 그때 처음 알았다. 용광로의 고된 육체노동과 흑인 노동자들과의 끈끈한 유대감은, 갓 스물의 청년 커밍스에게 소중한 정신적 자산이 되었다.
-데니슨대학에 갈 때 야구장학금을 받았다고 하던데, 장학금 때문에 야구를 했나?
“그런 건 아니다. 어려서부터 난 모든 종류의 스포츠, 야구 농구 축구를 다 좋아했는데 데니슨에 가서 야구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때까지도 내 꿈은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거였으니까. 대학 가서 3년 동안 야구를 했는데…. 별로 잘하진 못했다. 경기 내내 벤치에만 앉아 있었다.(웃음)”
-한국 사람들을 위해선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다.(웃음) 그런데 어쩌다가 학자의 길을 택하게 되었나?
“내 야구 실력으론 밥 벌어먹기 힘들겠다 싶을 무렵, 경제학 수업을 들었는데 교수가 중국인이었다. 그가 나를 이쁘게 봐서 하루는 자기 집으로 저녁 초대를 했다. 사모님이 직접 요리를 해서 내왔는데 정말 일품이었다. 그때까지 내가 먹어본 중국 음식이라곤 깡통에 든 청킹표 국수가 고작이었는데(웃음) 제대로 된 중국 음식을 처음 먹어본 것이다. 그 이후로 중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베트남 파병 피하려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중국 음식 때문이라고?
“아니, 그 교수가 나한테 A를 준 것 때문에….(웃음) 난 1, 2학년 때까지 성적이 신통치 않았는데 그 과목에서 A를 받고 나서 학업에 자신이 생겼다. 그 교수는 자기가 내 인생에 그렇게 큰 영향을 줬다는 걸 모를 것이다. 그 이후로 중국과 중국혁명에 관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베트남에 파병되고 싶지 않았던 커밍스는, 군 복무를 대체할 수 있는 수단으로 평화봉사단에 자원했다. 원래 관심지역은 중국이었지만 중국이나 대만엔 평화봉사단이 없어서 중국과 가장 가까운 한자문화권인 한국을 택했다. 한국에 첫발을 디딘 건 1967년.
-한국에서 무슨 일을 했나?
“선린중학에서 영어를 가르쳤는데 빡빡머리 학생들이 검은 교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난로에 도시락을 얹어놓았는데 김치 냄새가 사방에 퍼졌다.(웃음) 그때 서교동에서 홈스테이를 했다. 집주인은 교사였는데 아주 금실이 좋고 단란한 가정이었다. 우리 부모는 관계가 껄끄러워 늘 다투곤 했는데 그 가정을 보면서 ‘사람들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수도 있구나’ 생각하게 되었다.(웃음)”
그는 한국인과 한국 문화에 깊숙이 매료되었다. 당시 한국에 나와 있던 미국인 중엔 인종적 편견이 강한 이들도 적지 않았는데 커밍스를 만나면 “넌 어떻게 한국 사람하고 한집에 사니? 너, 김치도 먹니?” 하고 놀란 표정으로 묻곤 했다. 그는 “홍어만 빼고” 모든 한국 음식을 좋아하고 지금도 한국인하고 한집에서 산다. 그의 부인은 현재 버지니아대학의 예술과학대학 학장인 우정은 박사이다.
-한국 사람들에 대한 첫인상은 어땠나?
“그때의 첫인상이 지금까지 변함이 없는데 내가 보는 한국인들은 매우 혈기왕성하고 개방적이고 진솔하고…. 그저 개방적인 정도가 아니라 당황스러울 정도로 스스럼이 없다. 일본인들은 그렇게 외향적이거나 진솔하지 않다. 일본인 친구들도 많지만 난 한 번도 그들 집에 가본 적이 없고 그들 부인을 만난 적도 없다. 한국 사람들은 늘 사람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거나 밥을 산다. 아내는 다른 사람들과 밥을 먹으면 꼭 자기가 밥값을 내려 한다. 미국 사람들은 절대로 이해 못할 일이다.(웃음)”
우정은 박사와의 사이에 커밍스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3년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그는 큰아들을 잃었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 콘퍼런스’ 참석차 그가 한국에 왔을 때 나눈 전화통화가 아들과의 마지막 대화가 되고 말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시카고대학에 다니던 아들은 당시 스물한 살이었다.
-당신 아들 얘기를 꺼내도 될까, 계속 망설였는데, 얘기하기 싫으면 안 하셔도 된다. 한국 속담에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애석한 일이다.
“나도 그 한국 속담을 아들 장례식 때 인용했다. ‘나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는 말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고. 내 가슴에는 결코 메워지지 않을 구멍이 하나 뻥 뚫려 있는데…. 그건 우리 인생에 일어날 수 있는 일 중 가장 끔찍한 일이다. 그해에 난 휴직을 했는데 그저 슬퍼하는 것 말고는 다른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한국의 삼년상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생리를 잘 표현하는 것 같다. 3년이 다 돼가는 올해 봄부터 뭔가 좀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온단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러나 사람은 그것을(자식의 죽음을) 결코 넘어설 수가 없다. 그저 그것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울 뿐이다.”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와중에도 휴가 한번 내지 않고 학장으로서 꿋꿋이 자리를 지킨 아내가 존경스럽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 아내와 오랫동안 미뤄왔던 일, 북한 정치경제에 대한 책을 공저자로 내는 일을 조만간 시작해볼 참이다. 더불어 <한국전쟁의 기원> 1권(1981)과 2권(1990), 그리고 최근 20년간 새로 발굴된 정보를 취합해 한국전쟁에 관한 개괄본(synoptic volume)을 만드는 것도, 죽기 전에 그가 꼭 하고 싶은 일이라고 덧붙였다.
한국 정부가 주는 일체의 연구기금 외면
-<한국전쟁의 기원>이 우파의 전통적 학설(북한 도발설)을 뒤집었다고, 그때부터 당신은 수정주의자로 불리게 되었다. 80년대 이 책은 정부가 정한 금서이자, 대학생, 지식인들의 필독서였는데, 90년대 박명림 교수가 소련의 기밀문서를 토대로 북한이 남침을 한 게 사실이라고 주장한 이후, 많은 사람들은 당신의 수정주의가 “틀렸다”고 말한다.
“내 책의 어디가 틀렸단 말이냐? 난 33단원 1500페이지를 썼다. 내 책을 읽지도 않고 나를 정치적으로 몰아세우는데 나는 한 번도 북침을 주장한 적이 없다. 49년부터 개성과 옹진반도 등에서 충돌이 있었는데 누가 먼저 쐈는지를 묻는 건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게 내 논지다. 나는 내가 한 연구들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 조선일보는 내가 좌익, 수정주의 시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책을 쓴 것처럼 얘기하지만, 나의 모든 기본적 판단은 모두 일차 사료에 근거한 것이다. 70년대 초 국립기록물보관소에서 발견한 미군정 기밀문서를 토대로 내 책 1권을 썼고, 77년엔 미군이 전쟁 중에 북한에서 포획해 온, 트럭 한 대 분량의 출판물과 기밀문서를 발견해서 2년여 동안 꼼꼼히 숙독한 후 2권을 썼다. 소련 문서가 나온 건 소련이 무너진 90년대 이후인데, 앞으로 미국통신정보국(American Signal Intelligence)이나 북한 기록보존소 자료가 공개된다면 한국전쟁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이 열릴 것이다. 사료에 따라 역사는 변한다. 내가 책을 쓸 때 존재하지 않았던 자료를 보지 않았다고 나를 비판하는 건 이해가 안 된다.”
-무례한 질문이지만 많은 사람이 궁금해할 것 같아 묻겠다. 당신은 친북인가?
“박정희, 전두환이 권력을 잡고 있을 때 나한테 세 가지 낙인이 붙었다. (한국말로) ‘반한, 반미, 친북!’ 굳이 따지자면 나는 아버지처럼 뉴딜파 민주당원(New Dealer Democrat)이나 루스벨트 리버럴(Roosevelt Liberal)이라고 할 수 있다. 나더러 친북이라고 하는데, 나는 김일성, 김정일의 초대를 받은 적도 한 번 없다. 심지어 1987년에 그들은, 나를 북한에 못 오게 하려고 베이징에서 내 여권을 훔쳐가기도 했다.”
-뜻밖이다. 당신이라면 북한이 공항에 레드카펫이라도 깔아놓고 환대할 줄 알았다.
“천만에…. 내가 한국전쟁에 대한 북한 입장에 전면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한 절대로 그럴 일은 없다. 81년에 미국 학자 18명과 처음 북한에 갔을 때도 그들은 내 배후에 시아이에이가 있다고 의심했다. ‘네 뒤에 뭐가 있냐?’고 자꾸 물어서 ‘나는 사회민주주의자다’ 그랬더니 ‘뭐, 사회민주주의자? 그런 사람은 처음 본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유럽 가면 천지에 깔렸다’고 얘기해 줬다. 그들에겐 사회과학이란 게 없다. 온통 주체사상뿐이다. 북한은 독단적이고 전체주의적이다.”
-한국 정부나 기관이 주는 일체의 연구기금을 외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분단국이니까! 한쪽에선 돈을 받고 한쪽에선 안 받고, 현대사를 연구한다는 사람이 어떻게 그러나? 한국전쟁은 여전히 정치적이고, 정부 입장을 앵무새처럼 따라하지 않는 한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어떤 말을 해도 곤경에 빠지게 되어 있다.”
커밍스는, 그를 입국금지시킨 박정희 정부는 물론 그를 청와대로 초청했던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도 한국으로부터 일체의 연구기금을 받지 않았다. 그것이 깐깐한 역사학자 커밍스의 남다른 자존심이다. 남한과 북한, 미국 모두가 그의 수정주의를 이단으로 취급해도 그는 당당하다.
“역사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수정하지 않는 거라면 뭐하러 책을 쓰나? 수정주의가 아닌 역사학자는 자기 할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거다. 내가 믿는 건, 유효한 최상의 자료를 가지고 내가 최대한 진실을 말하면 조만간 공정한 사람들은 내 의견에 동의하게 될 거라는 점이다.”
커밍스니까, 커밍스라서 할 수 있는 말이다. “당대의 역사”가 용납하지 않는 방식으로, “미래의 역사”를 위해, 평생을 싸워온 브루스 커밍스니까. 녹취·진행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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