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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스티븐 호킹’의 세상나들이

루게릭병 이원규 시인, 맨발로 마우스 조작 첫 강연
“혼자서 짊어질 수 없는 고통 사회가 함께 나눠 져야”

경향신문 | 글 임아영·사진 김영민기자 | 입력 2009.11.05 03:29 | 누가 봤을까? 10대 여성, 광주

 




4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효자동의 백범기념관. 1층 대회의실을 가득 메운 200여명의 시선이 출입문을 향하고 있었다. 병마에 시달린 기색이 역력한 삐쩍 마른 체구의 남자가 검은색 양복을 입고 휠체어를 탄 채 나타났다. 아내로 보이는 여성은 조심스레 휠체어를 밀며 단상으로 올라왔다.

남자는 앙상한 체격과 달리 눈동자에는 생기가 흘러 넘쳤다. 그는 짝짝이였다. 오른쪽 발은 회색 양말과 검은색 구두를 신었지만 왼쪽 발은 맨발이었다. 그는 단상에 올라 힘겹게 왼쪽 발을 들어올려 마우스를 클릭했다. 휠체어에 놓인 노트북이 켜졌다. 남자가 발로 마우스를 움직이자 스피커에서 나오는 기계음이 강의실을 채웠다.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이 있고, 희망이 있는 한 그 희망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청중은 숨을 죽이고 남자의 말을 대신 전해주는 기계음에 귀를 기울였다.
이원규 시인(49). 한국판 <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 로 통하는 < 굳은 손가락으로 쓰다 > 의 저자다. 그는 이날 서울시가 마련한 '보조공학서비스 발전방향 세미나'에서 특수 컴퓨터가 설치된 전동휠체어에 앉아 생애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강연을 진행했다. 루게릭병(근위축성측삭경화증·ALS)에 걸린 이후 첫 번째 세상 나들이다.

'세상 일에 미혹됨이 없다'는 불혹을 맞이한 1999년. 시인은 희귀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됐다. 루게릭병. 병원에서는 온 몸이 서서히 굳어가며 3~4년 정도밖에 못산다고 했다.

하지만 이 시인은 루게릭병과 10여년을 싸우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전신이 서서히 굳어가며 이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왼쪽 발가락뿐. 그래도 그는 발가락으로, 눈으로 마우스를 움직여가며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요즘은 혀가 굳어 그가 아무리 말을 하려 해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세계적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처럼 대학 강단에 서보는 꿈은 여전히 놓지 않고 있다. 이날 강연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첫걸음인 셈이다.

이 시인은 이 꿈을 이루기 위해 몸이 굳어가는 와중에도 손가락 하나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책장을 넘기면서 공부해 국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문학계의 스티븐 호킹 박사'라 할 수 있다.

"(루게릭병에 걸린 이후) 2000년 봄 성균관 명륜당 은행나무 아래에서 힘들게 썼던 석사학위 논문 원고를 보면서 '더 공부를 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전 박사학위 과정 입학원서를 샀어요. 병에 걸리기 전부터 꿈꿨던 '대학 교수'라는 목표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시인은 "생명이 있는 한 고통 또한 있지만 고통의 무게가 너무나 커서 혼자 짊어질 수 없을 때 반드시 가족과 이웃, 사회가 그 고통을 함께 나누어 짊어져야 한다"며 함께하는 삶을 통한 희망 다지기를 설파했다.

< 글 임아영·사진 김영민기자 layknt@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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