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소련, 스탈린 딸 미국 망명 크게 우려 않아"

2012. 11. 20.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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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I, 60년대 美망명 스탈린 딸 스베틀라나 기밀문서 해제

FBI, 60년대 美망명 스탈린 딸 스베틀라나 기밀문서 해제

(모스크바=연합뉴스) 유철종 특파원 = 옛 소련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정권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가 미국으로 망명한 사건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AP 통신은 19일 미연방수사국(FBI)이 기밀해제한 알릴루예바 망명 사건 관련 문서를 인용해 이같이 보도했다.

◇ "브레즈네프, 스탈린 딸 망명 크게 우려안해" = 문서에 따르면 1967년 알릴루예바의 망명 뒤 워싱턴 주재 소련 외교관이 FBI 인사와 만나 소련 정부는 이 사건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미국이 선전적 목적에 이용해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일부 FBI 관계자들은 소련 정부가 특별한 우려를 느끼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녀의 망명으로 스탈린과 그 가족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이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을 중심으로 한 당시 소련 지도부의 이익에도 반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한 것으로 확인됐다.

미국 측도 알릴루예바에 예상 밖으로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문서에 따르면 알릴루예바는 미국으로 망명한 뒤 FBI에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들이 자신을 미행할 수 있다는 우려를 밝혔지만 FBI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독재자의 외동딸 알릴루예바는 지난해 11월 망명지인 미국 위스콘신주에서 결장암으로 사망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 사랑을 독차지하던 딸에서 반항아로 = 1926년 스탈린과 그의 둘째 부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사이에서 태어난 스베틀라나는 어렸을 적 스탈린에게 '작은 참새'라고 불리며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10대에 영어 잡지를 통해 6세 때 여읜 어머니 나데즈다의 사인이 자살이었음을 알고 충격을 받았고, 유대계 시나리오 작가와의 첫 사랑이 스탈린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아버지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딸과 사귀는 시나리오 작가 알렉세이 카플레르를 여러 번 총살하려고 했으나 딸의 심적 충격을 우려해 강제수용소에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이후에도 끊임없이 아버지와 갈등을 겪던 알릴루예바는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아버지의 성 대신 어머니의 성 알릴루예바를 택할 정도로 부친에 대한 미움을 버리지 못했다. 니키타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연설이 이뤄진 제20차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를 앞두고는 아버지를 '도적적, 정신적 괴물'이라고 비판하기까지 했다.

◇ 1960년대 적대국 미국으로 망명 = 독재자의 딸은 10여년 뒤 가장 큰 반란을 일으켰다. 1967년 남편이라 부를 정도로 가까웠던 인도인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허가를 받은 알릴루예바는 뉴델리에 도착한 뒤 곧바로 정치적 망명을 선언했다. 이 소식은 당시 소련 우주인 유리 가가린의 인류 사상 첫 우주비행 성공(1961년)에 버금가는 충격을 국제사회에 던졌다.

잠시 스위스에 머물다 미국으로 망명한 스베틀라나는 미국 공항에서 '표현의 자유'를 찾아왔다고 밝히고 공개적으로 소련 여권을 불태워 냉전이 낳은 '스타'로 주목받았다.

그해 스베틀라나가 출간한, 스탈린과 크렘린의 생활을 다룬 자서전 '친구에게 보내는 스무 통의 편지'는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소련을 신랄하게 비판한 이 책으로 그녀는 큰 돈을 벌수 있었다.

1970년 미국인 건축가 윌리엄 피터스와 결혼해 딸 올가를 낳는 등 미국 생활에서 안정을 찾는 듯했으나 2년 뒤 결국 이혼하며 또 한 번 화제를 낳았다.

◇ 한때 귀국했다 다시 미국行 = 스베틀라나는 1984년 2명의 전 남편들에게서 태어난 아들과 딸이 있는 소련으로 돌아와 소련 국적을 회복했다. 그녀는 "미국에서 하루도 자유로운 날이 없었다"며 공개적으로 서방을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련 당국과의 불화로 2년도 못 돼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1980년대 말 한동안 영국에서 지내기도 했던 그녀는 말년에 위스콘신주의 소도시 리치랜드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며 극도로 폐쇄된 생활을 했다. 스베틀라나는 숨지기 전해인 2010년 미국 일간지 '위스콘신 스테이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스탈린이 내 인생을 망쳤다. 어딜 가던 나는 아버지의 이름 아래 언제까지나 정치범으로 남을 것"이라고 회한을 드러낸 바 있다.

스탈린에겐 스베틀라나 외에 첫 부인에게서 난 큰 아들 야코프와 둘째 부인 알릴루예바가 낳은 아들 바실리가 있었다.

야코프는 2차 대전 중 독일군에 포로로 붙잡혀 수용소에서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독일이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 독일 장군과 야코프의 교환을 제안했을 때 스탈린이 "나는 야코프란 아들을 둔 적이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cjyou@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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