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에 독도는 우리 땅' 국제재판선 힘 못쓴다

입력 2012. 8. 17. 15:30 수정 2012. 8. 1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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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역사적 권원은 중요한 문제 아닐수도…

한국이 반세기 동안 실효지배했지만…일본도 꾸준히 이의제기

지난 10일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뒤이은 일왕 관련 언급으로 한-일 관계가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에 자극받은 일본은 1962년 이후 50년 만에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카드를 다시 꺼내들었다. 이 조처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실제 재판이 시작된다면 어떤 쟁점들이 다뤄지게 될까?

1965년 한일협정의 독도밀약정일권 총리-고노 자민당 부총재"해결하지 않은 것으로 해결"한국의 실효지배 암묵적 인정최근 엠비 독도방문 이후"더 이상 한국 배려할 필요없다"전혀 새로운 전방위 공세 예고일부선 "엠비 즉흥적 행보로일본의 도발 키웠다"는 비판도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7년 전의 일이다. 그때도 한일 관계는 격랑 속을 헤매고 있었다. 당시 일본 총리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기회가 날 때마다 과거 침략전쟁의 상징인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고 있었고, 일본 시마네현은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통과시켜 한국인들을 분노케 했다. 거기에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표기한 일본 방위백서(2005년부터)가 발간된데 이어, 역사 왜곡 교과서 출판이 잇따르며 한·일간의 역사 갈등은 폭발 직전까지 이르게 된다.

참다못한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4월25일 '한일 관계에 대한 특별담화문'을 발표한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로 시작하는 이 담화에서 노 대통령은 한국인들에게 독도는 단순한 '영토 문제'가 아니라, 한민족이 지난 세기에 겪었던 고통을 상징하는 '역사 문제'라는 점을 강조한다. 지금은 유엔(UN)의 사무총장이 된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 "독도는 한일관계보다 상위 개념"이라고 말했던 것도 그 무렵이다.

한국이 동의 안하면 그만이지만…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때도 일본인들의 반응은 냉담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래도 고이즈미 총리는 "일한의 우호관계를 대전제로 냉정히 대처하고 싶다"고 말했고, "(두 나라의 정상회담에) 언제든지 응할 뜻이 있다"고 한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갈등의 소지를 만든 게 일본인데다, 역사 인식에 근거한 한국 쪽의 엄중한 추궁에 딱히 반박할 말이 없기도 했을 것이다.

지난 10일 이뤄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당시와는 사뭇 다르다. 일본 정부는 당장 무토 마사토시 주한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본 언론들은 정부가 한국과 정상간 셔틀외교 중단, 한-일 통화스와프 협정 재검토에 착수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외환위기에 취약한 우리 정부가 일본과 통화스와프 협정을 얼마나 힘들게 만들고 확대해왔는지를 생각해 보면, 일본이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뜬금 없는' 일왕 발언에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언론의 반응도 뜨겁다. <요미우리신문>은 지난 12일치 사설에서 "영토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곳에 한쪽의 국가원수가 방문하는 것은 상대국을 도외시하는 폭거"라며 흥분했고, <아사히신문>은 "가장 가까운 우방이라 했던 일본과의 관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책임 있는 정치가의 행동으로 보기에 놀랍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한·일 양국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잡아 끈 또 하나의 조처를 꺼내 놓았다. 독도의 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기로 한 것이다. 국제사법재판소는 국가 사이의 법적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엔의 주요 사법기관 가운데 하나로 그 설치 근거는 유엔 헌장(92~96조)에 두고 있다. 그러나 국제사법재판소는 '강제 관할권'을 갖고 있지 않아 실제 재판소에 가려면 분쟁 당사국 모두의 동의가 필요하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동의하지 않는 한 독도 문제는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다뤄질 수 없다.

일본 정부는 이 같은 상황을 모르고 있을까.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겐바 고이치로 외무대신은 지난 11일 이 조처를 취하는 이유에 대해 "일본의 주장을 국제사회에 제대로 이해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정부가 소송에 응하진 않겠지만, 이제 세계의 주요 국가로 성장한 한국이 제소에 응하지 않으면 국제적 위신이 추락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언젠간 응소할 수밖에 없다는 노림수인 것이다. 민주당의 실력자 가운데 하나인 마에하라 세이지 정조회장도 "한국이 자신이 있다면 응소하면 된다. 응소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며 도발했다.

실제 독도를 둘러싸고 지난 60여년 동안 한일 두 나라가 벌여 온 논쟁을 살펴보면, 이번 조처는 1965년 6월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일본이 유지해 온 독도 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지금은 한·일 양국 정부 모두가 부인하고 있지만 1965년 6월 체결된 한일협정 과정에는 두개의 커다란 밀약이 있었다. 하나는 6차 회담이 진행 중이던 1962년 11월12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장관 사이에 맺어진 청구권의 액수와 성격에 관한 밀약이고, 다른 하나는 회담이 막바지로 치닫던 1965년 1월 정일권 국무총리와 고노 이치로 자민당 부총재 사이에 맺어진 독도 밀약이다.

범양상선 박건석의 저택 홈바에서 벌어진 일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한 뒤, 독도가 한일 양국 사이에 주요 이슈로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1952년 1월18일 발표된 대한민국 국무원 고시 제14호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이 나오면서부터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일본의 선진 어업으로부터 한국 주변의 어장을 보호하기 위해 독도의 동쪽에 '이승만 라인'(평화선)을 긋고 일본 선박의 출입을 막는다.

일본 정부는 즉각 이를 시정하려 했지만, 냉전 시대 자유진영의 분열을 우려한 미국이 협조하지 않았다. 이원덕 국민대학교 일본학연구소장이 일본 쪽 한일회담 외교문서에 나오는 독도 관련 부분을 정리·분석한 보고서를 보면, 일본은 미국과 유엔의 도움을 얻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다 여의치 않자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추진하게 된다. 일본 정부는 1954년 9월, 6차 한일회담이 이뤄지던 1962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하자고 제안하지만 한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두 나라는 독도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일본통 정치경제학자인 노다니엘은 2006년 6월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와 인터뷰에서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타결을 앞두고 한·일 양국 고위 관계자 사이에 독도를 둘러싼 밀약이 합의됐다는 내용은 들은 뒤 이 내용을 확인해 <독도밀약>(2008년)이라는 책을 썼다. 이를 보면, 1965년 1월11일 서울 성북동의 범양상선 소유주 박건석의 저택 홈바에서 정일권 총리와 일본 국무대신의 밀사인 우노 소스케 중의원 의원(나중에 총리) 등이 모여 독도에 대해 한일 양국이 "해결하지 않는 것을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조약에 언급하지 않는다"는 밀약을 맺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일본이 한국의 독도 지배를 사실상 용인하는 대신 양국 정부가 각각 독도는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지난 수십년 동안 이어진 양국 사이의 독도 정책의 큰 틀이 결정된 것이다.

이 정신에 따라 그해 6월 체결된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공문'에서 두 나라는 "양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하기로 하고, 이에 의하여 해결할 수 없을 경우에는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절차에 따라 조정에 의해 해결을 도모하기로 한다"고 합의한다. 이에 따라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포함해 한국의 동의 없는 독도 문제 해결은 불가능하게 됐다. 독도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이 결여됐다는 점에서 보자면 아쉽기 짝이 없지만, 일본이 한국의 실효지배를 암묵적으로 인정했다는 성과를 부인할 수도 없는 밀약이 탄생한 것이다. 중국도 1978년 8월 일본과 평화우호조약을 맺으며 "우리 세대는 이 문제의 해결책을 찾지 못하지만, 우리 다음 세대 그리고 그다음 세대는 반드시 해결책을 찾을 것"(덩샤오핑 당시 부주석)이라며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 문제를 미봉하고 넘어간다. 영토문제란 난제를 마주해야 했던 덩샤오핑의 고뇌가 전해져 온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지난 50년 동안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일본인을 향한 립서비스 외에 한국의 독도 실효지배를 바꾸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난 10일 이 대통령의 방문에 이후 일본의 입장은 "더 이상 (한국에 대한) 배려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겐바 외무대신)는 쪽으로 전환됐다. 이른바 '협약의 정신'이 무너지고, 한국의 독도 실효지배를 변경하기 위해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라는 오래된 카드를 다시 꺼내든 것이다.

그렇다면 독도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다뤄진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국제사법재판소가 지난 1945년 이후 아시아 지역의 영토 분쟁에 내린 판결로는 타이-캄보디아 사이에 벌어진 프레아 비히어 사원 사건(1962년),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의 시파탄 섬 사건(2002년), 말레이시아-싱가포르의 페드라 브랑카 섬 사건(2008년) 등 세개가 있다.

타이-캄보디아,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판례

9세기께 만들어진 힌두 사원인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1904년 타이의 전신인 샴 왕국과 캄보디아를 식민지배하고 있던 프랑스는 주변의 당그레르산 정상을 중심으로 위쪽은 타이, 남쪽은 캄보디아의 영토로 국경을 확정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착오로 실제로는 산의 북쪽에 있는 사원이 남쪽에 있는 것으로 표기됐다. 그러나 타이는 1934년 이 사실을 확인하고도 별다른 문제제기를 하지 않다가 1949년이 되어서야 사원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캄보디아를 몰아내고 실효 지배를 시작했다. 캄보디아는 1959년 10월 이 사건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했고, 재판소는 1962년 6월15일 캄보디아의 영유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다. 타이가 지도의 오류를 깨달은 뒤에도 오랜 시간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것은 이 땅의 소유권이 프랑스(그리고 그 뒤를 이어받은 캄보디아)에게 있음을 인정한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또 다른 예인 싱가포르 해협 동쪽 끝에 있는 페드라 부랑카 섬 사례에서도 국제사법재판소는 이 섬이 1844년까지 말레이시아의 영토였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이후 영국과 싱가포르가 이 지역에 대한 해난사고 조사, 방문 규제, 해군 통신장비 설치 등의 주권 행사를 하는 동안 말레이시아 쪽에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이 섬이 싱가포르의 영토임을 인정했다.

앞의 판례에서 확인되듯 국제사법재판소는 분쟁 지역이 과거 어느 나라에 가까웠는지를 뜻하는 '역사적 권원(權源)'보다 그 지역에 대해 상대국이 별다른 문제제기를 안하는 가운데 계속적이고 평화적인 주권 행사를 해온 사실을 영유권 분쟁의 중요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는 국내 언론들이 독도가 우리나라 땅임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로 이따금 제시하는 고지도가 독도 문제를 다루는데 그다지 중요한 변수가 아닐 수도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 우리 정부가 반세기 넘게 독도를 실효 지배 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이 한 나라의 실효적 지배의 효력을 부정할 수 있는 꾸준한 항의를 해온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독도 문제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다뤄진다면, 지금까지 진행된 어떤 영유권 관련 재판보다 치열하고 긴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재판소의 판단에 영향을 줄 쟁점으로는 일본이 1905년 1월28일 각의 결정으로 독도라는 무주지를 일본의 영토로 편입한 사실이 일본 정부의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에 해당되는지 여부, 1951년 9월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에서 제외되는 영토에서 독도가 명기되지 않은 것에 대한 해석, 1952년 1월 이승만 라인으로 시작된 한국의 실효 지배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 등 간단치 않은 쟁점들을 논의해야 한다. 어찌됐든 앞으로 독도에 대한 일본의 도발적인 공세는 강해질 것이고, 우리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적잖은 외교력을 낭비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영토인 독도에 한국의 대통령이 입도한 사실을 같은 한국인으로 비난하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뼛속까지 친일·친미적'인 외교 기조를 유지하며 지난 4년 반을 허비한 대통령이 취한 행동으로 보기엔 너무 즉흥적이고,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비판을 피할 순 없다. 이 대통령만큼 대한민국을 사랑했을 역대 대통령들이 독도를 방문하지 않은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텐데, 앞으로 이어질 일본의 전방위적 독도 도발에 5천만이 받을 스트레스와 혹시 있을지도 모를 실제적 피해를 생각해 보면 진심으로 안따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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