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서민 울린 '투자자소송'

장은교 기자 2011. 11. 2.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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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볼리비아 코차밤바시. 성난 민중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들이 거리로 나선 이유는 물 때문이었다. 외채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볼리비아 정부는 1999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공기업 매각을 약속했고, 코차밤바시의 상하수도 운영권을 미국계 다국적기업인 벡텔(Bechtel)사에 넘겼다. 벡텔은 다른 투자자들과 컨소시엄 회사를 만들어 40년간 물을 위탁관리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헐값에 상하수도 시설권을 인수한 벡텔은 1주일 만에 수돗물값을 4배 가까이 올렸다. 당시 코차밤바 시민들의 월 평균 소득은 70달러였는데 수돗물값은 20달러까지 올랐다. 소득의 3분의 1을 수돗물값에 쓰게 된 것이다. 물 쓰기가 두려워진 서민들은 수돗물을 포기하고 빗물을 받아 먹기 위해 집집마다 빗물받이용 양동이를 설치했다. 그러자 벡텔사는 "빗물을 받지 못하도록 법을 만들라"며 볼리비아 정부를 압박했다. 이 때문에 코차밤바시 경찰들이 빗물받이를 단속하고 철거 작업에 나서는 촌극이 벌어졌다.

정부가 경찰까지 동원해 빗물받이 단속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 때문이다.

상수도사업에 투자했다가 국내 정책 때문에 손해를 봤다고 생각한 벡텔이 국제재판기관에 소송을 제기하면 약소국인 볼리비아 정부는 상대적으로 불리한 법정싸움을 해야 할 상황에 처해진다. 이에 볼리비아 정부가 소송 부담을 피해 빗물받이 단속에 나선 것이다.

시민들은 "물은 상품이 아니라 생명"이라며 넉 달간 대규모 거리 시위를 벌였다. 대통령은 하야했고 볼리비아는 물은 사유화할 수 없다는 것을 법으로 만들었다.

벡텔도 계약을 취소하고 2004년 쫓겨나다시피 볼리비아를 떠났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벡텔이 이듬해 투자자-국가소송제도를 근거로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볼리비아 정부를 상대로 2600만달러 규모의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볼리비아는 미국이 아닌 네덜란드와 양자 간 투자협정(BIT)을 맺었지만, 벡텔은 컨소시엄사에 네덜란드 지분이 포함된 것을 근거로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은 6년 가까이 진행되다 벡텔에 유리한 평결이 나자 볼리비아 시민들의 대규모 소요가 일어났고, 벡텔 측 컨소시엄과 볼리비아 정부가 국내외 비난 여론에 떠밀려 합의 형태로 소를 취하했다.

투자자-국가소송제도가 중남미 서민을 덮친 파장은 또 있다. 1997년 과테말라의 철도운영권을 따낸 다국적회사 RDC는 과테말라 정부가 철로 부근에 사는 불법거주자를 퇴거시키지 않자, 재산권을 침해당했다며 과테말라 정부를 상대로 국제소송을 제기했다.

투자자-국가소송제도는 국가 간 투자협정뿐 아니라 실제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후에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페루 정부는 올해 초 미국 다국적기업 렌코사로부터 8억달러 규모의 소송을 당했다.

페루 납 생산업체 도 런 페루의 최대주주인 렌코는 페루 국민들이 납중독 문제로 도 런 페루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승소하자, "페루 정부가 불공정하게 다뤘다"며 FTA의 투자자-국가소송제를 근거로 소송을 제기했다. 2009년 2월 미국·페루 FTA가 발효된 지 2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123조에서 농어민과 중소기업을 보호 육성할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투자자-국가소송제가 도입될 경우 냉혹한 국제질서가 적용돼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볼리비아와 페루 등의 사례는 생생하게 경고하고 있다.

정부는 수돗물 같은 공공재는 소송 대상에서 유보되고 제소 가능성도 거의 없다는 입장이지만, 공공영역이라도 미국인 투자자의 사업과 경쟁관계로 파악되면 투자자들이 문제 삼을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장은교 기자 ind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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