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당, 누구를 위한 정당인가?

2016. 6. 1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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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최장집 교수 “무이념 상태다” 비판… 4개 정당 합해도 지지율 10% 못 미쳐

“‘누구를 대표하는, 누구를 위한 정당인가’ ‘당의 아이덴티티는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 불분명하다. 있다 하더라도 매우 추상적 수준에 그칠 뿐이다.”

20대 총선 이후 존재감을 잃어버린 정의당을 향한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비판이다. 최 교수는 6월 7일 정의당 의원단의 ‘광폭 경청’ 워크숍에서 가진 ‘20대 국회와 정의당의 역할’을 주제로 한 강연에서 “사이즈가 다를 뿐 주류 정당과 별로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고 정의당을 말했다. 진보정당으로서 누구를 대표하려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은 ‘정체성’의 문제 때문에 현재 정의당이 위기를 맞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정의당 워크숍에서 ‘정체성’ 문제 지적

정의당을 비롯해 노동당·녹색당·민중연합당 등 이른바 진보정당들이 20대 총선에서 받은 정당득표율을 모두 더하면 8.95%로, 10% 선에도 못 미쳤다. 진보정당들이 받은 정당지지율로 따지면 17대 총선 이후 가장 낮은 성적이다. 정의당 7.23%, 노동당 0.38%, 녹색당 0.76%, 민중연합당 0.61%였다. 민주노동당이 약진한 17대 총선부터 민주노동당에서 진보신당이 분당한 뒤 치러진 18대 총선,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 녹색당 등이 선거에 나섰던 19대 총선까지 10%를 넘는 수준을 유지하던 진보정당 전체 지지율이 20대 총선에서 한 자릿수로 떨어진 것이다.

정의당은 지역구 2석·비례대표 4석으로 모두 6석의 의석을 챙겼지만 다른 진보정당들은 단 1석도 거두지 못했다. 19대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이 거둔 13석에 비하면 절반에도 못 미치는 의석 수다. 울산 북구와 동구에서 무소속으로 나서 2석을 거둔 노동계 출신 의석을 더해도 8석에 그친다. 그동안 제3세력으로 자리잡았던 진보정당의 존재감이 20대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단숨에 원내 제3당에 오른 국민의당에 확연하게 밀렸다. 특히 정의당은 진보정당 지지층에 특화된 선거전략을 세우는 대신 지난 총선에서 야권연대 논의에 집중하다 다른 야당과의 차이점을 부각시키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 교수는 “사회적 약자만을 집중적으로 대표하는 것이 진보정당의 역할”임에도 정의당이 걸어온 그간의 행보는 “보수적인 새누리당에 반대한다는 것 이외에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당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불분명하다”고 지적했다. 특정 계층이나 집단을 대표하기보다 ‘국민 전체’라는 두루뭉술한 언어를 쓰기 때문에 다른 원내정당과 차이가 나지 않는 “작은 포괄정당”이라는 것이 최 교수의 규정이다. 정체성 문제와 직결되는 것은 정당이 추구하는 이념 문제다. 최 교수는 정의당이 “무이념” 상태라고 비판하며 무이념은 “갈등의 의미와 존재, 정치에서의 역할을 부정”하기 때문에 “정치 영역에서의 이념은 여전히 유효하고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의 비판이 정의당 의원단과의 자리에서 나온 것이기는 했지만 진보정당 전체의 정체성 문제에 관한 통렬한 지적이라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특히 이번 총선에서도 국회 진출은 물론 지지율 1%의 벽도 넘지 못한 노동당 등 소수정당에서도 진보정당이 스스로 대표하겠다는 계층이나 집단과 멀어져 있는 현실이 존재감을 희박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 중 하나라는 목소리도 나왔다. 노동당의 한 당직자는 “우리 당이 노동자, 특히 비정규직이나 ‘알바’ 같은 주변부 노동자들을 더욱 대변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당을 움직여가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활동가·운동가스러운 정서가 현장의 노동자는 물론 손에 닿지 않는 수많은 유권자들의 생각과 동떨어져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고 말했다.

‘집토끼’로 불리는 유권자층 존재 희미

과거 총선에서 진보정당의 고정적 지지층이자 이른바 ‘집토끼’로 불리는 유권자층의 존재가 희미해진 것도 현재 진보정당이 겪는 위기의 배경이다.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대형 사업장 중심의 조직된 노동자층은 과거 민주노동당 시절 배타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분당, 그리고 통합진보당으로의 재결집 및 다시 이어진 분당사태는 진보정당 지지자들의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20대 총선에서 민주노총은 조합원들에게 4개 진보정당과 산별노조가 추천한 지역구 후보들에게 투표하라는 지침을 발표했지만, 지지정당이 4개로 분산된 데다 이전보다 적극적인 독려도 없어 조직표가 진보정당에 집중되었는지는 미지수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진보정당을 지지하다 현재는 녹색당에 가입해 있는 평당원인 김성준씨는 “그동안 진보진영 안에서 무수한 분열이 일어나고 또 선거 때마다 일시적으로 결합하는 일이 반복되는 걸 보면서 한때는 열성적이던 주변의 진보정당 당원들도 실망하고 돌아서는 모습을 봤다”며 “열의를 가지고 정당에 참여하는 당원들이 자신이 속한 쪽의 입장만 내세우다 결국 갈라서는 상황에서는, 당 밖에서 보는 일반 유권자들도 돌아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 교수의 지적대로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방안은 진보정당만의 ‘집토끼’일 수 있는 고유한 지지층을 확보하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집토끼’로 표현되는 고정적 지지층을 다진 다음에 적대적이거나 미온적인 ‘산토끼’ 지지층을 점차 포섭해가는 전략이다. 그러나 거대정당들에도 쉽지 않은 이런 전략이 비교적 규모가 작고 평당원의 참여가 활발한 진보정당에서 적용하기는 더욱 어려운 대책일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최 교수의 강연 후 만난 정의당의 한 당직자는 “열성적인 지지층의 활동이 활발해지면 좀 더 한 발 물러서서 지켜보는 지지층이 이탈한다는 참여민주주의와 심의민주주의 간의 딜레마가 있는데, 정의당처럼 진보정당일수록 이 문제가 더 두드러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당직자가 말한 딜레마란 당원이나 유권자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참여민주주의 방식을 확대하면 같은 의견에 동조하는 열성적 집단 내부의 결속만 더 강화된다는 미국의 정치학자 다이애너 머츠의 분석에 기초를 두고 있다. 열성적인 지지층의 결집에 따라 보다 온건하며 깊은 대화와 소통을 통해 정치적 합의에 이르러야 한다는 심의민주주의 입장은 밀려나고 그 지지층도 소외된다는 딜레마다. 열성적인 지지층을 집토끼로, 심사숙고하는 지지층을 산토끼로 대입하면 결국 두 마리 토끼를 쫓으면 한 마리도 잡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오는 셈이다. 하지만 이 당직자는 “그동안은 의석수를 늘려 당의 외연을 넓히고자 하는 데 집중했다면 최 교수의 지적처럼 내실을 다져 양쪽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건 두 말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정의당 의원들은 당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최 교수의 지적에는 대체로 공감하면서도 소수정당이 가진 한계 때문에 진보정당의 원론적 이상을 펴기에는 어려운 현실적 제약들도 있다고 말했다. 추혜선 의원은 “소외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진보정당에겐 절체절명의 의무라고 보기에 일정 정도 동의는 한다”면서 “하지만 현실정치에서는 여러 변수가 있고 촘촘히 엮인 삶의 문제들이 집약돼 있어서 힘의 논리나 대중의 무관심도 작용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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