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 작사자, 과연 누구인가?

2005. 11. 29.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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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광복 60주년의 해가 저물어 간다.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등을 지낸 이동휘 선생을 비롯,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을 조직해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 초대 내무총장을 지낸 도산 안창호 선생,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1927년 한족총연합회 주석으로 활약한 김좌진 장군 등 12명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했다.

과거 청산을 위한 기구 설립과 일제하 강제동원 피해조사 등을 위한 노력 등으로 분주한 한 해 였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노력 사이에서 올해도 또 잊고 넘어가는 소중한 일이 하나 있다. 바로 우리 민족의 숨결이 담긴 노래 '애국가' 작사자 규명이 그것이다.

애국가는 나라를 빼앗긴 설움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 조국의 해방을 염원하는 절절한 마음과 기개, 조국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 했던 당시 시대적 배경을 담고 있기에 그 감동의 물결은 더욱 진한 명실상부한 애국의 노래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애국가의 작사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초등학교에서 음악책을 처음 받아 들고는 '애국가 작사자는 미상이라는 사람인가 보다'한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애국가 작사자 안창호-윤치호로 압축

애국가의 작사자는 그동안 안창호설, 민영환설, 최병헌설, 윤치호설, 김인식설, 남궁억설 등 다양한 주장이 있어 왔지만 결정적인 근거나 사료가 없어 미상으로 전해오면서 지금은 안창호설과 윤치호설로 대략 압축된 형국이다.

그동안 윤치호의 후손들이 각종 토론회나 증거자료를 통해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자설을 주장해 왔고 몇몇 신문에서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외국 문헌을 발견했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지만 학계의 다양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두 인물 중 누가 정확한 작사자인지 공식 규명하지 못한 채 해묵은 논란만 계속되고 있다.

윤치호가 애국가의 작사자라고 주장하는 쪽은 윤치호가 자신이 설립한 한영서원 교재로 찬미가를 편찬해 보급하고 1945년 10월경에 애국가 가사를 옮겨 쓴 '가사지'를 남겼다는 것을 주요 증거로 제시한다.

<안도산전서 (安島山全書)>

그런데 윤치호가 개성에 설립한 한영서원(韓英書院)은 안창호가 신민회 조직 2년 후인 1908년도에 평양의 유지인 김진후의 지원으로 설립한 대성학교에서 윤치호가 안창호의 인도로 교장직을 맡아 일하면서 얻은 경험이 동기가 되어 세운 것이라고 주요한은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대성학교는 안창호가 설립하고 사상적, 정신적 혼신을 쏟은 교육기관이다. 또한 안창호가 애국가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보급한 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안창호는 그 자신이 대성학교 설립의 사상적, 실질적 주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윤치호에게 교장을 맡기고 자신은 대리 교장으로 자신의 공과를 모두 윤치호에게 돌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즉 윤치호는 안창호의 노력으로 신학문을 수용하고 체계적 교육이 시행되고 있던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느낀 바 있어 자신의 작품격인 찬미가를 저술하며 여기에 도산이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애국가를 수록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한말 독립운동가인 안태국(안창호, 양기탁 선생과 신민회를 조직,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피검)의 사위인 홍재형이 안태국의 말을 회고하는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의 내용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본래 애국가 가사의 첫 절이 '성자 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 수려 동반도는 우리 조국일세'라고 되어 있었는데, 도산이 하루는 서울서 내려 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않으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라고 청하자 윤치호가 도산의 생각을 물었고, 도산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구절을 보여주자 윤치호가 기뻐하면서 찬성하자 도산이 이를 당시 교장인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자고 제안하여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또 주요한은 <안도산전서>에서 원래 끝 구절은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임군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였으나 1919년도부터 상해에서 이를 지금과 같이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고 이는 분명 안창호가 고친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도산 안창호에 대한 증언과 기록들

이광수가 저술한 <도산 안창호전>

이는 이광수가 저술한 <도산 안창호전>의 내용과도 확연히 일치하는데 이광수는 상해임시정부 정청(政廳)이 매일 애국가를 불렀으며, 역시 마지막 구절의 '임군을 섬기며'를 '충성을 다하여'로 도산이 수정하였고 이 노래가 널리 불려 국가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광수는 이 책에서 '도산은 애국가의 작사자냐'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그렇다고 부인도 하지 않았지만 현재 애국가가 안창호의 작이 분명하다고 저술하고 있다. 친일파로 거론되는 이광수조차 안창호의 애국가 작사를 당시의 여러 정황이나 역사적 사실에 바탕해 인정하고 있는 것.

윤치호의 행적들

그럼 윤치호의 족적을 잠시 살펴보자. 윤치호는 1911년 105인 사건이 일어나자 친일전향을 조건으로 1915년 2월 13일에 출감한다. 그 후 윤치호는 1915년 3월 14일자 매일신보에 자신이 일선동화(日鮮同化)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는 글을 쓰는가 하면, 3·1운동이 일어난 지 며칠 후 <경성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평화를 위해 일제에 순종하라는 매국적 발언을 일삼기 시작했다.

1943년 일제의 총동원령이 나자 11월 18일자 <매일신보>를 통해 조선 학도병을 독려하는 적극적 친일행위에 열을 올린 윤치호는 1945년 2월 일본 귀족원 의원에 선출되어 일본 귀족이 되기에 이른다. 그런 그가 해방이 되자마자 자신이 애국가를 지었노라는 애국가 가사를 옮겨 쓴 '가사지'를 남긴다. 왜 그는 해방 후 자신이 애국가 작사자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어했을까?

역사규명 차원서 작사자 명확히 밝혀야

애국가는 단순히 나라를 상징하는 차원을 넘어 해방을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렸던 선조들의 얼과 정신이 서린 것이기에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를 설명해 주기도 하는 상징물이다.

설사 윤치호가 아무리 악질 친일파였다 해도 그의 잠시동안의 행적이나 정신상태로 보아 지금의 애국가를 그가 지었을 수 있는 능력까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만약 독립협회 회장, 만민공동회의 최고 지도자까지 지내고도 적극적으로 나라를 배신한 그가 애국가의 작사자라면, 그것은 우리가 광복 60주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일제와 친일파의 망령에 놀아나고 있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수많은 독립선열들의 피를 헛되이 하는 슬픈 우리의 친일 청산 실패 자화상을 누가 어찌 감당할 것이며 어떻게 매국자의 기만적 노래를 애국가라며 가사말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알고도 계속 부를 것인가 말이다.

어쨌든 이 애국가의 작사자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두 인물과의 관계, 명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규명되어야 하겠지만 언제까지 이 해묵은 애국가 논란이 계속되어야 하는지, 왜 정부는 계속 오리무중인지 이제 그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1950년대 당시 문교부가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결정한 바 있으나 윤치호의 후손들이 반발해 시작된 이 논란은 이제 반백년이 되었다.

광복 60주년의 해가 저물어 가는 지금, 단순히 나라를 상징하는 차원을 넘어 해방을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렸던 선조들의 얼과 정신이 서려 있고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를 설명해 주는 역사적 국가 상징물인 애국가에 대해 이제는 정부가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주장은 분명 설득력을 가진다.

더 이상 애국가가 후손들끼리의 줄다리기나 학계의 이해관계, 정부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지 않도록 애국가 작사자 규명을 위한 노력에 정부가 나서고 의식있는 역사학자들과 국민들의 관심이 필요한 때가 바로 지금이다.

국정넷포터 이영일(ngo201@hanmail.net)

<이영일님은> 경희대학교NGO대학원에서 NGO정책관리를 전공하고 있으며 중앙일보 디지털국회, 한겨레필진네트워크, 한국i닷컴 등에서 웹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직속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과 한국청소년단체협의회 실무위원, 흥사단본부 조직부장 등 다양한 NGO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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