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과거사 규명대상 쟁점.전망>-2(끝)

연합뉴스

◇ 실미도사건 = 영화 '실미도' 상영을 계기로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됐다.

1971년 8월23일 인천 용유도에 딸린 무인도인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던 실미도 부대원들이 자신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탈출해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한 뒤, 서울로 진입해 청와대로 향하던 중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한 사건이다.

실미도부대(공군 684부대)는 1968년 1월21일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서울 세검정고개까지 침투한 1.21사태의 보복 차원에서 평양의 김일성 주석궁 보복 습격을 목표로 31명의 특수임무 요원으로 창설됐다.

정식 부대명칭은 '공군 2325전대 209파견대'로 실제로 군에서는 실미도부대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대원들은 실전과 동일한 북파 훈련과 철저한 인민군식 훈련을 받으며 단 3개월만에 북파가 가능한 인간병기로 개조됐다.

그러나 3년4개월 동안 출동 명령만을 기다리다가 1970년대초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북파 임무가 취소됐으며 이들의 존재가 외부에 공개될 것을 우려한 정부는 기간병들에게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기간병 24명 가운데 18명이 북파부대원들에 의해 희생당하고 6명만이 살 아 남았다. 훈련 중 사망한 7명을 제외한 부대원 24명은 인천에서 버스를 빼앗아 서 울로 향하다가 총격전 끝에 수류탄을 터뜨려 4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망했다.

생존자 4명도 1972년 3월 사형당했으며 정부는 이 사건을 '실미도 난동사건'으 로 규정했고 30여년간 베일에 싸여 있었다.

실미도부대에 정통한 예비역 공군장교는 지난 해 2월 연합뉴스 회견에서 사형이 집행된 요원은 임성빈(충북 청주) 김종철(대전) 이석천(인천) 김창구(충북 옥천)씨 등 4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초병 살해죄와 살인죄, 방화죄 등의 혐의가 적용된 것으로 알려진 4명의 사형수를 비롯한 부대원들의 신분은 철저히 은폐됐고 '사형수' 등으로 왜곡 전파됐다.

그러나 정래혁 국방장관은 사건 발생 다음 날인 1971년 8월24일 국회에 출석해 발언한 내용을 정리한 속기록에는 684부대원 전원이 민간인 신분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국방부도 작년부터 가동한 '실미도진상조사TF'를 통해 전과기록이 있는 부대원은 4명에 불과하고 부대원 모두 평범한 시민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져 사형수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된 것이 적법했는 지 여부가 쟁점이 될 전망이다.

684부대 창설 주체와 부대원 사살명령자, 창설요원외 추가모집 여부, 공군이 부대운영을 맡게 된 경위 등도 규명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대원들이 입대하면서 작성한 신원진술서 등 관련자료가 대부분 폐기돼 당시 지휘관들의 증언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베일에 가려진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날 지는 의문이다.

◇ 학원녹화사업 = 전두환 정권 초기인 1981∼1983년 사이에 운동권 학생들을 강제 징집해 '특별정훈교육'을 시켜 '불온사상'을 순화(녹화)한다는 명분으로 실시됐다.

이 과정에서 강압적인 사상 개조와 학생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불법연행과 수사 가 자행됐고 엄청난 육체ㆍ정신적 가혹행위가 가해졌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으나 아직까지 전모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1988년 5공 청문회와 2001년 활동을 시작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 이르 기까지 녹화사업의 진실을 규명하려는 작업은 간헐적으로 진행됐으나 정작 누가 이 계획을 주도했는 지는 미궁에 빠져있다.

녹화사업은 학생운동에 가담한 학생들을 조기에 입영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정부 가 1981년 12월5일 발표한 '소요 관련 대학생 특별조치'를 통해 사실상 본격화됐다.

군에 강제징집된 학생 수는 대략 1천100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나 군이 자료를 공 개하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아니다.

1981년 11월부터 1983년 11월 사이에 447명이 강제징집됐고 1982년 9월부터 녹화사업이 외형상 중단된 1984년 11월까지 모두 256명이 특별정훈교육을 받은 것으로 조사된 적이 있다.

의문사위는 최근 1983년 실탄을 맞고 숨진 것으로 알려진 서울대생 한희철씨(당 시 22세)는 녹화사업의 일환으로 자행된 구타 및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자살한 것 으로 발표했다.

정부는 잇따른 군내 의문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여론이 거세지자 1984년 소 요 관련 대학생 조기입영제를 폐지하고 녹색사업의 전담부서인 보안사의 3처5과를 해 체했다고 발표했으나 1990년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에 비춰 운동권 출신자를 이용 한 프락치 공작은 그 이후에도 계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누가 학원 녹화사업을 주도했고 의문사를 당한 6명이 어떻게 죽었으며 운동권 출신자에 대한 프락치 활동 강요가 얼마나 장기간 지속됐는 지 여부 등을 가리는 것이 핵심이다.

국군기무사는 전신인 보안사에서 자행한 녹화사업과 관련한 자료를 상당부분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군 과거사위 관계자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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