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민통선마을 대피소..감자저장고 '악취 풀~풀'
"습기와 냄새, 벌레 등으로 30분 앉아 있기도 어려워"
(양구=연합뉴스) 이재현 기자 = "방독면이나 구급시설은 고사하고 습하고 악취가 풀풀 나는 감자저장고에 어떻게 대피해 있으라는 건지…"
군사분계선이 10㎞ 이내 거리에 불과한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마을인 강원 양구군 해안면 만대리의 주민 대피소.
북한군이 대북 확성기 방송 시설 타격을 최후 통첩한 시한인 22일 오후 5시가 임박한 일촉즉발의 긴장이 고조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마을 주민 10∼20여명은 대피소 앞에 자리를 깔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었다.
남북의 긴박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한여름 밤 폭염을 피해 공터로 나온 주민들이라고 착각할 뻔했다.
"대피소에 왜 안 들어가시느냐"는 질문에 주민들은 '대피소 여건을 보고 나서 그런 질문을 하라'라는 말과 함께 손으로 대피소 내부를 가리켰다.
대피소는 212㎡ 규모였지만 내부는 이미 수확한 감자가 상자째로 가득 쌓여 있었다.
비좁은 내부로 들어가려는 순간 대피소 입구 2m∼3m 전부터 극심한 악취가 코를 찔러 발길이 저절로 멈춰졌다. 하마터면 호흡까지 멎을 뻔했다.
대피소 주변을 둘러보니 지난해 수확한 감자 수백 ㎏은 이미 썩어 악취를 풍겼고, 올해 수확한 감자는 대피소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1990년대 지어진 저장시설이 유사시에는 대피소로 이용된다는 것도 주민들을 통해 전해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긴장감이 고조된 민통선 마을 주민들에게 썩은 감자 냄새가 풀풀 나는 저장고로 대피하라는 것은 너무도 가혹한 처사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한 주민은 "이게 최전방 민통선 마을의 안보 현실이다. 눈이 있으면 똑바로 봐라. 열악한 대피소 상황은 나 몰라라 하고 대피소 수용률만 충족되면 그만인 거냐"라고 따지듯 물었다.
온종일 생업에 종사하다 주민 대피령으로 부랴부랴 감자저장고 앞에 모여 행정기관이 간식으로 나눠준 빵과 우유로 허기진 배를 채우던 주민들의 모습에서 처량함이 느껴졌다.
차량을 몰아 인근의 또 다른 대피소로 향했다.
마을 도로를 따라 100m∼150m 간격을 두고 마련된 오유1·2리, 현3리 대피소의 상황도 만대리 대피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저장시설 내부를 어느 정도 치워놨느냐의 차이였을 뿐이다.
대부분 대피소는 저장시설 특유의 지하실 냄새와 습기는 물론 모기와 벌레의 공격으로 30분도 채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대피 주민 상당수는 북한의 추가 포격 도발에 따른 긴급 상황임에도 대피소 밖으로 나와 도로에 서 있었다.
한 주민은 "포격을 피해 대피소에 있느니 차라리 집으로 가 있는 게 더 낫다"는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그나마 174㎡ 규모의 1층짜리 현1리 대피소는 다소 비좁긴 해도 저장시설 대피소에 비하면 훌륭한 수준이었다.
이 대피시설은 2010년 11월 서해 연평도 포격 도발을 계기로 2013년 건립됐으나 수용 인원은 130여명에 불과하다.
해안면의 주민등록상 인구는 1천410여명으로 학업·취업자 490여명을 제외한 실 거주민 900여명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때문에 나머지 주민들은 남북한의 긴장감이 고조될 때마다 열악한 저장고에 대피하거나 영농 현장에서 각자 알아서 몸을 피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해안면사무소의 한 관계자는 "전국에서 면(面) 전체가 민통선인 마을은 해안면이 유일하다"며 "최전방 마을의 열악한 대피소 상황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라고 전했다.
이어 "예전 남북 긴장감이 고조됐을 때도 대피 훈련은 형식에 그쳤다"며 "실제 주민 대피가 이뤄진 이번 일을 계기로 최전방 안보 현실의 속살을 드러낸 듯해 부끄럽다"라고 덧붙였다.
j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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