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왜 14년째 냉동고에 누워 있나

정희상 기자 입력 2012. 5. 21. 10:54 수정 2012. 5. 21.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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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2월, 발생 당시부터 전체 군대 의문사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기폭제가 됐던 김훈 중위 사건은 14년이 흐른 요즘 또다시 군 의문사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할 핵심 사건으로 주목받고 있다. 김훈 중위 유골은 아버지(김척 예비역 육군중장)가 한때 1군단장으로 근무했던 경기도 벽제 1군단 산하 보급대대 창고에 다른 60여 구의 군 의문사 유골과 함께 14년째 보관돼 있다.

국방부는 그동안 김훈 중위 같은 자살 조작 사건은 물론 공무 중 군부대 내에서 가혹행위 등으로 우울증을 얻어 자해 사망한 경우도 본인이나 가족 탓으로 돌리며 순직 처리를 거부했다. 대통령소속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국민권익위원회 등 주요 국가기관에서 별도 조사를 벌여 공무 관련성을 인정하고 순직 처리를 권고한 군 내 사망자에 대해서도 군은 요지부동이었다. 유가족이 국방부의 이런 초법적인 냉대에 맞서는 길은 오직 하나, 사체나 유골 인수를 거부하는 방법이다.

ⓒ시사IN 백승기 김훈 중위가 안치된 벽제의 한 군부대 영현창고에는 구천을 떠도는 군 의문사 유골 60여 구가 보관돼 있다.

현재 각 군병원 냉동고나 군부대 창고에 방치된 군 의문사 시신과 유골은 모두 138구이다. 그중 시신 상태로 병원 냉동고에 장기 보관된 사체가 32구이고, 화장된 뒤 유골함 상태로 각 군부대 창고에 보관된 경우가 106구(실미도 사건 희생자 20구 포함)이다. 사체의 경우 국군수도병원 9구, 각급 군병원 22구, 민간병원 1구 등 모두 32구인데 가장 오래된 이가 경북 김천의료원 영안실 냉동고에 14년째 누워 있는 해군 나진영 이병이다.

권익위, 제도 개선 권고할 예정

1998년 9월27일 부대 내 상습 가혹행위로 허리 디스크를 얻어 휴가를 나왔다가 병원 치료를 받은 뒤 의문사한 나 이병의 시신은 14년째 민간병원인 김천의료원에 방치돼 있다. 해군 수사당국은 사건 조사를 나와 "내성적인 나 이병이 부대 복귀를 두려워해 투신자살했다"라고 발표한 뒤 시신을 김천의료원에 인계했다. 유족은 나 이병이 현역 군인 신분으로서 부대 내부 원인 탓에 사망했으므로 시신을 군병원에 안치하고 제대로 진상을 규명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해군은 14년 동안 나 몰라라 방치했고 그 결과 나 이병의 시신 안치 비용만도 2억여 원을 넘어섰다. 병원 측은 나 이병 부모의 집과 사무실, 자동차 등에 가압류를 걸어 유족은 생계도 이어가기 힘든 고통에 시달려왔다. 결국 병원 측이 건 소송에서 법원은 나 이병의 영안실 냉동고 사용료는 군부대의 책임이라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승소 후에도 나 이병 유족에 대한 가압류는 풀리지 않았다. 유족은 다시 가압류 해제 소송을 내야 했다.

나 이병 사건은 군의문사위의 조사 결과 부대 안의 집단 구타, 잠 안 재우기 등 가혹행위가 원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군의문사위는 국방부에 나 이병을 순직 처리한 뒤 국립묘지에 안장할 것과 밀린 시신 안치 비용을 시급히 해결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국방부는 아직까지 이를 거부하고 있다. 급기야 유족은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소송을 내서 아직도 지루한 법정 싸움을 벌이고 있다. 나 이병의 아버지는 "죽은 아들이나 산 부모나 처지가 다를 바 없다. 시신 안치 비용 문제로 집과 사무실이 압류당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다. 멀쩡한 자식을 군에 보냈더니 억울하게 죽인 것도 모자라 가정을 풍비박산 낸 데 대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라고 절규했다.

ⓒ연합뉴스 국방부 앞에서 소복 시위를 벌이는 군 의문사 유족들.

군 의문사 유족이 겪는 남모를 고통과 아픈 사연은 비단 나 이병 유족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5월10일 벽제 1군단 산하 보급대대 영현창고에 모인 어머니 네 명은 군부대가 십수년씩 창고에 방치해둔 아들의 유골함을 가슴에 끌어안고 오열했다. 모두 군의문사위가 조사 후 공무상 사망으로 인정하고 순직 처리를 하라고 권고한 경우이지만 국방부가 외면하자 절망한 어머니들이다. 2001년 9사단에서 선임병들의 가혹행위와 성추행 등에 시달리다 우울증을 얻어 자해 사망한 유장현 이병의 어머니는 "일반 직장인이 퇴근 후 집에서 사망해도 직무 관련성이 인정되면 재해로 판정하는 세상인데, 군에서 데려간 멀쩡한 아들을 시체로 만들어놓고 천편일률적으로 원인을 가정에서 찾으려 하니 그것이 더 분하고 서럽다"라고 말했다. 군 내 사망자의 아버지 중에는 국방부의 이런 태도에 절망해 술로 스트레스를 달래다 일찍 세상을 뜬 경우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이런 잘못된 관행이 되풀이되는 것은 군 의문사 유족의 비극일 뿐 아니라 군에 대한 국민 불신을 증폭시킨다는 점에서 국방부의 수치이기도 하다. 2009년 군의문사위가 해체된 후 이 문제 해결을 넘겨받은 국민권익위원회에서는 5월21일 전원회의를 열어 군내 사망자 순직 처리와 명예로운 조처를 보장하도록 국방부에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권고안을 채택할 것이라고 한다. 국방부가 어떻게 답할지 주목된다.

정희상 기자 /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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