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호 판사 MB정부에 강력한 '쫑코'를 먹여"

2012. 2. 17.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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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현장] 서울 북부지법 직원·시민 '국민판사 퇴임식' 열어

서기호 판사 '국민법복' 선물받고 눈물 주르륵

"법원은 법원장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2월17일 오전 11시44분. 서울 북부지방법원 11층 서기호 판사의 집무실. 이날 판사로서 마지막 선고를 마친 서 판사가 집무실로 올라와 양복 위에 걸쳐 입은 법복을 벗었다. 서 판사는 법복을 옷가방에 곱게 접어 넣었다. 예비 판사시절부터 이날까지 12년간 한결같이 입었던 그의 법복은 손목 부분이 해져 있었다.

"이 옷 한 벌로 12년 판사 생활을 해왔어요. 계속 입다보니까 이렇게 해어졌네요."

 서 판사에게 처음 법복을 입었을 때의 느낌이 어땠는지 물었다.

  "처음 법복을 입었을 때는 날아가는 느낌이었지요. 정말 어깨에 날개가 생긴 느낌이었어요. 제가 좀 늦게 판사가 된 편인데 '이제 진짜 판사가 되었구나' 하며 감개무량했었어요. 평생 판사로 살줄 알았지요."

  그의 집무실 책상에는 이제 막 선고를 끝낸 판결문 자료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책꽂이 한 켠에는 이런 저런 책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맨 위에는 마샬 로젠버그의 책 <비폭력 대화> 책이 놓여 있었다. 책을 들춰보니 서 판사가 남긴 메모들이 책 한 켠에 정갈하게 적혀 있었고 곳곳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재판정에서는 소통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재판할 때 활용할 수 있는 좋은 대화법들이 이 책에 다 있어서 매일같이 보던 책입니다. 실제로 응용해서 많이 말했지요."

  12시에는 북부지법 앞 광장에서 법원 직원들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마련한 '국민 판사 퇴임식'이 예정돼 있었다. 서 판사를 보좌하던 한 직원이 아쉬운 듯 서 판사 양복 왼쪽 가슴에 꽃을 달아줬다.

  "1년 동안 서 판사님을 보좌했어요. 제가 28년째 법원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이런 판사님은 처음이었어요. 늘 직원들을 세심하게 배려해주셨습니다. 절대 이렇게 불명예스럽게 퇴임하실 분이 아닙니다. 서 판사님에 대해선 직원들이 제일 잘 압니다. 판사님과 뮤지컬도 보러갔었는데 이제 같이 못하게 되니 너무 아쉽네요."

  윤종길 참여관도 거들었다. "서 판사님이 늘 소통을 강조하려 했던 것 제가 잘 알고 있어요. 헤어지는 게 정말 아쉽고 꼭 돌아오실 것이라 믿습니다." 서 판사가 윤 참여관을 꼭 끌어 안았다.

  법원 앞으로 나가자 100여명의 법원 직원들과 트위터 등을 보고 찾아 온 일반 시민들이 서 판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민들의 손에는 노란 손팻말과 풍선 등이 함께 들려 있었다. '희망', '힘내세요', '꼭 돌아오세요'라고 적힌 손팻말이 서 판사를 맞았다.

  서 판사가 시민들 한 가운데에 서자 퇴임식이 시작됐다. 이보나 법원 실무관이 대표로 송별사를 읽었다. 목이 메인 듯, 들릴 듯 말 듯한 크기의 목소리로 이 실무관이 입을 열었다.

  "판사님. 며칠만에 너무 야위셨습니다. 스스로를 돈키호테라고 말하시면서 괜찮다고만 하시던 우리 판사님. 판사님에게 아무런 도움도 못주고 이렇게 숨죽여 지켜보기만 해 죄책감이 듭니다. 이 마음만은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중략) 다시 판사님을 판사님이라 부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이보나 올림."

  서기호 판사가 이어 마이크를 잡았다. 상기된 목소리로 서 판사는 준비해 온 퇴임사를 읽어내려갔다.

  "겉으로는 부적격 통보를 받았지만 실제 내용에는 여러 가지 모순이 있습니다. 이런 재임용 탈락 결정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략) 저는 쫓겨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0년 담임제 임기를 마치고 잠시 떠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의 재임용 탈락은 부당하고 위법입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소송을 벌일 겁니다. (중략) 법원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겁니까. 법원장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까.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까. 만천하에 공개된 관료적인 법원 조직을 여러 사람들과 힘을 모아 바꿔나가겠습니다. 소수 엘리트 법관들만의 사법부가 아니라 국민의 사법부가 되도록 제가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서 판사가 퇴임사를 마치자 시민들이 박수로 화답해주었다.

  이어 국민 판사 임명장 수여식이 진행됐다. 트위터 모임 '국민의 눈' 회원들이 준비해온 임명장이었다. 대표로 이상갑 변호사가 임명장을 줬다.

   "임명장. 개념법관 서기호님. 당신은 촛불시민에 대한 대법관의 부당한 재판개입에 항거하고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려는 이명박 정부에 대해 강력한 쫑코를 먹였으며 임용 탈락이라는 치졸한 법원 인사에 맞장을 놓아 사법부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으므로 사법권 독립을 바라는 시민의 모임인 '국민의 눈'은 함께 할테니 쫄지 말라는 응원의 뜻을 모아 당신을 국민 판사에 임명합니다."

  시민들은 서 판사에게 '국민 법복'을 선물로 전했다. 가슴 한 가운데 한자로 '바를 정'자가 씌여있다. 이상갑 변호사는 "법보다 훨씬 더 중요한 바른 자세로 앞으로도 활동해 달라는 취지에서 바를 정을 새겼다"고 소개했다.

  끝으로 시민들은 노란 풍선을 하늘로 날려보냈다. 풍선은 법원을 향해 유유히 날아 올라갔다. 이 모습을 법원 경비원들이 소형 카메라로 담았다. 이들에게 "왜 찍냐"고 묻자 "위에서 찍으라고 해서 찍는다. 나도 모르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서 판사의 마지막 가는 길에는 북부지법에서 일하는 공무원 100여명과 자발적으로 찾아온 시민들이 함께 했다.

  자영업을 하는 조윤주(42.서울시 은평구)씨는 트위터를 보고 서 판사 퇴임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날 잠시 가게를 남편에게 맡겨두고 법원 앞을 찾았다. 조 씨는 "이 대통령이 취임한 뒤로 계속 우리 사회가 합리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지 않는 것 같아 답답하다"며 "서 판사도 사법부가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을 쫓아낸 경우라고 보고 있다. 옳지 않은 일인 것 같아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어 찾아왔다"고 말했다.

  이날 퇴임식은 여러 우여곡절 끝에 열렸다. 법원노조 북부지부가 퇴임식을 준비하려 하자 북부지법은 16일 장소사용 불허를 통보했다. 북부지방법원장은 서 판사를 불러 "따로 퇴임식을 준비해주겠다"고 회유했다. 하지만 법원공무원들은 자체적으로 서 판사의 퇴임식을 강행했다. 이날 북부지법은 출입기자들의 법원 출입까지 막는 등 예민한 모습을 보였다.

   북부지법 공무원 박성민 계장은 "고생하신 서 판사를 위해 이 정도는 해드리는 게 도리같아 퇴임식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퇴임식 사회를 보던 이가 한용운의 '님의 침묵' 한 구절을 읊었다.

 "우리는 만날 때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서 판사는 고개를 숙여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오후 1시 30분께 집무실로 다시 돌아왔다. 단독 판사 20여명이 갑자기 서 판사를 찾아와 선물과 기념품을 한아름 건네주며 응원하고 돌아갔다.서 판사는 마지막으로 짐을 챙겼다. 그는 "이렇게 많은 분들이 지지하고 격려해주니 외롭지 않다. 와주신 분들께 고마운 마음"이라고 말했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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