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레나강을 가다] '소수민족' 야쿠트인, 러시아인과 융화.. 극동지역 개척 전초기지로 우뚝 서다

송은아 입력 2017. 10. 21. 17:01 수정 2017. 12. 25.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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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야쿠츠크 기념비 통해 본 도시의 발자취
야쿠츠크는 러시아를 구성하고 있는 8개 연방 관구 중 극동연방관구에 속하는 야쿠티야(사하) 공화국의 수도로 극동지역에서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야쿠츠크’라는 명칭은 이 지역에 거주하는 ‘야쿠트’라 불리는 민족의 명칭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실 ‘야쿠트’라는 용어는 인근에 거주하던 또 다른 소수민족인 에벤, 에벤키인들이 자신들과는 구분되는 인근 부족을 비하해서 부르는 용어였다고 한다. 하지만 17세기 초 동시베리아에 도달한 러시아인이 ‘야쿠트’라는 용어를 수용하면서 이 용어가 고착됐는데 정작 야쿠트라 불리는 부족은 스스로를 투르크계 민족의 명칭인 ‘사하’인이라고 칭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에도 야쿠티야 공화국이라는 러시아어 공식명칭과 함께 ‘사하’ 공화국으로도 불리는 이유이다.
야쿠츠크의 제2차 세계대전 전승기념비. 말을 타고 달리는 야쿠트 민족 영웅 ‘만차리’의 조각이 세워져 있다.
바이칼 호수 근처에서 시작해 북극해로 흘러드는 레나강 중류 지점에 있는 야쿠츠크는 1632년 베케토프라는 러시아인이 강 우안에 요새를 건설하면서 만들어졌다. 물론 훨씬 이전인 13~14세기부터 이 지역에는 야쿠트인이 살고 있었고 이 지역에 새롭게 진출한 러시아인과 원주민 야쿠트인 간의 관계는 결코 평화롭게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인들은 원주민에게 담비의 모피를 세금으로 바치도록 강요했으며 그 과정에서 원주민에 대한 억압이 가해졌고, 그에 대한 원주민의 저항도 있었다. 하지만 점차 러시아인들이 원주민들을 복속시켜나가면서 17~18세기경 야쿠츠크는 시베리아의 주요 모피 집산지가 되었고 19세기 말경에는 인근 지역에서 대규모의 금과 광물이 발견되면서 비로소 도시다운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후 신생 소비에트 정부는 1922년 야쿠티야 자치공화국을 만들고 야쿠츠크를 그 수도로 정했는데, 야쿠츠크는 오늘날 영구 동토 지대에 건설된 도시 중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우리나라 창원과 자매도시 관계를 맺고 있는 야쿠츠크의 2017년 총인구는 약 30만명에 이르는데 이중 야쿠트인이 약 50%를 차지하고 러시아인이 40% 정도, 그 외에 우크라이나, 키르기스, 에벤키, 부랴트, 아르메니아, 에벤인으로 구성돼 있다. 최근에는 우즈베키스탄, 체첸 등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이주해 오는 무슬림 인구도 늘어남으로써 두 곳의 회교사원도 생겨났다.

베케토프와 야쿠트인의 첫 만남. 레나강 중류 지점에 있는 야쿠츠크는 1632년 베케토프라는 러시아인이 강 우안에 요새를 건설하면서 만들어졌다.
러시아 여느 도시처럼 야쿠츠크에도 소비에트 시기 세워진 레닌 동상과 혁명 관련 기념물이 여전히 건재하지만, 그 외에도 2000년대 들어 소비에트 시기 이전의 역사적 경험을 잘 나타내주는 새로운 동상, 기념비 등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소비에트 시기 건립된 기념물과 함께 도시가 걸어온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올해 7월 야쿠츠크 시내를 거닐면서 마주친 동상과 기념물은 무척 새롭게 다가왔다.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지난 25년여 동안 주로 우랄산맥 서쪽 지역, 우랄 및 서시베리아 지역에 위치한 도시를 방문했는데 그곳은 모두 러시아인이 주민의 대다수를 이루는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봐왔던 기념물, 동상의 주인공은 대부분 러시아인이었는데 이곳 야쿠츠크 길거리에서 마주친 동상의 주인공은 확연히 달랐다. 러시아인과 함께 한국인처럼 생긴 야쿠트인이 동상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외에도 동상의 모티프도 러시아인과 소수 민족, 즉 야쿠트인 간 교류, 화합 그리고 조화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 많았다. 따라서 이들 동상은 필자로 하여금 이곳이 러시아의 극동지역, 특히 러시아인보다 지역 소수민족이 더 많이 사는 야쿠츠크임을 새삼스레 일깨워 주었다. 

이 같은 기념물의 예로 2007년 야쿠츠크 도시 설립 375주년을 기념하여 레나강변에 세워진 33m 높이의 기념탑 하단부에 설치된 거대한 부조를 들 수 있다. 기념비를 둘러싼 4개의 부조 중 하나는 러시아 탐험가 베케토프와 야쿠트 원주민 간의 첫 만남을 묘사하고 있고, 그 옆 부조는 1880년대 러시아 정부에 의해 야쿠츠크로 유형 보내져 이곳에서 살면서 최초의 야쿠트어 사전을 편찬했던 러시아인 언어학자 페카르스키와 야쿠트인 지식인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세 번째 부조에는 러시아인 정교회 사제가 야쿠트인에게 세례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부조에는 모두 야쿠트인, 러시아인이 등장하지만 러시아인이 이곳에 와서 지역 주민에게 모피를 세금으로 거둔 억압 정책을 묘사한 부조는 없다. 공공장소에 설치된 기념물이 지방 정부의 허가와 지원으로 건립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조형물은 오늘날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지방정부와 모스크바 중앙정부의 관계와 입장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양 민족 간 조화와 화합을 유독 강조하고 있다. 

야쿠츠크 시내의 LG센터 빌딩.
그런가 하면 2005년 야쿠티야 공화국 정부가 국가 주권 선언 15주년을 기념하여 도시 중앙부에 설치한 러시아인 남성과 야쿠트 여인으로 이루어진 한 쌍의 부부와 그 아이의 동상도 러시아·야쿠티야 간 화합을 상징하는 기념물이다. 소련 말기 소련 내 민족 공화국의 독립 열기가 한창 고조되었을 때 소련을 구성하는 15개 공화국 중 하나였던 러시아 연방공화국 내 자치공화국으로서 야쿠티야도 소비에트 시기 단순 원료공급기지로 전락해버린 공화국의 정치적 지위와 야쿠트 민족의 품위를 회복하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 보다 대등한 관계를 지향하기 위해 국가 주권 선언을 발표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포스트소비에트 시기에 세워진 기념물은 의외로 야쿠티야의 독립적 지위를 강조하기보다는 오늘날 러시아연방의 일원으로서 야쿠티야의 지위, 그리고 러시아와 야쿠티야 간 화합과 단합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 이 부부 동상의 주인공들은 누구일까? 실제 인물들이다. 러시아 남성은 세묜 데지네프로 1638년에 야쿠츠크로 와서 야쿠트 여인과 결혼했는데 동상의 여인상이 바로 그의 야쿠트인 아내 아바카야다이다. 데지네프는 이후 야쿠츠크에서 동쪽으로 탐험을 계속해서 추코트카 지역에 다다랐고 거기서 콜리마강을 따라 북극해로 나아가 동진하다가 베링해협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1648년 경 추코트카 지역의 아나디르 강어귀에 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곧 데지네프가 덴마크 탐험가 비투스 베링보다 베링해협을 80년 먼저 항해한 것을 뜻하고 동시에 아메리카 대륙과 마주한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 최초로 도달한 유럽인이라는 것이다. 야쿠츠크는 이렇게 러시아 탐험가들의 북동시베리아와 극동지역 개척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다.

송준서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 HK교수
야쿠츠크 도심 승리광장에 제2차 세계대전 전승 30주년을 기념하여 1975년에 세워진 탑에서도 역시 야쿠트 민족의 색채를 읽을 수 있다. 모스크바 승리공원에 세워진 전승기념탑에는 러시아정교회 성인 게오르기 상이 설치되어있지만 야쿠츠크의 전승기념비 주인공은 19세기 봉건영주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고 의적 활동을 한 야쿠트 민족의 영웅인 ‘만차리’였다. 이 기념탑은 필자가 이제까지 여타 러시아 도시에서 보았던 러시아 병사가 서 있는 전승기념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당시 소련 내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야쿠티야 공화국의 병사들도 소비에트 시민의 일원으로 나라의 부름을 받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것은 동일하다.

야쿠츠크 시내를 거닐면서 만났던 기념비, 동상들은 야쿠츠크가 러시아인들이 북동시베리아와 북태평양 지역을 탐험·개척할 수 있게 하여 유라시아 대륙 동편 끝까지 이르는 영토를 갖게 하는 데 전초기지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었다. 동시에 이들 동상은 야쿠트 민족은 17세기 러시아인들이 이 지역에 처음 나타난 이후 오늘날까지 조화와 화합의 묘를 발휘하여 러시아인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해왔음을 보여주며, 그들의 ‘조국’ 러시아를 위해 시민의 임무를 충실히 다해왔음을 보여준다. 한국이 향후 북극권을 통한 물류를 개발하고 시베리아지역 자원개발 참여를 위해서는 극동 연안 지역에서 더 내륙으로 들어가서 북동시베리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해왔던 야쿠츠크를 방문해 이민족들과 조화와 화합을 이루어내고 유지해온 야쿠트인들의 경험과 전통을 배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

송준서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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