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 '숙의민주주의' 실험, 신고리 공론화가 남긴 것

선명수 기자 2017. 10. 21.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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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신고리 5·6호기의 운명이 결국 ‘공사 재개’로 결론났다. 찬·반 양론이 팽팽했던 신고리원전 건설 문제는 3개월에 걸친 공론조사 결과 발표로 일단락됐지만, 문재인 정부의 ‘숙의 민주주의 실험’은 이제 막 출발선에 섰다. / 강윤중 기자
·신고리 공론화가 남긴 것…“공론화, 정치적 책임 회피 수단돼선 안돼”
바둑 용어 중 ‘기자쟁선(棄子爭先)’이라는 말이 있다. 돌 몇 점을 버리더라도 선수를 잡아 더 큰 이득을 취하라는 뜻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월, 사회적으로 찬·반이 뜨거웠던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 여부를 ‘공론조사’를 통해 결론내겠다고 밝혔다. 한국 민주주의가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인, ‘숙의 민주주의’에 대한 실험이기도 했다. “정치도 바둑과 다르지 않다”며 평소 바둑 애호가임을 밝혀온 문 대통령의 이 ‘승부수’는 기자쟁선의 한 수였을까.

3개월에 걸쳐 진행된 공론조사 결과가 마침내 베일을 벗었다. ‘국민 대표’로 선정된 시민참여단 471명의 최종 결론은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 그리고 ‘탈원전 정책 추진’으로 요약된다. 이미 종합공정률이 29.5%(시공은 11.3%)에 달하는 신고리 5·6호기 건설은 재개하되 향후에는 원자력발전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정책 결정을 하라는 권고다. 이미 건설 중인 원전은 매몰비용 등을 고려해 백지화할 수 없지만,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는 힘을 실은 셈이다.

■시험대 오른 1호 ‘숙의 민주주의’ 결과적으로 ‘기자쟁선’이다. 신고리 건설 중단이라는 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은 꺾였으나, 청와대는 탈원전 정책 추진이라는 큰 틀의 명분을 얻게 됐다. 오히려 신고리 5·6호기 공사 재개를 둘러싼 극심한 갈등의 뇌관은 ‘국민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제거했다. 이는 대통령의 ‘대선 공약 파기’이지만, 시민참여단과 공론화위원회의 권고를 수용하는 형식을 취하며 청와대는 공약 파기 책임론을 비켜갈 수 있게 됐다. 더불어 신고리 원전 공사를 둘러싼 산업계의 극렬한 반발을 잠재우면서 탈원전 정책기조는 유지하는, 실리와 명분의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됐다. 당장 착공에 들어가지 않은 원전 6기의 백지화 여부가 향후 쟁점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청와대는 “신고리 5·6호기 문제와 에너지 전환 정책은 별개”라는 입장이다.

청와대는 그간 공언해왔던대로 공론화위의 권고를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10월 24일로 예정된 문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에서 공론화위의 권고안대로 건설 재개 의결을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청와대는 공사 재개라는 ‘결론’ 못지않게 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공론화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공론화위 발표 직후 기자들과 만나 이번 공론조사를 통한 의사 결정이 “감동적인 과정이었다”고 평가하면서 이 모델을 다른 사회 갈등 현안에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 역시 지난 10월 10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숙의 민주주의를 통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더욱 성숙시키면서 사회적 갈등사항의 해결 모델로 만들어 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청와대와 여권은 ‘국민 이성의 승리’라면서 이번 공론조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지만, 공론화위 출범 당시부터 법적 근거와 조사기간 등을 둘러싸고 적지 않은 논란이 일었다. 공론조사가 대의제 민주주의를 우회하는 여론정치라는 지적부터, 대의민주제의 한계를 보완하는 시민참여형 민주주의라는 반론까지 여러 쟁점이 쏟아졌다. 공론화위 출범 전부터 온 사회의 관심이 공사 중단 혹은 재개라는 ‘찬·반 결론’에 쏠려 있었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새 정부 들어 첫 도입된 숙의 민주주의 실험에 대한 검토다. 이번 신고리 공론화 모델이 앞으로 시범사례가 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문재인 정부 ‘1호 숙의 민주주의’의 득실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하는 이유다.

■공론조사, 대의제 한계 보완책 될까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ing)는 아직까지 국내에서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의 중간쯤에 놓인 미지의 영역”(박원호 서울대 교수, <중앙일보> 칼럼)으로 여겨지지만, 해외에서 공론조사는 대의민주제의 결함을 보완하는 숙의 민주주의의 대표적 방식으로 각광받는 추세다. 해외 27개국에서 107건의 공론조사가 진행됐고, 가깝게는 몽골 정부가 지난 4월 6개의 헌법 개정안에 대해 시민에게 묻는 공론조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1996년 미국 텍사스주가 실시한 발전소 설립에 관한 공론조사, 2012년 일본의 원자력 관련 공론조사가 잘 알려진 대표 사례다.

공론조사는 1988년 제임스 피시킨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가 처음 창안한 것으로, 불특정 다수가 사안을 잘 모르는 채로 응답하는 여론조사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마련됐다. 일례로 과거 미국에서 존재하지 않는 법안에 대한 여론조사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이 ‘가짜 법안’에 응답자의 3분의 1이 적극적인 의사 표시를 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공론조사는 이와 달리 확률 추출을 통해 선정된 대표성 있는 시민들이 전문가가 제공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학습과 토론, 숙의의 과정을 거쳐 결론을 도출한다. 공론화위는 이 같은 방식이 “여론조사의 ‘피상적 태도조사’의 약점을 보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공론조사와 여론조사 모두 시민의 의견을 집단적으로 수집·확인하는 절차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여론’은 무작위로 추출된 수동적 시민들의 직감적인 의견인 반면, ‘공론’은 학습과 토론이라는 숙의과정을 통해 충분한 정보와 지식을 갖춘 능동적 시민들의 의견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공론화위 출범 당시부터 자유한국당과 일부 언론은 ‘전문가를 배제한 채 여론재판으로 국가 에너지 정책을 결정하는 행위’라며 강하게 비판했지만, 이런 주장과 달리 전문가가 토론회나 자료집 등으로 정보를 제공해 이들의 참여가 배제돼 있지 않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공론조사는 이미 기존의 찬·반 양론이 극명하게 갈리는 사안에 적용하기에 좋은 방식”이라며 “기존의 찬성과 반대 입장이 상호 숙의 속에 변경될 가능성에 주목하고, 이해와 공감이 만들어지며 문제 해결을 도출하는 게 숙의 민주주의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국회에서 원전 문제에 대한 결론을 좀처럼 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실천으로 숙의 민주주의 실험이 의미가 있다”고 평했다.

신고리 5·6호기 공사 재개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시민참여단의 종합토론회가 지난 10월 13일부터 2박 3일 일정으로 충남 천안에서 열렸다. / 강윤중 기자

정부도, 정치학자들도 공론조사가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보완재’로 기능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정부의 신고리 공론조사 결정 전반의 ‘과정’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대표적인 것이 선거를 통해 선출된 국민의 대표자들에게 부여한 결정을 다시 유권자에게 ‘외주화’한다는, 대의제적 비판이다. 정한울 여시재 솔루션 디자이너는 “공론조사는 숙의과정을 통해 다수가 설득 가능한 안을 만들어가는 데 있어서는 활용가치가 크지만, 문제는 정부가 공론조사에 모든 의사 결정을 위임했다는 데 있다”면서 “국가 정책의 최종 결정을 이를 위임받은 국회가 아니라 대표성이 없는 시민참여단이 도출하고, 이를 정부가 그대로 따르겠다고 발표한 것은 정치적 책임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조정관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역시 “아일랜드의 경우 시민의회에서 도출한 개헌안을 의회에서 다시 토론하고 검토했는데, 신고리 공론조사는 그 과정이 출발부터 생략돼 있었던 점이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면서 “공론조사에 외부의 영향을 차단하는 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정치권이나 사회 전반에 있어 원전 문제가 활발히 논의되지 못하고, 시민참여단 내부의 숙의에만 그친 것도 한계점”이라고 평했다.

■“공론화, 정치적 책임 회피 수단돼선 안돼”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100일 당시 “국민은 더 이상 간접민주주의로는 만족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탄핵 촛불집회’라는 기반 위에 출범한 문재인 정부의 태생적인 성격과 주권자 의사 존중이라는 발언의 ‘선의’와는 별개로, 현 정부가 대의제 정상화보다 공론조사와 직접민주주의 등 ‘국회 밖 정치’에 주력하는 것이 아니냐는 일각의 의구심을 낳기도 했다. 공론화 과정의 이른바 ‘국회 패싱’은 야당이 “국회를 무시했다”며 강하게 반발하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는 정책 결정에 있어 정치적 책임소재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관후 서강대 글로컬정치사상연구소 연구원은 “공론조사 도입에 대한 사회적 논의과정 없이 대통령 지시라는 ‘톱 다운’ 방식으로 이번 공론조사가 결정됐고, 공론화위의 결론을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취지는 옳다 해도 이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긴 것”이라며 “공론화위의 권고안을 국회가 한 번 더 토론하고 검증한다면 설사 시민참여단의 뜻에 반해 이를 부결시킨다 해도 유권자는 다음 선거를 통해 정당에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국회에서 갈등을 조정할 때는 지난하기는 하지만 최소한 쟁점이 가시적으로 드러나 유권자가 판단하고 책임소재 역시 따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신고리 원전과 관련한 논의가 “마치 블랙박스처럼 공론화위 ‘내부의 숙의’로만 봉합”되면서 사회 전반의 활발한 논의로 이어지지 못했고, 이번처럼 공론조사에 사실상 결정을 위임하는 방식은 “자칫 정치권이 민감한 사안의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아울러 이 연구원은 “외국 사례를 보면 개헌조차도 국민투표 한 번으로 모든 것을 결론내는 게 아니라 반드시 의회의 토론과 결정을 거친다”면서 “이는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안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누가 질 것이냐의 문제”라고 말했다. 앞서 몽골의 경우 헌법 개정 당시 공론조사의 필요성과 절차를 명시한 법을 의회가 통과시킨 뒤 공론조사를 실시했고,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 역시 사전에 하원의 국민투표법안 가결로 시행됐다.

신고리 원전 건설을 둘러싼 갈등은 국회에서는 좀처럼 결론을 내기 어려운 사안이었다는 반론도 있다. 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내고 대(對)국회 업무를 담당하는 전병헌 청와대 정무수석조차도 “국가적 갈등과제가 국회로 가서 정쟁으로 변질된 경우가 많다”면서 “국민의 직접 참여를 통해 ‘집단지성’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대의민주주의에 역행하지 않는다”고 항변한 바 있다. 숙의 민주주의라는 시민참여 모델이 각광받는 것은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들여 선출한 국민의 대표자들이 조정과 타협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식물국회’라는 비아냥과 함께 대의제의 위기를 스스로 초래한 것과도 무관치 않다.

비단 원전문제 뿐만 아니라 4대강 사업, 사드 배치, 송전탑 건설 등 각종 사회적 현안에서 정책 결정은 이해관계자와 이에 얽힌 정치권이 사실상 독점해 왔다. 정부가 일단 방향을 정하면 정부 정책에 맞는 전문가를 앞세워 밀어붙이는 방식이 권위주의 정권 때부터 계속돼 왔고, 정작 해당 정책으로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시민의 참여는 배제됐다. 대의제의 취약점으로 꼽히는 이런 ‘이해관계자 중심’의 의사 결정을 ‘시민 중심’으로 전환하는 데 있어 이번 공론조사가 첫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시각도 있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결론이 어느 쪽으로 나든 이번 시도가 중요한 것은 그간 소수에게 독점돼 있던 원전에 관한 정보가 과거보다 투명하게 공개돼 시민들이 객관적으로 따져볼 기회가 생겼다는 점”이라며 “야당이 선거법 개정 등 대의민주제의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국회를 바이패스 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설득력을 얻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장 교수는 “개헌 등 정치권 안에서 공전하고 있는 문제도 공론조사 형식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며 “지금까지 국회의 개헌 논의는 권력구조 개편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공론화 과정을 통해 개헌에 대한 주권자의 다양한 뜻을 반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3개월의 ‘실험’은 이제 마무리됐다. 이번 공론조사의 한계를 지적하는 이들도, 새로운 시도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도 이번 공론화 작업이 앞으로도 자주 소환될 중요한 선례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이제 그 선례를 어떻게 평가하고 보완하느냐의 숙제가 남았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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