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찬의 軍]"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6.25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이산가족 상봉을 마친 사람들이 헤어지기에 앞서 서로 손을 맞잡으며 석별의 정을 나누고 있다. 게티이미지 |
하지만 한반도의 남부에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떠올리면 즐거운 기억은 아니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바로 6.25 전쟁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서 북한군의 일제 포격을 감행하면서 시작된 6.25 전쟁은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뒤바꿨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극동의 작은 나라를 돕기 위해 수만명의 외국 청년들이 한반도에 도착해 전쟁터로 달려갔다. 그 중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북한군의 남침에 맞서 소총을 들고 전선으로 향했던 학도병들도 잊을 수 없는 존재다.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6.25 전쟁은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발효되면서 64년째 휴전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6.25 전쟁의 영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국민들을 단결시키고 국가의 안정에 도움이 된 측면도 있지만 자신과 뜻이 다르거나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종북 세력으로 몰아붙이는 이분법적 이념관, 상명하복식 군대 문화에 따른 조직의 경직성,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 등은 6.25 전쟁이 남긴 어두운 그림자다.
◆ 전장에 몸을 던진 이름 없는 전사들
6.25 전쟁에 참가한 에티오피아 걍뉴부대원들이 전방을 향해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다. |
6.25 전쟁에 참가한 에티오피아 걍뉴부대원들이 총을 들고 부대 밖에서 경계를 하고 있다. |
◆ 20세기 세계에서 가장 긴 전쟁의 명암(明暗)
북한군의 진격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하는 피난민들.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졌다. 게티이미지 |
낙동강부터 압록강까지 전선이 오르내리면서 남북의 인구는 큰 폭의 이동이 불가피했다. 공산주의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북쪽으로, 민주주의를 원하던 사람들은 남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정전협정 직후 남북의 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남측은 북한군의 만행을 강조하는 반공 이념을 내세워 국민들을 단결시키고 안보 태세를 강화했다. 북측은 반미, 반제국주의 노선을 강화하며 사회주의 체제를 굳히고 김일성 일가의 세습을 정당화하는 우상화에 열을 올렸다.
남과 북의 대치 국면은 체제 경쟁으로 이어졌다. 양측은 전후 복구 사업을 비롯한 경제 건설과 외교전 등 모든 분야에서 상대방보다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 ‘속도전’을 벌였다. 우리나라 경제가 고도 성장을 구가했던 것도 일정 부분은 체제 경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남북간 체제 경쟁은 웃지 못할 유치한 자존심 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비무장지대(DMZ) 내 민간인이 거주하는 남측의 대성동 마을과 북측의 기정동 마을에는 국기게양대가 있다. 1970년대 대성동 마을에 48m 높이 태극기 게양대가 설치되자 기정동 마을에 더 높은 인공기 게양대가 설치됐다. 대성동 마을 국기 게양대가 1982년 1월 99.8m로 높아지자 한 달 뒤 기정동 마을에는 165m 높이 게양대가 들어섰다.
미군의 포로가 된 북한군 병사들이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이동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
전쟁 공포에 따른 심리적 불안은 1970~1980년대 엽기적인 살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1975년 8~10월까지 17명을 살해한 김대두, 1975년 6월 아내를 목졸라 숨지게 한 뒤 사체를 토막냈던 이팔국, 1981년 11월 노름빚을 갚기 위해 중학생 제자를 납치 살해하고 돈을 요구한 주영형, 1982년 4월 하룻밤 동안 62명을 살해하고 자살한 우범곤 등 살인사건이 꼬리를 물었다. 전쟁의 충격에 따른 트라우마를 제대로 치유하지 않고 교육에 따른 사회화도 미진했으며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하려 했던 1950~1960년대의 사회상이 낳은 결과였다.
6.25 전쟁은 기존의 질서를 송두리째 무너뜨린 비극이었다. 수백만명이 사망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가족과 생이별해 생사 확인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전쟁이 남긴 커다란 상처를 치유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외형적인 부분만 개선됐을 뿐이다. 60여년이 흐르면서 6.25 전쟁에 대한 기억이 차츰 흐릿해지는 상황에서 전쟁터를 누비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기억하는 한편, 전쟁이 낳은 사회적 부작용을 극복하고 사회통합을 위한 구체적인 작업들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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