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성의 시작

박민 입력 2016. 9. 22. 10:59 수정 2016. 9. 22.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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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한 지 20년이 넘은 정우성이 이제야 좋은 배우가 될 준비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청춘을 함께한 김성수 감독과 15년 만에 만난 '아수라'로 그는 이제 막 좋은 배우의 시작점에 섰다.

악인을 잡아야 하는 강력계 형사가 있다. 하지만 말기 암 환자인 아내를 치료할 돈이 필요한 남자는 성공을 위해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악덕 시장의 뒤를 봐주고 돈을 받는다. 그의 목을 죄는 건 시장만이 아니다. 지독하리만큼 독한 검사와 검찰 수사관은 시장을 잡기 위해 그를 압박한다. <아수라>는 서로 치열하게 싸우는 지옥 같은 세상을 사는 남자들의 영화다. 정우성은 그 나쁜 놈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고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덜 나쁜 형사 ‘한도경’을 연기한다. <비트>와 <태양은 없다> 그리고 <무사>까지 정우성의 젊고 찬란한 시절을 함께한 김성수 감독이 15년 만에 다시 정우성과 호흡을 맞췄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청춘을 살던 <비트>의 ‘민’과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도경’은 닮은 지점이 있는 듯 보인다. 다만 지킬 것이 남은 도경은 살기 위해 훨씬 치열하고 처절해졌고, 감정의 깊이 또한 끝을 모르고 깊어졌다. 마치 숙제와 같던 <아수라>의 촬영이 끝난 후에도 도경이 도대체 어떤 놈인지 확실한 답을 찾지 못한 정우성은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신에 차 말했다. “이제야 좋은 배우가 될 준비가 된 것 같아요. 자연스레 그런 때가 온 걸 수도 있고 <아수라>로 인해 더 그렇게 된 걸 수도 있고.”


네이비 더블 버튼 코트 랑방(Lanvin), 라운드 네크라인 셔츠 발렌시아가 바이 10 꼬르소 꼬모(Balenciaga by 10 Corso Como), 부츠 컷 팬츠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스웨이드 슈즈 크리스찬 루부탱(Christian Louboutin).

<아수라>에는 서로 다른 악인이 등장한다. 가상의 도시인 ‘안남’이 배경이다. 그 도시에 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은 저마다 악의 모습을 지녔다. 어쩌면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악의 단면들이 캐릭터로 만들어진 것 같다. 악이라는 것 자체를 이야기한다기보다는 악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이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 홍보에 굉장히 적극적이라고 들었다. <아수라>는 김성수 감독과 15년 만에 함께한 작품이라 더 특별할 수도 있겠다. 어떤 영화든 열심히 홍보한다. 내 영화니까. 하지만 <아수라>가 나에게 여러 의미가 있는 작품인 것은 사실이다. 김성수 감독님과 15년 만에 함께하는 작품이기도 하고,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는 여러 배우들과 함께 작업했다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그리고 나에게는 배우로 살면서 가장 큰 도전이었던 영화이기도 하다. 감독님이 자신이 진짜 만들고 싶은 영화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시놉시스도 보지 않고 무조건 함께하겠다고 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 시나리오를 받았다.

기대한 만큼의 시나리오였나? ‘도경’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주인공으로 삼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멋있게 악한 놈도 아니고 대단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정쩡하다고 해야 할까. 명확한 캐릭터가 아니었다. 어쩌면 주인공에게 기대할 법한 틀에 박힌 선입견을 가고 시나리오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전 같았으면 감독님에게 캐릭터에 대한 이런저런 의견을 말했을 텐데 이번에는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도경이란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가 있으리라 믿었다.

도경을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겠다. 내가 잘 모르는 감정의 깊이를 찾아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보다는 감독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내심 이게 과연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처음으로 내가 어떤 연기를 해야 할지 정해놓고 촬영에 들어가지 않고 일단 부딪혀보고 도경이란 인물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인식한 후에 그 흐름을 따라가려 했다. 한 컷이 끝나고 나서도 내가 어떻게 연기했는지 모를 때가 많았다.

캐릭터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불안할 것 같다. 불안하진 않았다. 캐릭터를 찾아가는 방식이 다른 작품과 달랐을 뿐이다. 내가 도경을 찾아가는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만큼은 확신했다. 그 확신이 있었기에 불안한 여행을 한 거다. 아직까지도 도경이란 놈을 이해하려면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지만 시나리오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도경은 해낸 것 같다.

 

네이비 리브 조직 니트 터틀넥, 부츠 컷 팬츠 모두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그래서 도경은 어떤 인물인가? 이 시대를 사는 40대 남자들이 갖고 있을만한 온갖 고민을 혼자 다 떠안고 있는 사람이다. 살기 위해 어떤 라인에 줄을 서야 할지, 지금 자신이 내린 결정이 맞는지 불안하지만 그렇다고 홀가분하게 내려놓을 수는 없는 위태로운 남자다. 40대라면 인생의 안정기에 들어가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지 않나. 어느 날 누군가 영화 스틸 사진을 보고 <비트> 때 얼굴이 보인다고 하더라. 미래가 불안하다는 점에서 <비트>의 민과 닮아 보였던 것 같다. 그래도 그 둘의 방황은 다르다. 20대의 방황은 원한다면 내려놓을 수 있지만 책임질 것이 많은 40대의 방황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민과 도경을 연기하는 정우성은 달라진 것 같은가? 크게 변한 건 없다. 두 영화 모두 끝난 후에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를 만큼 막막했다. 그만큼 깊이 빠진 작품이다. 다만 20대에 연기한 민에게는 연민을 많이 느꼈다. 영화에서 민은 죽지만 내 마음에서는 민을 죽일 수 없었다. 나와 함께 민도 잘 성장했으면하는 바람이 있었다. 반면에 도경이는 연민을 못 느꼈다. 도경이 자신의 가치관을 좀 더 명확하게 확립하고 자신의 삶을 잘 결정할 수 있기를 바랐다. 어쩌면 이제는 내가 연기한 인물을 좀 더 이성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 도경에게 연민을 느낀 적이 딱 한 번 있다. 병실에서 아내와 함께 촬영한 장면인데 연기할 때는 괜찮다가 모니터링할 때 울컥했다. 도경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지. 슬픈 장면도 아니었는데 왜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지금은 도경을 떠나보냈나? 배우가 캐릭터를 떠나보내는 건 극장에서 관객에게 영화를 보여준 후인 것 같다. 아직은 아니다.


스트라이프 셔츠 프라다(Prada), 블랙 와이드 팬츠 랑방(Lanvin), 스웨이드 슈즈 크리스찬 루부탱(Christian Louboutin).

개봉을 앞둔 배우는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수라>는 받아들이기 버거울 만큼 감정의 밀도가 깊다. 캐릭터들의 감정도 굉장히 강하게 표현된다. 시대가 어수선해서인지 요즘은 극장에서 그렇게 깊은 감정에 이입되는 걸 원치 않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그걸 깨야 하는 게 이 영화의 숙제인 것 같다. <아수라>는 영화가 그리고자 하는 감정들을 치열하게 잘 드러낸 영화다. 만듦새나 완성도 역시 어느 영화보다도 괜찮다고 믿는다.

감정의 밀도가 진한 작품이었으니 현장에서도 힘들었을 것 같다. 많이 지쳤겠다. 촬영하는 내내 매일매일 지쳐 있었다. 게다가 도경이는 모든 인물에게 스트레스를 받으며 시달린다. 현장 상황에 따라 후시 녹음을 해야 하는 장면이 있는데 더빙하는 일이 이렇게 힘든 영화는 없었던 것 같다. 연기할 때 그 감정을 찾아 들어가다 보면 진이 다 빠질 정도였다. 그 감정을 찾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고.

감정 또한 많이 소진됐겠다. 그래도 괜찮다. 감정을 소진하더라도 화면으로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으니 소진한 만큼 바로 보상을 받는 느낌이다. 촬영할 때는 상대 배우들이 정말 처죽이고 싶을 정도로 나를 괴롭혔다. 황정민, 주지훈, 곽도원 모두 나와는 연기하는 호흡이나 템포, 리듬감이 많이 다른 배우들이었다. 서로 다른 음색을 내는 배우들이 만나 절대적인 하모니를 만들었을 때의 쾌감 덕분에 지치지 않았다. 매일 촬영이 끝나고 아무리 피곤해도 소주 한잔 하고 나면 새로운 에너지가 만들어졌다.


모직 코트 포츠 1961(Ports 1961), 티셔츠 요지 야마모토 바이 분더샵(Yoji Yamamoto by BoonTheShop).

얼마 전 제작발표회 때 보니 배우들과의 케미가 유독 좋아 보였다. 감정의 밑바닥까지 치열하게 연기하다 보니 그만큼 서로 깊은 신뢰가 생긴 것 같다. 막상 현장에서는 영화 속 감정을 유지해야 하다 보니 그렇게 웃고 떠들지 못했다. 우리끼리 그렇게 웃고 떠든 건 제작발표회 때가 처음이었다. 현장에서 쌓인 신뢰감과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그렇게 놀 수 있게끔 만들어준 것 같다. 끝과 끝이 만나는 것처럼 연기란 고통과 행복이 맞닿는 지점에 있다. 고통 속에서 행복을 만난달까. 그래도 현장은 늘 즐겁다. <아수라>도 한도경이란 남자를 쫓는 불안한 여행이었지만 촬영 기간엔 늘 현장에 가고 싶었다.

영화 속 모든 액션 장면을 대역 없이 찍었다. <아수라>의 액션은 매끄럽기보다는 처절하지 않았을까? 감정만큼 몸부림도 치열했다. 다른 액션영화처럼 잘 짜인 합으로 보이면 안 됐다. 순간적인 몸짓처럼 보여야 하는 액션도 있었고. 예측 불가능한 액션이어야 했기 때문에 더 힘들었다. 중간중간 쓸데없는 몸짓을 넣어야 했는데 잘 맞춘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한 액션이라 더 힘들었다. 자칫 잘못하면 상대 배우를 다치게 할 수도 있었고.

지금껏 연기를 통해 넘어보고 싶었던 자신의 한계가 있나? 한도경을 넘어 보고 싶었다. 도대체 이놈 뭐지? 이번 영화는 배우로서 숙제와 같은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라는 게 흥행도 당연히 중요한데 꼭 작품성과 흥행이 비례할 수는 없다. 흥행을 예측할 순 없지만 한국 영화사에서 분명히 동료나 후배 배우들에게 ‘이런 영화가 나올 수 있구나’라며 힘을 줄 수 있는 영화라는 점만큼은 확신한다.


벌키한 롱 카디건 J.W. 앤더슨(J.W. Anderson), 티셔츠 메종 마르지엘라 바이 쿤(Maison Margiela by KOON), 팬츠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블랙 레더 레이스업 슈즈 루이 비통(Louis Vuitton).

소중하지 않은 작품은 없겠지만 아픈 손가락 같은 영화도 있겠지? <무사>가 그렇다. 한국 영화로는 처음으로 중국에서 촬영했고, 촬영을 위해 중국의 오지란 오지는 모두 돌아다녔다. 그때 마련해두었던 중국 촬영 인프라가 아직까지 도움이 되고 있다.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좋은 작품을 남겼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개봉 일주일 만에 9·11이 터지며 흥행에 변수가 생겼다. 사람들에게 공공기관에 가지 말라고 하고 테러 당시 화면도 워낙 충격적이어서 영화 흥행에도 영향을 미쳤다. 결과적으로 흥행에 실패했기 때문에 관객이 외면한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당시 개봉 일주일 만에 2백만 관객이 들었다. 지금도 가끔 안성기 선배님도 <무사>는 한 번 재개봉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신다.

그러고 보면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선택해왔다. 좀 더 안정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는데. 안전한 건 재미가 없다. 그런데 이제부터 안전한 것도 해봐야 할 것 같다. 그간 너무 혼자만의 의미를 위해 좌충우돌 힘든 역할을 해온 것 같다. 뭐든지 부딪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기를 부린 것 같기도 하다. 나이를 먹으며 그런 용기가 좀 덜해지겠지. 똑같은 도전을 하더라도 좀 더 여유 있게 할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도 썩 안전한 선택을 할 것 같진 않다. <나를 잊지 말아요>는 제작자로 나서기도 했고, 본인이 쓴 시나리오로 감독 준비도 하고 있다. 제작은 하고 싶어 했다기보다는 어쩌다 보니 하게 된 거다. 문득 이제는 ‘두려움을 가지고 선택을 해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또 도전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실패했다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뭔가를 얻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시간이 됐다고 생각한다. 시나리오는 현재 작업 중인 것도 있고 이미 완성된 것도 있다. 감독 입봉도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있었고 시기를 조율하는 중이다.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좀 더 젊었을 때는 뭔가를 선택할 때 내가 하고 싶은 것으로 밀어붙였는데 이제는 여러 가지를 따져보게 된다는 점이다. 배우도 해봤고, 제작자도 해봤으니 배우와 제작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감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제작자로 경험한 시행착오도 언젠가 감독으로 입봉하면 도움이 되겠지.


니트 재킷, 니트 터틀넥, 팬츠 모두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이제는 좀 더 내려놓고 살고 싶은 게 있나? 너무 내려놓고 살았던 것 같다.(웃음) 지금껏 뭘 쥐고 살려고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잡지 않고 살기는 했는데 이런 건 있다. 배우 정우성에 대해 기대하는 여러 이미지를 깨뜨리고 싶지 않은 욕심이 있었다. 그렇다고나 자신에게 굉장히 엄격한 것도 아니다. 그래도 평소에 규칙적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매일 사무실로 출근하고 시나리오 작업도 하고 운동도 하고 뭐 그렇게.

영화 홍보를 앞두고 여행을 다녀왔다고 들었다. 원래 여행을 하며 에너지를 채우는 편인가? 여행을 자주 다니진 않는다. 어렸을 때는 여행을 잘 못 다녔다. 가족과 함께 많이 다녔다면 여행이 좀 더 자연스러웠을 텐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다음 작품을 앞두고 있으면 서울을 떠나는 게 불안하기도 했다.

배우라는 완성체에 대한 그림은 어느 정도 완성되었나? 이제야 비로소 내가 좋은 배우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나 싶다. <아수라> 때문에 더 그런 걸 수도 있고. 이번엔 단순히 한 작품을 끝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영화를 만들며 감독님과 함께 했던 15년, 20년 전 생각도 나고. 물론 그때보다 더 틱틱거리긴 했지만.(웃음) 감독님이 정말 좋아하셨다. 전에도 잠도 안 주무시고 촬영 기간은 물론 후반 작업까지 온 힘을 다하셨는데 이번에는 촬영 내내 신이 나 있었다. 독하다 싶을 만큼 열심히 하셨고 신이 나서 하시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나 역시 즐거웠고.

이 다음에 대한 계획은 뭔가? 아직 아무 생각이 없다. 원래 작품을 끝내고 나면 별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나마 지금은 좀 나아져 조금씩 다음을 생각하긴 한다. 전에는 촬영 중에는 제안이 들어오는 시나리오도 보지 않았다. 그런데 <아수라>를 끝낸 지금은 다시 다음을 생각할 여력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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