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진의 평범한 세계

이지연 입력 2016. 5. 3.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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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같이 밥 먹고, 일하고, 사랑하면서 어울려 사는 보통의 세상을 연기한다.
슬리브리스 톱 에이치앤엠(H&M).

건강하고 상식적인 세계가 그립다. 평화롭고 일상적인 삶을 지키는 게 기적처럼 느껴지는 세상을 버티고 살아내야 하는 고단함이 그렇게 만들었다. 영화보다 영화 같은 현실 탓인지 드라마가 밍밍하고 지루해진 지도 꽤 됐다. 웬만하면 안 본다. 재미없어서 못 보겠다. 그러다 문득 <식샤를 합시다 2>(이하 <식샤>)를 챙겨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먹방의 드라마 버전인 줄 알았는데, 보다 보니 판타지다. 이런저런 이유로 혼자 살아가는 드라마 속 사람들은 평범한 밥 한 끼로 위로받고, 화해하고, 가까워진다. 부자가 아닌데도 잘 산다. 평균치의 삶에서 누락되지 않기 위해 삭막함과 외로움을 견디며 사는 대신 어울려 산다. 아픈 현실이 만든 판타지다.

그러다 서현진을 발견했다. 그전까지 서현진은 사극에서 몇 번 본 게 다였고,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줄은 몰랐다. 촌스럽고, 주책없고, 가난한 대식가인 ‘백수지’는 자칫 비현실적인 코믹 캐릭터가 될 수 있었다. 얼굴 예쁘고 대사를 책처럼 읽는 배우가 연기했다면 그랬을 거다. 서현진은 세련된 맛이라고는 없지만 미워할 수 없는 백수지를 어딘가 진짜 살고 있는 것 같은 여자로 만들었다. 서현진은 백수지랑 곱창 좋아하는 건 닮았지만, 여행에서 만난 아이슬란드의 대지를 누가 할퀸 것 같은 땅이라고 묘사하는 여행자고,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한 문장도 놓치고 싶지 않아 아껴 읽는 독서가라는 건 다르다. 그리고 그녀는 현장의 사람들과 맺는 살가운 관계가 어떻게 자신을 풍성하게 해주는지 아는 배우다. 가까이에 있는데 알아보지 못했던 그녀와 만나서 기쁘다. 그리고 나는 하정우의 먹방보다 서현진의 먹방이 더 좋다. 혼자 먹는 밥보다는 같이 먹는 밥이 더 맛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일이다.


박시한 아이보리 티셔츠 그레이 양(Grey Yang), 레이스 쇼츠 조셉(Joseph).

화보 촬영이 어색한가보다. 더 씩씩하고 밝을 줄 알았다. 재미있게 찍는다고 찍었는데 내가 어색해해서 힘들었겠다.(웃음) 낯을 좀 가린다. 그래도 한 번 보는 거랑, 두 번 보는 게 다르다. 다음번엔 더 나을 거다.

드라마가 성공했다. 시즌 1이 먹방 드라마였다면, 시즌 2는 관계에 관한 얘기다. 촬영 현장 분위기가 그대로 간 것 같다. 이런 현장이 없을 거라고 느꼈다. 종방연 때 은지(조은지) 언니가 서른 편이 넘게 작품을 했는데 이런 현장이 없었다고 하더라. 아주 특별했다. 마지막 3주까지는 일주일에 네 차례 촬영했고, 한 번도 새벽 2시를 넘긴 적도 없고, 그러니까 다 컨디션이 좋고, 웃는 얼굴로 만나고, 콘티도 완벽했다. 사실 드라마는 그런 경우가 흔치 않은데 이번엔 기분 좋게 가서 연기만 잘하면 됐다. 체력적으로 부침이 없었고. 감독님들도 기분 좋게 일하는 걸 중시했다. 끝나고 왜 그렇게 좋았을까 생각해보니 함께 한 사람들이 전부 이상주의자였던 것 같다. 다 일이 좋아서 하는 사람들이고, 그게 느껴져서 즐겁게 했다.

캐스팅을 보고 좀 의아했다. 왜 서현진이지? 사실 원래 성격이 훨씬 활발하고 우악스러워서 나는 위화감이 없는데, 보는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실 줄 알았다. 워낙 입 다물고 있으면 얌전해 보인다고도 하고, 그동안 맡은 역할들도 그렇고. 작가님의 의견이었다고 들었다. <제왕의 딸, 수백향>(이하 <수백향>)을 재미있게 보셨다더라.

백수지는 전형성이 강한 캐릭터다. 동그란 뿔테 안경 쓰고 히키코모리 기질도 있어 보이는 가난한 작가. 작위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백수지랑 금방 친해졌다. 캐릭터에 인간미를 입히는 건 배우다. 서현진의 백수지는 어떤 사람인가? 일단 사람들이 ‘아, 진짜 쟤 때문에 못 살아’ 하길 바랐다. 그 애 때문에 창피하지만 밉지는 않은 애. 푼수여서. 그런데 같이 있으면 볼륨 조절 안 되는 사람. 본인은 모른다. 내가 좀 그렇다. 그런데 백수지가 그런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 간의 거리를 잘 못 재는 사람. 어려운 사람은 너무 어려워하고, 가까운 사람한테는 정도껏 해야 하는데 과하고. 그래서 재미있었다.

서현진의 먹는 연기에 홀딱 반했다. 먹으면서 감탄사처럼 치는 대사가 얼마나 차진지 깜짝 놀랐다. 대사는 전부 대본에 있는 거였나? 정보 전달 대사 말고 추임새는 백 퍼센트 애드리브다. 다른 애드리브는 더러 준비하기도 했는데, 먹는 장면 애드리브는 미리 준비할 수가 없더라. 다행인 건, 나도 대식가고, 먹는 걸 워낙 좋아한다. 많이 먹어본 사람이 안다. 맛있는 거 먹을 때 어떤 말이 나오는지. 드라마 시작하기 전에 사람들 먹는 걸 많이 관찰했다. 생각보다 더 넋 놓고 먹는다. 눈에 초점이 없다. 맛있는 거 먹을 때는 다들 그렇게 먹더라.


블랙 브래지어 캘빈 클라인 언더웨어(Calvin Klein Underwear), 화이트 롱 플레어스커트 래비티(Rabbitti), 화이트 슬리브리스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오늘은 아는 스태프도 많은 화보 촬영인데도 많이 어색해했다. 드라마 스태프는 숫자도 훨씬 많을 텐데 애드리브, 그것도 맛있어서 나오는 애드리브를 친다는 게 신기하다. 화보는 내 영역이 아니니까.(웃음) 그런데 촬영 현장에 있을 때는 진짜 좋다. 연기하는 것도 좋지만, 나는 촬영장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다. 촬영장에서 노닥거릴 때가 제일 좋다.

뭐가 그렇게 좋은데? 수백향 때 김민교씨랑 밤새면서 얘기한 적이 있다. 실제로 있지도 않은 얘기 찍겠다고 다 큰 어른들이 모여서 고생한다고. 그게 내가 좋아하는 포인트인 것 같다. 있지도 않은 허구의 얘기를 만들어보겠다고 다 큰 어른들이 모여서 아웅다웅하는 게 참 좋다. 다 바보들 같아서.(웃음)

미안하다. 서현진이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배우인 줄 몰랐다. 많이들 그랬을 거다. 억울했겠다. 전혀. 나는 촬영장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 사실 이번 드라마 이전에는 모니터도 거의 안 했다. 못한다. 보면 단점만 보여서 땅 파고 들어가는 스타일이라 다음 현장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자신감이 없어져서. 늘 촬영장이 좋았다. 매니저 언니는 나더러 촬영장 막내 스태프였어도 좋아했을 거라고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연기를 한 건 아니니까.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뮤지컬을 하게 됐다. 대본이라는 걸 읽어본 적이 없어 대본 봐주시는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 선생님이 나랑 참 잘 맞았다. 독설가에 절대 잘한다는 말 안 하고. 처음 독백을 준비해 가서 읽는데 그 독백을 너처럼 서럽게 읽는 애는 처음 본다고 하시더라. 나는 그 얘기가 칭찬처럼 들렸다. 그래서 선생님한테 칭찬받으려고 4년을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찾아갔다. 대학 다녔다고 생각한다 그때. 연기가 좋아서도 아니고 칭찬받으려고. 그냥 안 해본 거 한번 해보려고 했던 건데. 무용도 하고 노래도 했는데, 연기가 가장 단시간에 칭찬받은 장르였던 거다. 그래서 계속 했다.


연기의 매력은 뭔가? 가족들은 나한테 감정적인 결벽증이 있다고 한다. 옳고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은 욕구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거다. 그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그걸 흐트러뜨릴 수 있는 공인된 자리니까 그게 좋다. 막 할 수 있어서. 평소에는 막 할 수 없으니까.

그래도 연기할 기회를 얻기까지 오래 걸렸다. 그룹 밀크 그만두고 연기자로 제대로 설 때까지 10년이 걸렸다. 다른 거 하라는 권유도 많이 받았다. 부모님도 7~8년째 되니까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그런데 정작 난 네 살 때부터 무용을 해서 한 번도 인문계 쪽에 있었던 적이 없고, 다른 거 할 자신이 없는 거다. 그래서 막연하게 시간을 보냈다.

막연하게 시간을 보내기에 20대는 불안한 게 많을 때다. 시작해야 하는 나이니까. 힘들었다. 지금은 필요한 시간이었고, 그 시절에 잃은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때 얻은 게 너무 많아서. 그런데 분명히 힘들었다. 정말 다행이다. 연기는 하고 싶다고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니까.

다른 캐릭터를 만났을 때는 어떤 연기를 보여주게 될지 궁금해졌다. 그만큼 잘했다. 다음에 못할까봐 무섭다. 늘 한 발 빼고 있었던 것 같다. 언제든 이게 아닌 다른 걸 할 수 있어. 시골 가서 농사짓고 살 수도 있어.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자연 속에서 사는 걸 아주 좋아한다. 작년 말에 굉장히 아팠다. 그 와중에 미팅을 하고, 얼떨결에 등 떠밀려 시작하게 된 드라마다. 하면서 이렇게 좋기만 했던 적이 없다. 그래서 처음으로 두 발 담근 작품이다. 아프면서 이 일을 더는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연기 패턴은 아마 이전과 같을 거다. 다른 게 있다면 그건 두 발을 모두 담근 내 태도에서 온 것이다. 그동안 직업란에 배우라고 써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럼 뭐? 프리랜서. 몇 년 전까지는 학생 또는 무직. 배우가 될 수 있는지 좀 더 궁금해해봐도 되겠구나 생각했다.

요즘 생각이 많겠다. 그냥 잘한다고 하니까 무섭다. 다음에는 기대치를 못 채우면 어쩌지. 하던 거 했는데 잘한다고 했고, 하던 거 했는데 못한다고 하면 어쩌나. 다음에도 좋은 사람들 만났으면 좋겠다. 그건 천운인 것 같다. 자기 작품이 있고, 그렇지 않은 작품이 있고.


스킨 컬러 톱 월포드(Wolford), 화이트 팬츠 서리얼 벗 나이스(Surreal but Nice), 스니커즈 아디다스 오리지널스(adidas originals).

짧은 걸 그룹 활동에 긴 공백기를 보냈으니 사람한테 실망할 일이 많았을 것 같은데. 실망하고 나서 알게 된 게 사람을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거다. 그 전에는 실망할 때 제대로 못 봤다. 스태프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직함만 있는 거다. 서로. 연기자와 스태프, 가수와 스태프, 현장에서 인간적인 관계를 맺으면 이렇게 풍성해질 수 있구나, 그걸 <수백향> 하면서 배웠다. 잠을 못 자서 너무 힘들 때 스태프들이 장난 한 번 걸어주면 그게 그렇게 고마웠다. 그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힘을 받았다. 현장에 어떤 모습으로 있으면 내가 행복한지 그때 알았다. 그래서 <삼총사>도 좋았고, <식샤>는 더더욱 좋았고.

욕심나는 캐릭터가 있나? 캐릭터는 없고, 장르로는 멜로에 정말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이제 멜로를 해보고 싶다.

<식샤>에도 멜로 있다. 수박 겉 핥다 끝났지 않았나.

너무 안 가긴 했다.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하고. 그니깐.(웃음)

스페인으로 여행을 간다고 들었다. <식샤>의 리얼리티 버전 같은 거다. 친구랑 여행 다니고, 맛있는 거 먹고, 다니면서 낯선 사람이 끼기도 하고, 그러면서 친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프로그램.

스페인은 처음인가? 작년에 다녀왔다. 하지만 여행 마지막 코스라 그로기 상태였다. 많이 못 봤다.

여행을 좋아하나? 굉장히 좋아한다. 버킷 리스트 1, 2, 3위가 어디 가고 싶다는 거다. 일단은 아이슬란드 내륙 지방에 가보고 싶다.

아이슬란드? 왜? 거긴 가본 적 없는 땅이다. 아이슬란드 바깥쪽 일주는 했다.

오, 여행을 참 많이 다니나보다. 많이 다니진 않고, 오지를 좋아한다. 태초의 땅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

일찍 결혼하긴 틀렸다. 요번 생은 망했다.(웃음) 아이슬란드 외곽도 멋졌다. 하루 9시간을 여행해도 피곤하지 않을 정도로 화각도 넓고 땅이 누가 손으로 할퀴어놓은 것처럼 생겼다. 본 적 없는 모습이다. 산이 평범한 산 모양이 아니다. 내륙은 더 놀랍다고 하는데 차가 사륜구동이 아니어서 못 갔다. 아프리카도 가보고 싶고, 그랜드캐니언 협곡 트레킹도 해보고 싶다. 사막에서 별도 보고 싶고,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에도 가야겠고, 가고 싶은 데가 너무 많다.

보편적인 20~30대 여자의 여행 취향은 아니네? 여행은 누구랑 다니나? 작년엔 매니저 언니랑.

이런, 서현진 매니저는 극한 직업이다. 하하하,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 시간을 그렇게 길게 낼 수 있는 친구가 별로 없고, 여행 코드도 맞아야 하니까. 그래서 외국어를 배우고 있다. 현지에서 친구를 만날 수 있으니까. 나는 혼자보다 같이 하는 여행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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