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의 시작, 고려궁지와 강화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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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가 지금의 강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시대 때 왕이 몽골군을 피해 이곳으로 천도한 이후부터입니다.
비록 화친한 뒤 몽골의 요구대로 강화의 궁궐과 상곽을 파괴했지만, 이때부터 강화도는 전란이 일어나면 왕이 피신할 수 있는 전략적 요새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죠.
실제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한 뒤 항전을 하려고 했었는데요, 청군이 워낙 빨리 진격을 한 탓에 강화도로 못 오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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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이희동 기자]
ⓒ 이희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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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가 지금의 강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시대 때 왕이 몽골군을 피해 이곳으로 천도한 이후부터입니다. 비록 화친한 뒤 몽골의 요구대로 강화의 궁궐과 상곽을 파괴했지만, 이때부터 강화도는 전란이 일어나면 왕이 피신할 수 있는 전략적 요새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죠. 이 고려궁지는 바로 그런 강화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곳입니다.
조선시대 다시 세워진 강화산성도 바로 이와 같은 강화의 위상과 관계 있습니다. 실제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한 뒤 항전을 하려고 했었는데요, 청군이 워낙 빨리 진격을 한 탓에 강화도로 못 오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되죠.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지어 실록을 보관한 것 역시 당시 사람들에게 강화가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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