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최초 승리 '옥포 대첩' 이렇게 전개됐다

정만진 2017. 3. 9.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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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전라 좌수영에서 출발, 바다에서 사흘 잔 후 나흘째 접전

[오마이뉴스정만진 기자]

 조선 수군의 1차 진군로 (1592년 5월 7일 조선 수군은 옥포에서 일본군과 첫 전투를 벌였고, 육군을 포함하여 조선군 최초의 승리를 이룩한다.)
ⓒ 정만진
1592년 5월 4일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주력 전함인 판옥선 24척, 보조 군선인 작은 협선 15척, 어선인 포작선 46척을 거느리고 경상도 바다를 향해 출발한다. 이순신은 5월 8일에야 선조의 몽진 소식을 듣지만, 이때는 이미 일본 침략군에게 수도인 한양이 넘어간 뒤였다. 4월 13일 부산 앞바다를 뒤덮었던 일본군은 불과 20일만에 조선의 국토를 절반이나 휩쓸었던 것이다.

전쟁 초기, 조선은 일본에 일방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100년에 걸친 국내 통일 전쟁을 끝낸 뒤 이웃 나라 공격을 차근차근 준비해온 침략자였고, 조선은 1392년 개국 이래 200년 동안 대규모 전쟁 없이 평화를 누려온 무방비 상태의 피침략자였다. 국왕 선조는 임진왜란 발발 17일만에 도성을 버리고 피란길에 오름으로써 자신과 조정이 전쟁에 대해 거의 대비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증언하였다.

계속 들려오는 절망적인 소식에도 이순신은 자신감 유지

절망과 울분을 불러일으키는 소식들만 계속 들려왔다. 그러나 이순신은 일본군을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순신의 자신감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 중 가장 시간적으로 앞선 것은 1592년 4월 30일자 장계이다.

이순신은 '적이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은 그들을 해전에서 막지 못하고 뭍에 오르도록 두었기 때문'이라면서 '부산과 동래의 수군 장수들이 배를 잘 정비한 뒤 바다에 가득 진을 벌여 위세를 보이면서 상황과 병법에 따라 알맞게 나아가고 물러나 적의 상륙을 막았으면 나라를 욕되게 하는 환란이 오늘 같은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마디로, 바다에서 적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난중일기> 1592년 5월 4일자에 보면, 전라 좌수영 수군 본군은 여수를 떠난 이래 평산포(경남 남해군 남면 평산리), 곡포(이동면 화계리), 상주포(상주면 상주리)를 수색하고 미조항(미조면 소재지)으로 갔다. 우척후(오른쪽 정찰 대장) 김인영, 우부장 김득광, 중부장 어영담, 후부장 정운 등은 여수에서 서쪽으로 가서 개도(전남 여수시 화정면)를 수색한 후 역시 미조항에서 합세했다. 전군은 소비포(경남 고성군 하일면 춘암리)에서 전투를 앞둔 첫 밤을 지냈다.

 옥포 대첩비 (옥포 대첩 기념 공원에 있다.)
ⓒ 정만진
다음 날인 5월 5일에는 당포(경남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바다에 배를 띄우고 숙박했다. 사흘째인 5월 6일 아침 원균 부대가 당포에 도착했다. 이순신과 원균 사이에는 이곳에서 만나기로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다.몇 척 안 되는 경상도 수군의 초라한 규모

원균 휘하의 경상도 수군은 판옥선 4척과 협선 2척이 전부였다. 같은 수사인 이순신의 전라 좌수영 수군이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 비하면 원균이 이끌고 온 병력은 수사의 군대 규모가 아니라 첨사나 만호의 군대에 지나지 않는 수준이었다.

이와 관련, 이순신의 4월 30일자 장계 <부원 경상도 장(赴援慶尙道狀>에 눈여겨 볼 내용이 있다. 아래는 이순신의 장계 내용이다.

'4월 29일 정오 무렵에 경상 수사(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왜적의 배 500여 척이 부산 · 김해 · 양산천(낙동강 지류) · 명지도(부산 강서구 명지동) 등 여러 곳에 정박한 후 뭍으로 올라와 제멋대로 날뛰고 있소. 해안의 우리 병영(육군 지역 본부)과 수영(수군 지역 본부)들은 거의 적의 손에 떨어졌고, 성들도 함락되었으며, 봉화까지 끊겼으니 분할 따름이오.

본 도(경상 우도)의 수군을 출동시켜 적선 10여 척을 불태웠으나 적병은 나날이 늘어나고 우리는 수가 적어 대적을 할 수가 없소. 본영(경상 우수영) 역시 이미 함락되고 말았소. 그러나 양 도(경상도 · 전라도)의 수군이 힘을 합쳐 적을 치면 뭍으로 올라간 적들도 뒤를 돌아보아야 하는 걱정에 사로잡힐 것이오. 귀 도(전라도)의 전선들을 남김없이 거느리고 당포 앞바다로 달려오면 좋겠소."라고 하였습니다. (중략) 신은 수군의 여러 장수들을 데리고 오늘 4월 30일 인시(새벽 4시)에 출발할 계획입니다.'

이순신의 장계에 나오는 '적선 10여 척을 불태웠다'는 원균의 말이 주목을 끈다. 원균의 공문은 4월 29일 이순신에게 도착했으므로 경상 우수영 수군이 일본 전함을 쳐부순 때는 그보다 이전이다. 조선군이 임진왜란 발발 이후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것으로 공인되는 5월 7일 옥포 해전보다 대략 10일 전에 원균이 전승을 기록했다?

옥포 해전보다 이전에 원균이 왜선 10여 척을 부수었다?

이 대목은 김인호의<원균 평전>이 지적한 긍금증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원균이 4월 29일 이전에 불태운 적선 10척의 실상에 관한 의문이다. 김인호는 '일본군이 침략한 4월에 이미 원균 경상 우수사가 10척 정도의 일본 군함을 분멸(불태워 없앰)한 기록은, 초기 전투 상황이라 정확한 사정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10척 정도의 적 수송선이나 세키부네(일본의 중간 전함)를 물리친 사건으로 정리할 수 있다.'라고 기술하였다.

김인호의 견해 중 '10척 정도의 세키부네를 물리친 사건' 부분은 다시 짚어보아야 할 듯하다. 70-80명 정도가 타는 관선(세키부네)은 125명 안팎이 승선하는 조선 수군의 주력 판옥선에 비해 크기는 작아도 속도가 빠른, 일본 수군의 주력 전함이다. 원균이 그런 적선을 10척이나, 그것도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전쟁 초기에 부수었다면 임진왜란 발발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후세의 기록에서도 크게 칭찬을 받았을 터이다. 즉, '10척 정도의 세키부네를 물리친 사건'으로 보기는 어렵다.

원균의 말은 허위일까?

그렇다고 원균이 이순신에게 허위 사실을 말했다고 단정할 일은 아니다. 옥포 해전 기록이 실려 있지 않은 <난중일기>를 통해서는 알 수 없지만 이순신은 옥포 승전 후 조정에 보낸 <옥포 파왜병 장>에 '5월 6일 아침 진시(오전 8시경)에 원균이 경상우도 경내인 한산도에서 단 한 척의 전선을 타고 왔습니다. 소신은 원균에게 적선의 수와 정박해 있는 곳, 그리고 접전한 과정을 자세히 물었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이순신이 원균의 말을 거짓으로 여겼거나 의심한 듯이 여겨지는 표현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원균이 불태웠다는 적선은 30명 정도가 타는 소조(고바야)이거나 김인호의 분석처럼 '수송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옥포 대첩 기념 공원의 '이순신 사당'
ⓒ 정만진
전라 좌수영 전함이 경상도 바다로 나아가고 있던 그 무렵, 이순신을 비롯한 수군 장수들은 한양이 적에게 넘어간 줄 알지 못했다. 국왕 선조가 이미 개성을 지나 평양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사실도 물론 몰랐다. 그들은 왜적이 지금 한양을 향해 진격 중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가등청정이 한양에 들어간 날이자 전라 좌수군이 출발하기 바로 전날인 5월 3일 정운이 이순신에게 "왜적이 점점 서울 가까이 다가가고 있으니 분하기 짝이 없습니다."라며 빨리 전함을 몰고 경상도 바다로 나아가자고 재촉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들은 개전 초 부산 일원의 패배, 중앙 관군이 처음으로 참전했던 4월 25일 상주 북천 전투의 참패, 조선군 최고위 장군 신립이 4월 28일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가 본인도 자결하고 군사들도 모두 죽거나 흩어졌다는 사실 등만 듣고 있었다.

선조가 평양까지 도망간 그 날, 이순신은 첫 전투를 벌인다

선조가 평양으로 들어간 5월 7일 그 날,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연합 수군은 정오 무렵 옥포에 닿았다. 옥포에는 일본 전함 50여 척이 정박해 있었다. 이제 이순신과 그 수하 장졸들은 일본군과 최초의 전투를 벌이게 된다.

<옥포 파왜병 장>에 밝혀져 있듯이 이순신은 원균으로부터 접전 경험담을 들었다. 또 2월 22일자 <난중일기>에 '대포 쏘는 것을 보느라 촛불을 한참 동안 밝혀 두었다.'라고 기록했을 정도로 진작부터 화포 사격 훈련을 해온 이순신이었다. 하지만 실제 전투는 처음이다. 이순신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무척이나 긴장이 되었을 터이다. 특히 병사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형석은 <임진 전란사>에 '군사들이 겁을 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옥포 대첩 기념 공원의 누각,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 정만진
조선 연합 수군의 1차 출전 결과는 어떻게 될까? 5월 7일의 옥포 · 합포 해전과 5월 8일의 적진포 해전이 끝난 후 이순신이 보낸 장계를 통해 일본군과 싸운 첫 전투의 전말을 알아본다.

선봉을 맡아 달려 나갔던 사도 첨사 김완, 여도 권관 김인영 등이 신기전을 쏘아 적선 발견 신호를 보내왔다. 이순신은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태산같이 무겁게 행동하라!'는 지시를 내린 뒤 옥포 포구로 들어갔다. 옥포 선창에는 등당고호(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50여 척의 왜선들이 여기저기 정박해 있었다. 일본군들은 배에서 내려 노략질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마을 곳곳에 불을 지른 탓에 지붕을 흘러넘친 화염이 바다까지 뒤덮고 있었다. 

요란한 치장으로 상대를 위압하려는 일본 전함들

일본 전함들은 한마디로 요란했다. 큰 배는 갖가지 무늬로 수를 놓은 비단 휘장을 사방에 둘렀고, 휘장 주변에 대나무 막대기를 꽂고 있었다. 또 펄럭이는 천과 움직이는 등처럼 생긴 붉고 흰 깃발들을 어지럽게 많이 매달아 놓아 눈이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군도 왜적과 처음 치르는 전투였다.) 군사들이 겁을 내어 망설이자 후부장 정운이 북을 치면서 가장 앞서 적을 향해 배를 몰아 세웠다. 그러자 다른 배들도 서로 뒤지 않으려고 앞을 다투게 되었다.(이형석<임진 전란사>)'

왜적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아군 전함들을 보고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적들은 아우성을 치면서 제각각 노를 저어 산기슭 아래 해안선을 타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감히 바다 가운데로 달려 나와 아군에 대적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조선 수군의 기습이 너무나 벽력같았기 때문이다. 적선 중 여섯 척이 그나마 조총을 쏘면서 저항했지만 사정거리가 100m 정도에 지나지 않아 200m를 훌쩍 넘는 조선 대포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일본군 조총과 조선 수군의 화포

아군은 적을 양쪽으로 에워싸면서 천둥처럼 대포를 발사하고 바람처럼 활을 쏘았다. 적들도 조총과 화살을 쏘아댔다. 적의 저항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적들은 배에 싣고 있던 물건들을 바다에 내던졌다. 아군에게 빼앗기느니 물에 집어넣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화살에 맞은 놈, 바다로 뛰어들어 헤엄쳐 달아나는 놈 등 그 수를 미처 헤아릴 수가 없었다. 적들은 한꺼번에 무너져 각각 바위 언덕으로 기어서 올라갔는데, 서로 뒤질까 봐 두려워하는 듯이 보일 정도였다. 아군의 장수들은 군사들과 함께 왜적의 전선들을 무참하게 격침시켰다.

좌부장 낙안 군수 신호 : 큰 배 한 척 격파
우부장 보성 군수 김득광 : 큰 배 한 척 격파
전부장 흥양 현감 배흥립 : 큰 배 두 척 격파
후부장 녹도 만호 정운 : 중간 배 두 척 격파
중부장 광양 현감 어영담 : 중간 배와 작은 배 각 두 척 격파
중위장 방답 첨사 이순신 : 큰 배 한 척 격파
좌척후장 여도 권관 김인영 : 중간 배 한 척 격파
우척후장 사도 첨사 김완 : 큰 배 한 척 격파
좌부기전통장 순천 대장 유섭 : 큰 배 한 척 격파

우부기전통장 보인은 군인이 아니라 군대를 후원하는 민간인이다. 보인 이춘이 옥포 해전에서, 보인 김봉수와 유배 생활 중이던 주몽룡이 적진포 해전에서, 역시 귀양살이 중이던 이응화가 합포 해전에서 공을 세운 것은 전투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이순신이 해전에 참전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이춘 : 중간 배 한 척 격파
유군장 발포 가장 나대용 : 큰 배 두 척 격파
한후장 군관 급제 최대성 : 큰 배 한 척 격파
참퇴장 군관 급제 배응록 : 큰 배 한 척 격파
돌격장 군관 이언량 : 큰 배 한 척 격파
군관 변존서, 전 봉사 김효성 : 큰 배 한 척 격파
경상도 수군 : 큰 배 다섯 척 격파

36척(판옥선 24, 협선 15)의 전라 수군이 적선 21척, 6척(판옥선 4, 협선 2)의 경상 수군이 적선 5척을 격파했다. 경상 수군도 선전했음을 알 수 있다. 잡혀 있던 포로를 되찾고, 적들의 무기를 탈취한 것 등은 말할 것도 없지만, 적선을 부수어 물속에 집어넣은 것만도 스물여섯 척이나 되었다. 온 바다가 불꽃과 연기로 뒤덮였다.

산으로 달아난 적병 추격을 포기하는 이순신

적들은 모두 산으로 달아났다. 이순신은 각 배에서 특히 활을 잘 쏘고 용맹한 군사들을 뽑아 산으로 보낼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제도가 적의 소굴이라는 점, 섬 전체가 산이 험악하고 나무가 울창하여 우리 추격 군사들이 발을 붙이기 어렵다는 점, 명사수들을 섬에 올려 보낸 틈을 타 자칫 적들이 배를 기습할 수도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그만두었다. 게다가 날도 점점 저물어가고 있었다.

 옥포 대첩 기념 공원 '이순신 사당'의 전경.
ⓒ 정만진
기념관, 사당, 옥포루, 기념탑, 참배단 순서로 답사

옥포대첩 기념공원이 답사자들에게 나눠주는 소형 홍보물 '옥포 대첩 기념 공원'을 편 채 답사 순서를 짠다. 가장 먼저 기념관부터 둘러보아야 하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그 후 기념관 왼쪽의 홍살문 아래를 지나 사당을 참배한다.

사당을 둘러싼 담장의 오른쪽에 작은 문이 보인다. 그 협문을 지나면 옥포루, 기념탑, 참배단으로 가는 길이 이어진다. 걷는다. 길의 처음은 솔숲 오솔길이다. 100m가량 느긋이 솔향을 맡으니 이내 포장된 도로가 기다리고 있다.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기념관 앞 주차장으로 가게 된다. 왼쪽으로 접어든다. 다시 작은 주차장이 나타난다. 이곳까지 자동차를 몰고 올라와서는 안 될 것이다.

언덕을 오르니 옥포루가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다. 누각들에는 흔히 올라가지 말라는 안내판이 놓여 있는데 이곳에는 없다. 누각 2층 마루에 올라 옥포 바다를 바라보는 즐거움을 막는다면 누군들 좋아할까. 특히 이곳은 이순신이 이끄는 연합 수군이 임진왜란 때 처음으로 일본 침략군을 무찌른 민족사의 위대한 옥포 바다가 아닌가.

 옥포 바다 (대첩 공원 누각에서 바라본 풍경)
ⓒ 정만진
누각에 올라 멀리 바다를 바라본다. 아, 장승포 쪽 돌출한 곶을 돌아 기세를 떨치며 옥포 앞바다로 들어서는 1592년 5월 7일의 조선 수군이 눈에 들어온다. 판옥선들이 장쾌하게 바다를 가르고 있다. 깃발들이 펄럭인다. 우리 수군들의 숨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드디어 '옥포 대첩 기념탑'으로 간다. 사진에서 많이 본 웅대한 탑이다. 높이가 무려 30m! 까마득하여 사진을 찍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불교에서 탑은 법당 건물을 짓고 그 안에 불상을 모시기 전까지 소박한 기도처였다. 지금도 본당 뜰에 탑이 세워져 있고, 불자들이 불상에 이르기 전에 탑 앞에서 잠시 합장을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나는 옥포 대첩 기념탑 앞에서 잠깐 묵념을 한다. 기념탑 뒤에 참배단이 별도로 만들어져 있지만 탑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옥포 대첩 기념 공원의 제단
ⓒ 정만진
참배단 벽에는 '勿令妄動(물령망동) 靜重如山(정중여산)' 여덟 한자가 새겨져 있다. 물론 한글로 뜻도 새겨놓았다. 당연한 일이다. 1592년 5월 7일 옥포 앞바다로 진군하면서 이순신 장군이 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가볍게 움직이지 마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겁게 행동하라!"  

가볍게 움직이지 마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겁게 행동하라……. 참배를 하면서 이순신 장군의 목소리를 듣는다.

가볍게 움직이지 마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겁게 행동하라……. 나는 과연 지금껏 살면서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겁게 행동했던가. 가볍게 움직인 것이 대부분은 아니었던가…….

고개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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