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초기 큰 역할한 광해군의 스승

정만진 2016. 11. 22.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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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을 살린 정탁의 경북 예천 정충사와 유물각

[오마이뉴스정만진 기자]

 정탁이 전쟁 중 작성한 부적을 모은 <약포선조유묵>으로 보물 494호의 일부이다. 사진은 도정서원 간행 <약포 정탁>에 실려 있는 것이다.
ⓒ 도정서원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한 지 불과 16일째 되는 1592년 4월 29일, 선조는 갑자기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본래 세자 책봉은, 임금이 돌연 사고 등으로 죽었을 때 즉시 왕위에 앉힐 후계자를 정하는 국가의 중대 정치 행위이지만, 번갯불에 콩을 볶아 먹듯이 그 일을 치러냈다. 그만큼 다급했던 것이다. 오늘 충주성이 함락되었는데, 충주에서 서울까지는 400리밖에 안 되니 사흘 후면 왜군들이 한양으로 밀려들 판이다.

차남인 광해군이 왕위 계승자로 지명된 것은 형 임해군이 난폭한 성정에다 어리석다는 평판을 얻어온 덕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선조가 4월 30일 새벽 2시경 도승지(대통령 비서실장) 이항복의 등불 인도에 따라 서울을 떠나자마자 백성들은 임해군의 집을 불태워버렸다.

경복궁은 왜군이 아니라 백성들이 불태웠다

 정탁이 사용했던 벼루로, 보물 494호 중 한 가지이다. 사진은 도정서원이 방문객에게 주는 <약포 정탁>에 실려 있는 것을 재촬영한 것이다.
ⓒ 도정서원
그뿐이 아니었다. 백성들은 몰려다니면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에 차례차례 불을 질렀다. 병조판서를 역임한 홍여순의 집에도 거침없이 방화를 했다. 평소 백성들의 원성을 한 몸에 받았던 형조(刑曹)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노비 문서를 관리하는 장예원(掌隸院)도 시커멓게 재로 변해서 내려앉았다. 궁궐을 호위하는 군사들은 일찌감치 모두 달아나버렸고, 궁궐 문에도 자물쇠가 달아나고 없었다.
궁궐 타오르는 불빛이 돈화문을 나선 선조 일행의 등을 비추었다. 불빛은 빗물 위를 둥둥 떠 다녔다. 궁궐이 활활 타면서 토해낸 불빛은 깊은 밤 칠흑 같은 빗속의 도성 내부를 그런 대로 걸을 만하게 만들어 주었다. 선조와 대신, 그리고 내시까지 다 합해도 겨우 100여 명에 지나지 않는 도피 일행은 불빛을 등진 채 철벅철벅 물길을 걸었다.

비는 선조가 벽제역을 지나 혜음령에 닿자 더욱 세차게 쏟아졌다. 일행 중 시종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신들까지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하나 둘 종적을 감췄다. 왕을 따라가 봐야 고생만 할 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라도 다 눈치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선조 일행이 임진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천지사방이 암흑에 캄캄하게 파묻힌 뒤였다. 이율곡의 후손들이 강변의 정자 화석정(花石亭)에 불을 질러 어둠의 기운을 죽였다. 무엇이든 남겨두면 적들이 그것을 활용해 도강 시간을 줄일 것이라고 생각한 선조는 강을 건넌 후 "배를 가라앉혀 버려라. 주위 인가도 남김없이 철거하라" 하고 명령했다.

 정탁이 남긴 보물들을 보존하고 매년 불천위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건립된 정충사. 지금 보물들은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옮겨 보관되고 있다.
ⓒ 정만진
다음날인 5월 1일, 선조 일행은 개성에 당도했다. 백성들이 왕의 가마에 돌을 던졌다. 6월 10일 선조는 평양도 버리고 압록강을 향해 떠나려 했다. 정탁 등은 평양 사수를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날의 광경을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는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선조는 세자에게 명하여 "우리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을 지킬 작정이니 염려치 말라"고 성내 부로(父老, 원로)들에게 타이르게 하였다. 이로써 백성들은 다시 모여들게 되었고 이웃고을의 조세미(租?米, 세금으로 거둔 쌀)를 운반하여 평양성 창고에는 10만 석의 식량이 확보되기도 했다.

이러는 동안 왜군은 급진격하여 대동강 연안에 다다르게 되니 다시 북행(北行)을 결의하였다. 평양성 사수의 포기는 평양 도민(都民, 백성)들의 분노를 일으켜 이민(吏民, 하급관리와 일반백성)들은 위정자의 무능과 무책임에 격분하여 난을 일으키려 하는 한편, 성 밖으로 나가려는 궁녀들과 대신들의 길을 막고 몽둥이로 구타까지 하였다.'

<신편 한국사>의 기술처럼, 백성들은 도끼와 몽둥이를 들고 선조 일행을 가로막았다. <선조실록> 1592년 6월 10일자는, 백성들이 왕후가 탄 말을 쓰러뜨렸고, 병조판서 홍여순에게 뭇매를 때렸는데, 평안감사 송언신이 주동자 셋을 대동문 앞에서 공개 처형한 후에야 선조가 성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충사 사당
ⓒ 정만진
이윽고 6월 13일, 선조는 내선(內禪,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줌)을 선포한다. 그 다음날인 6월 14일, 분조(分朝)가 결정되었다. 조정을 대조(大朝, 임금이 머무는 행재소)와 분조로 나눈 것은 선조는 요동으로 내부(內附, 망명)하고 세자인 광해군이 남아서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이었다. 좌찬성(종1품) 정탁은 세자의 스승인 세자이사(世子貳師)를 맡고 있었으므로 이때부터 광해군과 함께 전국을 순회하면서 고을 수령들을 독려하고 백성들을 위로하는 일을 맡았다.

'老臣?貳師
늙은 신하 외람되이 세자를 가르치는 이사가 되어
死生隨跋涉
있는 힘 다하여 세자를 보살피며 뒤따랐네
惡溪?我魄
거친 계곡물은 내 정신을 빼앗았고
險嶺折我足
험한 산길은 내 발목을 부러뜨렸네
水多與風壁
물이 많고 바람이 세찬 곳에서는
暝行兼露宿
밤길에 노숙을 하였네
困頓狼狽甚
고달프고 딱한 사정 지독했으니
嗟同我馬僕
아, 어렵기는 내 말과 종도 마찬가지였으리'

정탁의 <피란행록(避亂行錄)>에 실려 있는 이 시는 함경도로 출발한 분조의 고생살이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첫날 방문지인 (평안북도) 희천에서부터 광해군만 겨우 민가에서 자고, 기타 고관대작들은 모두 마당에서 잠을 자야 했을 만큼 험난한 생활을 했다.

망명하려고 분조한 선조, 망명 못 하자 광해군 곤란에 빠져

정탁의 문집 <약포집>에 따르면, 분조는 낮에도 '길이 너무나 험해 열 걸음 내디디면 아홉 번 넘어지는 산길'을 걸었다. 그래도 나라 전역을 순회하면서 벌인 분조의 활동은 우왕좌왕하던 선비와 백성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임금이 한양을 포기하고 곧 이어 평양에서도 사라지자 모두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채 넋을 잃고 있었는데, 세자가 나타나자 '도망쳐 숨었던 수령들도 점차 돌아오고, 명령 또한 시행이 되어 회복의 기미가 살아났다. 의병들이 곳곳에서 일어나 서로 앞을 다투어 왜적을 무찌르니 적의 기세도 조금 꺾였다.'

 왼쪽 고층 건물들이 보이는 곳은 중국, 오른쪽 나무숲 등이 보이는 곳은 북한으로, 압록강 하류의 풍경이다. 선조는 충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한양을 버리고 피란을 갔는데, 명나라 요동으로 들어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중국의 거부로 용만(압록강)을 건너지 못했다.
ⓒ 정만진
그러나 분조의 활동이 처음부터 의욕적으로 활발하게 펼쳐졌던 것은 아니다. 선조가 명나라로 들어가지 못하면서 일이 꼬였다. 조선 왕이 요동으로 들어오면 일본군이 그를 잡기 위해 악착같이 압록강을 건너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중국땅이 전쟁터로 변할 것을 염려한 명은 선조의 망명을 거부했다. 명은 선조에게 압록강을 건너오지 말고 끝까지 조선을 지키라면서, 어쩔 수 없는 경우에도 100명 이내만 데리고 들어오라고 통보했다.  

전쟁터가 중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명이 출병을 결정한 것도 선조의 망명을 가로막는 계기가 되었다. 선조는 요동 망명 이전에 명나라 군대 마중부터 가야 했다. 그렇게 되자 광해군은 선조의 눈치를 계속 살펴야 했다. 분조는 선조가 요동으로 들어가는 것을 전제로 성립된 '임시 정부'인데, 본 정부인 대조가 의주에 머물러 있으니 모든 것을 선조의 허락을 받아서 집행하려는 광해군의 태도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분조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던 정탁은 '행재소가 멀리 떨어져 있어 (임금의 허락을 받기 위해 관리가) 왕복하는 동안 자칫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니 모두 걱정'이라면서 '(분조를 처음 띄울 때) 형편에 맞춰 처리하라고 하신 어명에 따라 (관리를 임명하고 내쫓는 인사권과 상벌권을) 시행한 후에 결과를 아뢰겠다'는 상소를 선조에게 보내 허락을 받았다. 실제로 7월 22일에는 강신을 병조참지, 박종남을 춘천부사에 임명한 후 선조에게 보고했다.

그렇게 분조가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일대를 다니면서 선비와 백성들을 격려하고, 의병 창의를 독려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내는 등 전쟁 지원 활동을 펼치고, 지방 수령들을 임명하는 등 인사권을 행사하자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관찰사들이 장계를 광해군에게 보내오는 등 조정의 권위가 안정을 되찾아갔다.

 정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도정서원. 사진은 도정서원이 발행한 작은홍보물에 실려 있는 도정서원 강당채의 모습
ⓒ 도정서원
이에 대해 한명기는 2016년 11월 17일 발표한 논문 <임진란기 약포 정탁의 구국 활동과 그 역사적 의미>에서 '분조는 전란 직후의 위기 상황을 넘어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서 '광해군이 분조 활동을 통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자 신료들의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분조 활동을 통해 광해군의 신망이 높아졌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물론 2016년보다 424년 전인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도 분조 활동에 대한 평가는 한명기의 그것과 유사했다. 성혼은 "저하(광해군)의 첫 활동이 맑고 빛나 마치 해가 떠오르는 듯하니(邸下始初淸明如日方昇) 나라가 되살아나고 크게 발전하리라 기대됩니다(?精匡復王業之興隆智日而可待)" 하고 극찬했다. 정탁 본인도 분조는 '기울어진 사직을 부축하고 나라를 중흥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평했다. 결론은, 임진왜란 초기의 국가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는 광해군 분조의 역할이 컸고, 정탁은 그 중심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정충사 전경
ⓒ 정만진
'명은 평양성이 함락된 직후 (중략) 조선에 파병하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였다. 즉 평양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들의 문안 마당에 적이 쳐들어온 것과 다름없다는 점에서 사태의 긴박감을 감지하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신속히 군사를 파견하는 것만이 전쟁을 국내로 확대시키지 않는 최선책이라고 보았으며, 화근을 불러올 수도 있을 선조의 내부를 저지하기 위한 방안 역시 파병뿐이라고 판단하였다.

(중략) 명의 참전은 외면상 조선측의 청원에 의한 구원의 성격을 띤 것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오히려 조선의 힘을 빌려 명을 지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위의 인용문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에 기술되어 있는 표현이다. 한명기의 견해도 이와 같다. 한명기는 '명군은 조선에 참전하면서 "충순한(충성스럽고 말 잘 듣는) 번국(속국) 조선을 돕기 위해 참전한다"는 슬로건을 내걸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목표였을 뿐 명군의 조선 참전은 일본군의 요동 진입을 조선에서 저지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즉 명군의 참전은 내지(內地, 중국땅)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이자, 조선에서 일본군을 막는 것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리하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다.'면서, 그래서 벽제관 패전 이후 명군은 더 이상 일본군을 공격하려 들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이는, 명군이 벽제관 패전 이후 독단적으로 일본과 강화 교섭에 들어간 까닭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게 해준다.

 정탁이 남긴 임진왜란 일기로 보물 494호의 일부이다.
ⓒ 도정서원
명은 이제 일본군이 요동으로 진격해 들어올 가능성을 없앴으므로 참전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명군을 설득하여 전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도록 만들어야 왜적들을 이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데 유리했다.

정탁은 1차 분조 활동이 끝난 1593년 1월 이후 명군을 맞이하는 영위사(환영하고 위로하는 사신)의 임무를 맡아 3남 정윤목을 데리고 용천(압록강)으로 가서 명군 총지휘관 송응창을 영접하고, 안주에서는 제독 이여송을 영접했다. 평양성 탈환 직후 사직단에 승전을 아뢰는 제사를 지낼 때(1593년 1월 16일) 헌관(獻官) 역할을 했다. 게다가 정탁은 1582년과 1589년에도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온 바 있었다. 그런 경력과 기회를 활용하여 정탁은 명군 지휘부를 설득하는 일에 열성을 다했다.

"왜적들은 천하에 강한 도둑들입니다. 그 화가 매우 심하여 만약 동쪽 모퉁이를 잃게 되면 바로 영남을 잃게 되고, 영남을 잃으면 곧 서울을 잃게 되며, 서울을 잃으면 바로 조선을 잃게 되고, 조선을 잃고 나면 요동과 연경을 잃을 우려가 그 다음 차례가 될 것입니다. 병을 피부에서 고치지 못하고 심장과 뱃속까지 번진 뒤 그제야 고치려 해서는 어찌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위는, 정탁이 명군 지휘부를 설득할 때 했던 말의 일부이다. '병을 피부에서 고치지 못하고 심장과 뱃속까지 번진 뒤 그제야 고치려 해서는 어찌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같은 표현은 참으로 적절한 비유의 구사이다. 물론 예시한 것과 같은 출중한 표현력은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정탁은 임진왜란의 실상을 증언해주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1592년 4월 30일부터 1593년 1월 28일까지 일기로, 분조 활동의 면모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는 <피난행록>, 1592년 7월 17일부터 1593년 1월 12일까지의 기록을 담은 <용사일기(龍蛇日記)>, 명나라 장수들과의 대화를 주로 담고 있는 <용만견문록(龍灣見聞錄)>, 임진왜란 당시의 외교 문서와 상소문 등을 모아놓은 <용사잡록(龍蛇雜錄)> 등이 정탁의 임진왜란 관련 저술들이다. 그런데 이 책들은 그저 옛날 고서가 아니다. 국가가 지정한 보물 494호이다.

 정탁이 명나라 장수들과 나눈 대화를 주로 수록한 <용만견문록>으로 보물 494호의 일부이다. 사진은 도정서원 간행 <약포 정탁>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 도정서원
문화재청 누리집은 '정탁 문적(鄭琢文籍) - 약포유고(藥圃遺稿) 및 고문서(古文書)는 조선 중기의 문신 약포 정탁 선생의 얼을 추모하고 선생이 남긴 유물을 보존하고 관리하기 위해 지은 유물각(정충각)에 전해오는 유고와 문서들이다.'라고 문화재로서의 성격을 설명한 후 '정탁은 이황의 문인이었다. 1558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에까지 올랐으며, 임진왜란이 터지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다. 천문, 지리, 군사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며, 임진왜란 중에는 곽재우, 김덕령 등의 뛰어난 장수들을 추천하기도 하였다.'라며 정탁이라는 인물에 대해 소개한다. 

이어 누리집은 정탁이 '1597년 3월에 이순신이 옥중에서 죽게 되자 적극 말려 그를 구했다'면서 보물 494호는 '정간공교지 1장, 위성공신교서 1축, <용사일기> 상하 2책, <용사잡록> 1책, <용만문견록> 1책, <임진기록> 1책, <선조시집유묵> 1책, <약포선조유묵> 2책, <약포선조간첩> 2책, <선조초고유묵> 1책, 기로연시화첩 1첩, 관립, 벼루와 벼루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공문서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들이며, 당시의 사회상과 특히 임진왜란 당시를 연구하는 데 훌륭한 자료로 평가된다'라고 설명한다.

임진왜란 연구에 소중한 자료를 남긴 정탁

이 글에 미처 다루지 못한 '천문, 지리, 군사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며, 임진왜란 중에는 곽재우, 김덕령 등의 뛰어난 장수들을 추천하기도 하였다'라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정탁은 중국 병서 <기효신서절요>의 조선판 책에 서문을 썼는데, 이는 그가 단순한 문관이 아니라 천문, 지리, 군사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로 인용되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면 병법서의 서문을 장군이 아닌 그에게, 또 그 많은 문관들 중에 유독 그에게 써달라고 부탁할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탁 초상으로, 보물 487호이다. 선조가 화원을 예천까지 보내어서 그리게 했다. 사진은 도정서원의 <약포 정탁>에 인쇄되어 있는 것을 재촬영한 것이다.
ⓒ 정만진
그런가 하면, 가로 89㎝, 세로 167㎝ 크기의 <정탁 초상(鄭琢肖像)>도 국가 보물 487호이다. 문화재청은 '선조 37년(1604)에 그려진 이 초상화는 직무를 볼 때 쓰는 관모(모자)와 가슴에 2마리 학이 수놓인 흉배(胸背, 조선 시대 왕·왕세자·문무백관의 관복의 가슴과 등에 표시한 장식)가 있는 자주색 비단 관복을 입고 오른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전신상(신체 전체를 그린 그림)이다.
흰 수염은 선명하며 얼굴은 연홍색으로 가는 선을 이용하여 윤곽을 표현하였다. 관복의 구름무늬는 어두운 색으로 채색하였고 옷의 구겨짐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관념적으로 표현했는데, 이러한 표현은 이 시대 다른 초상화에서도 조금씩 보이고 있다. 바닥도 채색되어 안정감이 있는 이 초상화는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공신 초상화이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이 초상화는 선조가 화가를 예천까지 보내어 그리게 한 작품이다. 1756년(영조 32) 영조가 이 초상화를 본다. 영조는 신하들과 더불어 학문 및 정치에 관해 토론을 하는 경연(經筵) 중 정탁 이야기가 나오자 정탁의 5대손인 좌승지 정옥(鄭玉)에게 영정을 모셔 오도록 했다. 예천에서 올라온 정탁 초상을 본 영조는 직접 화상찬(畵像讚, 초상화를 보고 지은 찬양의 글)을 지었다. 영조의 글은 정탁 초상의 윗부분에 쓰여 있다.

'筵中偶聞 取覽遺像
경연 중에 우연히 듣고 영정을 모셔 와서 뵈오니
厥像偉然 穆廟名相
그 모습 과연 거룩하고도 의연하구나
百年之後 入于楓宸
백년 지난 뒤에 화상으로서 왕궁에 오셨으니
特題其銘 以聳嶺人
내가 글을 써 넣어 영남인들의 귀감이 되게 하리라'

정탁이 남긴 보물들은 고향 고평리(고평길 70-16)의 정충사(靖忠祠)에 있지 않다. 보관과 관리의 어려움을 감안, 지금은 안동시 소재 한국국학진흥원에 귀하게 모셔져 있다. 하지만 여전히 정충사는 우리가 꼭 찾아보아야 할 임진왜란 유적지이다. 정충사를 찾아 정탁의 생애를 돌이켜 보고, 임진왜란이 남긴 교훈에 대해 돌이켜 보는 일, 그것은 후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종의 '작은' 임무이기 때문이다.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는 삼강강당은 정탁의 3남 정윤목이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집으로, 삼강주막으로 유명한 삼강마을의 안쪽 강변에 있다.
ⓒ 정만진
그리고 삼강리 70번지에 있는 삼강강당도 한번 둘러볼 일이다. 19세 때 아버지를 수행하여 중국에 다녀오고, 정탁이 압록강 일원에서 중국 장수들과 회동할 때도 함께 했던 3남 정윤목이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학교 건물이다. 정윤목이 백이숙제묘(伯夷叔齊廟)에서 본 '百世淸風(백세청풍)' 네 글자를 그대로 되살려 쓴 편액이 마음을 뭉클하게 흔드는 곳이다.
약포藥圃 유물각遺物閣

보물 487호, 494호
경상북도 예천군 고평리 466

이 유물각은 약포 정탁(鄭琢, 1526∼1605)의 유물을 보존 관리하고 얼을 추모하기 위하여 새로 지은 건물이다. 이 곳에 소장된 유물로는 조선 선조 37년(1604)에 하사한 보물 제 487호로 지정된 영정과 보물 제494호로 지정된 유고 및 문서 12점이 있다.

정탁은 중종 21년(1526)에 출생하여 명종 13년(1558) 문과에 급제, 6조 중 5조의 판서와 좌의정, 우의정을 역임했으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이 되었다가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중에 동궁(광해군)을 모시고 피란하는 중책을 담당하였다. 특히 충장공 김덕령 장군 및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하여 죄가 없음을 아뢰어 구원함으로써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데 주력하였다.

*필자 주 : 현지 안내판은 정충사를 '약포 유물각'으로 안내하고 있다. 안내문에는 보물들이 이곳 유물각에 있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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