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없는 그대여, 내내 번뇌도 없으리
[오마이뉴스남병직 기자]
경주남산 백운계 새갓곡의 마애석불과 석조여래좌상을 답사한 후 새갓곡 입구의 주차장으로 하산한다. 경주남산은 등산로가 짧고 오르는 길도 가파르지 않아 한나절 답사코스로는 제격이다.
올 한해 지난 게으름을 생각하면 언제 다시 백운계일대의 답사를 기약할지 모를 일이다. 내친김에 가까운 곳에 자리한 백운암과 침식곡(심수곡)까지 둘러볼 생각이다. 새갓곡 주차장을 나서면 틈수골, 천룡사지, 백운암을 알리는 입간판이 길을 안내한다. 백운암까지는 여기서부터 약1.45㎞거리이다.
일정이 여유로운 날은 산과 계곡을 따라 한나절 걸어가도 좋을 길이다. 오늘은 초행길이라 눈이 어두운 탓에 차를 가지고 백운암까지 이동한다. 새갓곡에서 백운암으로 가는 길은 천길 벼랑 위로 심산유곡을 곁에 끼고 달리는 위태로운 산길이다. 아슬아슬한 비포장의 차창너머로 구절양장의 계곡을 오르락내리락하는 폭포수의 한판놀음이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백운암에 거의 다다랐을까? 침식곡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꼬르륵 배 시계를 점검해보니 밥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모양이다. 우선 허기진 배를 채우고 산을 오르기로 한다. 주차도하고 배도 채울 요량으로 근처 백운암주차장으로 길을 잡는다. 침식곡 초입은 비좁은 산길이라 주변에 승용차한대 주차할 공간이 막막하다.
그에 비해 백운암은 절을 찾는 신도들이 있어 제법 넉넉한 주차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차에서 내리자 주차장에는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소란스럽다. 그들도 그렇겠거니와 주말오후 이 깊은 산속까지 찾아온 젊은이들이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주차장에서 백운암으로 오르는 길은 나지막한 조릿대들이 긴 터널을 이룬다. 층층이 놓인 나무계단을 딛고 오르니 높다란 언덕 위로 아담한 절터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경주남산 백운계 백운암이다.
▲ [백운암] 백운암 경내에는 대웅전과 요사건물이 자리한다. 대웅전 오른편으로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신 작은 전각을 마련했다. |
ⓒ 남병직 |
대웅전은 근래 새롭게 단장한 모습이다. 정면3칸의 아담한 규모인데, 오늘은 행사가 있었던지 스님 한 분이 대웅전내부의 불단을 정리하고 계신다.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나와 지나는 보살님께 간곡한 눈빛을 흘려본다. "보살님요 아직 공양되니껴?" 인심 좋은 공양주보살님은 공양시간이 지났음에도 불편한 기색 없이 배고픈 중생의 손을 반갑게 이끄신다. 불 꺼진 공양간의 이곳저곳을 뒤져 풍족한 한 끼 밥상을 순식간에 마련해주시고는 넉넉한 과일까지 덤으로 챙겨주신다. 시장이 밥맛이라. 절집의 건강한 산나물 밥상으로 지친 몸과 마음에 활력이 불끈 샘솟는다.
▲ [백운암 점심공양] 절집의 소박한 밥상이다. 산나물 비빔밥과 시래기 된장국, 동치미의 시원함이 정갈하고 담백하다. |
ⓒ 남병직 |
동지 즈음 가까운 절을 다녀올까 내심 벼르고 있었는데, 오늘 뜻하지 않게도 숙제 하나를 들게 되었다. 백운암 마당에는 식수를 받는 용도로 사용되는 대형 맷돌이 남아있어 과거 폐사지의 흔적이 드문드문 엿보인다. 마당 한 편에는 고맙게도 지나는 객을 위한 무료 찻자리도 제공된다. 차는 자판기 커피와 율무차이다. 입가심으로 고소한 율무차 한 잔까지 알뜰히 챙겨들고 아스라한 먼 산자락에 잠시 상념에 젖어든다. 흰 구름 한 다발이 산머리를 감고 오르는 산사의 겨울풍경은 한가롭고 무심하다.
▲ [백운암 마당에서] 백운암 마당에 서면 눈 맛이 시원하다. 흰 구름이 넘실거리는 산사의 겨울풍경은 한가롭고 무심하다. |
ⓒ 남병직 |
칠불암 정상의 봉수대쪽에서 흘러오는 지류로, 현재 절터1곳과 고분1기가 분포하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침식곡 가는 길은 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명상의 길이다. 침식이란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침식(寢息)의 사전적 의미는 "떠들썩하던 일이 가라앉아서 그쳐짐"이다. 계곡의 깊은 가슴으로 한 발짝 다가설수록 먼지처럼 일렁이던 마음 속 번뇌가 차츰 잦아드는 것 같다.
▲ [침식곡 가는 길] 침식곡 가는 길은 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명상의 길이다. |
ⓒ 남병직 |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2호 경주침식곡석불좌상] 앙상한 나뭇가지에 포근히 둘러싸인 머리 없는 부처가 고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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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는 생사 윤회의 인과(因果)를 뜻하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삭둑 잘려나간 머리처럼 윤회의 사슬도 미련 없이 끊어버렸다. 오른쪽 어깨를 살짝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옷차림에 부드러운 가슴의 곡선이 아담하되 당당하다. 왼손은 아랫배에 단정히 두었고, 오른손은 위엄으로 땅을 누른다. 마귀를 항복시키는 거룩한 부처의 수인(手印)은 장중하다.
경주남산을 답사하다 보면 유독 머리 없는 불상이 종종 눈에 띈다. 혹자는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과 조선시대 임진왜란 등 외침과정에서 진행된 불교유적의 파괴를 한 원인으로 들고 있다. 또 다른 이는 조선시대 유생들에 의한 숭유억불정책의 결과라는 견해도 있다.
필자는 이와 더불어 불상의 제작기법과 관련된 부분을 추가로 가늠해본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돌로 불상의 전신을 제작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정교한 작업공정의 어려움으로 인해 몸과 머리, 손 등을 별개로 만들어 각각 조립하는 형태가 권장되고 있다. 이렇게 조립된 불상의 경우 시간의 경과에 따른 결합부분의 구조적 약화로 인해 불상의 훼손이 더욱 심해질 수가 있다.
위와 같은 제작기법을 따른 경주남산의 석불로는 보물 제666호 경주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慶州南山 三陵溪 石造如來坐像)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상기 석불의 경우 일제강점기 조사에 의하면 불두를 신체와 별석으로 제작해 촉을 꼽아 결합한 것으로 보고된다. 석불의 머리가 없어진 사연이야 제 각각일 테지만 인고의 세월 속에 질곡의 역사를 간직한 돌부처는 지금도 중생의 염원에 가만히 귀 기울인다.
▲ [미르바나(열반)] 잎사귀를 떨군 고요의 숲은 적막하다. 머리 없는 부처는 마음의 빗장을 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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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의 목도리 부처님의 겨울목도리는 엄동의 겨울을 슬금슬금 녹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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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꽃방석] 진흙에서 피는 꽃,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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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床)은 세계 백의(白衣)의 좌법(坐法)이다. 또 연꽃의 연하고 깨끗함으로써 신력(神力)을 나타내어 그 위에 앉아 꽃이 상하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또 묘법의 자리를 장엄하게 하는 까닭에, 또 여러 꽃은 모두 작고 이 꽃같이 향기가 깨끗하고 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속세의 연꽃은 1척 정도지만 만타기니지(漫陀耆尼池)·아나바달다지(阿那婆達多池) 연꽃의 크기는 수레와 같다. 천상의 연꽃은 이보다도 크다. 이것은 결가부좌하기에 족하다. 부처가 앉는 꽃은 이보다도 크기가 백 천만 배이다. 또 이 같은 연화대는 깨끗하고 향기가 있어 앉을 만하다."
진흙에서 피는 꽃,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고픈 불보살의 무량한 마음자리를 잊지 않기 위함일 게다. 한 송이 연꽃위에 불보살이 살며시 내려앉는다. 저잣거리의 황량한 마음을 보듬어줄 분별없는 신심하나 피어오른다.
▲ [연화화생(蓮華化生)] 한 송이 연꽃위에 불보살이 살며시 내려앉는다. |
ⓒ 남병직 |
한해의 끝과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성스러운 시간이 임박했다. 죽어가던 해가 다시금 살아온다. 을미년(乙未年)의 묵은해는 가고 병신년(丙申年)의 새해가 밝아온다. 내밀한 시간의 미궁은 적멸의 찰나에 빗장을 연다. 번뇌가 끊어진 침식곡에 환희심(歡喜心)이 넘실거린다. 목마른 중생의 목을 축여줄 지혜의 샘물이 심수곡에 샘솟는다. 머리 없는 부처의 말없는 설법이 골짜기에 메아리친다.
"머리 없는 그대여, 내내 번뇌도 없으리!"
▲ [기다리는 불상] 머리 없는 부처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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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기사 문화유산답사회 우리얼(http://www.uriul.or.kr)의 2015년 경주지역 번개답사(경주남산)의 동행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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