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지 250년 뒤에 발견된 '임진왜란' 일기

정만진 2016. 10. 28.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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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양 임진왜란 유적 오극성 고택

[오마이뉴스정만진 기자]

 정면에서 바라본 오극성 고택 전경.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498호인 조선 시대 건물이다.
ⓒ 정만진
문월당 오극성(吳克成)은 1559년 경북 영양읍 대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본래 선비였지만, 1594년 선조가 무예를 숭상하려고 실시한 권무과(勸武科)에 합격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세운 공로로 1598년 3등 공신에 올랐고, 1617년 타계?다.

그로부터 250여 년 후, 오극성 가문의 고택에 큰 불이 났다. 화재를 진압한 뒤 정리를 하던 후손들은 불길에 그을린 작은 궤짝 하나를 발견했다. 궤짝 안에는 오극성의 일기 등이 들어 있었다. 1845년, 후손 오정협(1791∼1871)이 일기를 책으로 펴냈다. 책 이름은 <문월당 선조 임진일기>. 이 일기를 통해 후손들은 자신들의 선조인 오극성이 역사에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를 상세하게 알게 되었다.

250년 뒤 발견된 오극성의 임진왜란 일기

오극성은 무인인 할아버지 오필과 선비인 아버지 오민수를 반반씩 닮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또래들보다 체격이 커서 외모로는 할아버지를 빼닮은 듯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잔병치레를 많이 했고, 학문을 힘쓰는 데 더 큰 흥미를 가졌다. 그래도 책 읽고 글 쓰는 틈틈이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허약한 몸을 단련하는 데에 열성을 쏟았다. 고구려는 '자제들이 결혼할 때까지(子弟未婚之前) 밤낮으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晝夜於此讀書習射)'라는 구당서(舊唐書)의 기록을 연상하게 해주는 오극성의 이같은 마음가짐은 임진왜란을 맞아 크게 빛을 드러내었다.

특히 오극성은 병서(兵書)도 많이 읽어 영천 의병장 정세아로부터 "그대는 선비인데 어째서 군사와 관련되는 책을 그리 많이 읽는가?" 하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때 오극성은 "제가 비록 선비이지만 병법(兵法)을 잘 안다면 나라가 어지러울 때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실제로 그 이듬해인 1592년, 일본이 대군을 일으켜 쳐들어오자 조선은 온통 쑥대밭이 되었다. 4월 13일 전쟁이 시작되고 불과 12일만인 4월 25일에 상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영양으로 날아들었다. 개국 이래 200년 동안 평화를 누리며 전쟁 없이 살아온 탓에, 거리는 온통 도망가려는 인파로 들끓었다. 오극성은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시 한 수를 썼다.

國事那堪言 나라의 일을 어찌 감히 말할 수 있으랴만
孤城己絶援 외로운 고을에 이미 원군은 못 온다네
南州無義士 서울 남쪽 영양땅 의로운 선비가 없는가
誰餘作忠魂 누구와 함께 충성을 실천할 수 있으려나!

선비들을 향해 의병을 일으키자고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병환이 심해 당장 전쟁터로 달려갈 수 있는 처지도 못 되었고, 군사들이 모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본래 선비였으므로 우선은 문장으로 나라에 도움이 되기로 했다.

병약했던 오극성, 임진왜란 극복 위해 글 써서 많은 방안 제시

오극성은 선조를 호위하고 있는 윤두수(1533∼1601), 예천에서 창의를 준비하고 있는 류복기(1555∼1617), 이미 의병군을 일으켜 낙동강 일원에서 활약 중인 곽재우(1552∼1617)에게 서신을 띄웠다. 윤두수에게는 병사의 모집과 군량미 비축, 그리고 무기 제작 방법에 대해 썼고, 류복기에게는 모두가 그대를 따를 터인즉 하루라도 빨리 군사를 일으켜 달라고 당부했다. 곽재우에게는 기습 공격이 아군에게 유리한 전술일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그 외 정곤수(1538∼1602)와 김성일(1538∼1593)에게도 서신을 보냈다. 평양성 탈환 이후 일본군을 얕잡아 본 명군이 벽제관에서 참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곤수에게 두 나라 군대의 협조 체제 유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뜻을 글로 써서 보냈다. 김성일에게는 경상도를 잘 지키지 못하면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가 저절로 무너질 것이므로 경상도 방어에 큰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영양산촌생활박물관이 펴낸 2016년 6월에 펴낸 <붓을 던져 나라를 구한 문월당 오극성>의 표지. 이영재 학예사가 기획, 집필했고, 김종한 화백이 그림을 그렸다. 영양산촌생활박물관은 <문월당 오극성> 외에도 <벽산 김도현>, <여중군자 장계향>, <사진으로 보는 영양>, <사진으로 보는 영양의 산촌 마을>, <영양 지역의 마을과 역사>, <다시 보고싶은 영양의 초등학교>, <고지도와 읍지로 보는 영양> 등 다수의 책을 발간했다.
ⓒ 정만진
이윽고 1594년 1월 15일, 오극성은 동생 오윤성(吳允成, 1563∼1627)과 함께 무과에 동방급제(同榜及第, 같은 과거에 나란히 붙음)하였다. 오극성은 말을 잘 타고 활 쏘는 솜씨가 뛰어나다 하여 임금을 호위하는 선전관으로, 오윤성은 이순신 장군을 보좌하는 수군 장수로 활동하게 되었다.
선비인 오극성이 전쟁 중이라는 특수한 나라 사정 때문에 장수로 나서게 된 것을 두고 <문월당 오극성>의 저자 이영재는 '붓을 던져 나라를 구한' 일로 평가한다. 이영재는, 오극성이 전쟁을 이끌고 있는 고위 관리와 의병장들에게 부지런히 붓으로 글을 써서 보낸 일과, 붓을 버리고 군인이 된 일을 함께 아우르는 절묘한 중의법(重義法, 한 문장에 두 가지 뜻을 담는 표현 방법)을 구사한 것이다.

오극성이 처음 세운 공은 전쟁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나라 안 곳곳을 돌아다닌 일이었다. 당시 선조는 수군의 이순신, 도원수 권율, 경상감사 김수가 각각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고자 했다. 그러나 아무도 적들이 우글거리는 남쪽으로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 오극성은 그 임무를 자신이 완수하겠노라, 자원했다.

오극성은 일반 백성의 옷을 입고 출발하여 낮에는 숨어 지내고, 밤이면 산길 등 사람이 없는 곳을 골라서 이동했다. 그렇게 하여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국 방방곡곡을 순회한 끝에 서울로 돌아와 전쟁 상황을 보고했다. 목숨을 걸고 어려운 임무를 완수한 오극성은 이 일로 조정의 큰 신임을 얻었고, 선조도 크게 기뻐하여 그 날로 종9품 선전관에서 세 등급이나 위인 종6품 주부로 승진시켜 주었다. 과거에 합격한 지 한 달만의 일이었다.

그 후에도 오극성은 많은 활약을 펼쳤다. 황간현감으로 있던 1597년에는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일본군을 습격, 200여 명을 죽였다. 남원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출전했을 때에도 식량을 운반해가는 적군 100여 명을 만나 그중 60여 명을 죽이는 전과를 일구었다.

13척 전선 뒤에 고기잡이 배 늘여 세워 왜군 속이고

이순신이 전사하는 노량 해전에도 오극성은 참전했다. 오극성은 해안선을 따라가며 군복 차림의 허수아비들을 세웠다. 적들은 허수아비들을 보고 자신들이 포위된 것으로 착각, 우왕좌왕하던 끝에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때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진린의 명군이 공격을 개시, 마침내 대승을 거두었다.

동생 오윤성도 명량 대첩 때 지혜를 발휘했다. 겨우 13척뿐인 아군으로 수백 척의 적과 맞붙어야 하는 싸움이었다. 오윤성은 수십 척의 민간인 어선을 13척 뒤에 늘어서게 했다. 그러자 적들은 조선 수군의 세력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었다. 심리전에서 오윤성의 지혜는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얕은 야산을 배경으로 세워져 있는 오극성 고택. 남서향을 바라보게 건축된 ㅁ자형 고택으로, 조선 후기에 경상북도 북부 지방에서 유행하던 가옥 양식을 보여준다.
ⓒ 정만진
오극성이 타고 다니던 말은 누구나 탐을 내는 명마였다. 전쟁이 끝난 뒤, 말을 자신에게 주면 더 높은 벼슬을 하도록 만들어주겠다는 고위 관리의 제안이 들어왔다. 오극성은 "국가의 관직이 그렇게 사고파는 자리란 말이오?" 하며 그 자를 꾸짖고는 정3품 봉상시정 벼슬을 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오극성은 '대나무 여위어가는 잎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고(竹瘦光侵葉) 오동나무 찬 그림자가 가지 틈에 비치는(梧寒影透枝)' 곳에 문월당이라는 이름의 조그마한 정자를 짓고, 거기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벗들과 사귀면서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달에게 묻는다'라는 뜻의 '문월'은 이백의 시 파주문월(把酒問月, 술잔을 잡고 달에게 묻는다)에서 따온 말이다.

오극성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달은 같지만(古今猶今月) 지금은 옛날과 시절이 다르구나(今時非古時)' 하고 노래했다. 나는 저물어가는 이 시간, 오극성 고택(문화재자료 498호) 앞에서 달이 뜨기를 기다린다.

 뒤에서 바라본 오극성 고택의 모습. 하늘에서 내려다 보지 않는 한 가옥 전체를 볼 수는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지만, 야산 쪽으로 올라 뒤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건물 배치가 ㅁ자 형이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
ⓒ 정만진
오극성 고택은 경상북도 영양읍 대천리 595(황골길 9-3)에 있다. 집 앞으로 좁은 들녘이 있지만 사방으로 산에 에워싸여 있어 늦은 오후인데도 이곳은 마치 초저녁이 밀려온 것만 같다. 게다가 고택 또한 양반 가문의 밀폐 문화를 상징하는 ㅁ자 형태여서 환한 대낮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어쩐지 고택의 위치와 집의 구조가 오극성이 남긴 시 '제문월당(題問月堂)'의 분위기와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듯 느껴져 그가 선비 출신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려본다. 

古月猶今月 옛날이나 지금이나 달은 같지만
今時非古時 지금은 옛날과 시절이 다르구나
停盃邀爾久 술잔을 멈추고 기다린 지 오래인데
出峀問何遲 봉우리에 솟는 달 어찌 이리 늦은가
竹瘦光侵葉 대나무 여위어가는 잎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고
梧寒影透枝 오동나무 가지 틈에 그림자가 비치누나
能傾千斗酒 천 말의 술도 얼마든지 기울일 수 있지만 
不必百篇詩 이 달밤, 백 편의 시를 지을 것까지는 없다네

술잔을 멈추고 기다린 지 오래인데, 달은 왜 이토록 봉우리에서 솟아오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가? '제문월당'은 한없이 아름다운 서정시이건만, 오극성 고택 뜰에 선 나는 우리가 기다리는 일들은 어째서 이토록 늦게 오나, 하며 낡은 고정관념에 빠져든다. '시절이 하 수상'하기 때문인가. 오극성은 단 한 편의 시만으로도 달밤의 정취를 얼마든지 노래할 수 있다고 장담했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그 많은 말과 글을 토해내고도 민주주의와 통일을 이뤄내지 못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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