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섬나라' 일본 육군이 강했던 비결

정만진 입력 2016. 9. 27.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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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수군이 강하지만 육군은 약하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큰 오판

[오마이뉴스정만진 기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부랴부랴 피란을 떠난 선조 일행은 이내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할 생각을 한다. 하지만 명은 선조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오면 일본군이 더욱 맹렬히 중국땅을 공격할 것이고, 자칫하다가는 조선땅이 아니라 자기네 땅이 전쟁터가 될 것을 우려, 망명을 거절한다. 선조는 압록강을 바라보며 <용만서사>라는 한시를 써서 '나라는 갈팔질팡 어지러운데 (중략) 압록강 강바람에 내 마음이 상하네 / 대신들이여, 오늘 이후에도 / 또 동인 서인 하며 싸울 테요?'라고 노래하여 전쟁 책임이 신하들에게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 정만진
임진왜란 초기, 조선은 육지 전투에서 일본에 연전연패했다. 처음 부산진성을 빼앗긴 이래 동래읍성, 김해읍성, 밀양읍성, 울산읍성, 경주읍성, 대구읍성 등 모든 주요 거점들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넘겨주고도 모자라, 중앙군 최초의 출전인 상주 북천 전투에서도 일격에 참패를 당했고, 조선군의 최고위 장군인 신립마저도 충주 탄금대에서 적과 싸우다 밀리자 남한강에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

결국 전쟁이 일어난 지 채 20일도 되지 않아 한양이 적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선조와 대신들은 평양을 거쳐 압록강 아래 의주까지 부랴부랴 피란을 갔다. 여차하면 중국으로 망명을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명이 선조의 망명 신청을 거절하는 바람에 조선 조정은 창피만 당한 채 줄곧 의주에 머물렀다.

수많은 해전이 벌어질 거라 예상 못한 일본

수군은 달랐다. 해전에서 조선군은 이기고 또 이겼다. 개전 초, 경상좌수사 박홍과 경상우수사 원균이 장렬히 싸우기는커녕 전함의 밑창을 뚫어 스스로 배를 물속에 가라앉히고 도주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였지만, 이순신이 나선 5월 7일 옥포 해전 이후 정유재란 발발까지 조선 수군은 단 한 번의 패전도 없이 연일 연전연승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조선 수군의 승승장구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은, 일본으로서는 전쟁 시작에 앞서 전혀 예상한 바 없는 패전의 연속이었다. 아니, 일본은 임진왜란 중 수많은 해전이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조차 예측하지 못했다. 일본 측의 해전 준비 부실에 대해서는 국사편찬위원회 발간 <신편 한국사>가 잘 설명해 준다.

이 책은 먼저 일본인 학자 덕부저일랑(德富猪一?)의 '당시의 일본인들은 섬나라 사람이란 것뿐 바다를 거의 모르고 있었고, 해전을 치러본 경험이 없었으므로 임란 해전에서 아무런 능력도 발휘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들은 거의 완전한 육상동물이었다. 그들은 호랑이를 물속에 던져놓은 것과 같은 모양이 되어 해전에서는 능력의 십분의 일도 발휘할 수가 없었다'라는 견해와, 유마성보(有馬成甫)의 '당시 일본 수군은 이름과 소속만 육군과 차이가 있었을 뿐 전투 기능에서 특별한 차이가 없었고 (중략) 수군의 기능과 역할을 극히 도외시했던 풍신수길은 수군에게 수송 업무의 감독이나 운송선 지원 외에는 거의 임무를 부여하지 않았다'라는 견해를 소개한다.

이를 바탕으로 <신편 한국사>는 '풍신수길은 사전에 해상 전투가 있을 것을 예상조차 못하였으며, 이것은 곧 조선의 사정을 그만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조선측과는 달리 제도적 수군 양성이 전무한 상태에서 무모한 침략 전쟁을 일으켰으므로 그 결과는 자명하였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만큼 바다에서의 연속적인 참패는 일본 측에 있어 충격적인, 당혹스러운 상황 전개였다.

수군의 압승을 전혀 기대한 바 없었던 조선

 임진왜란 당시 경상좌도 군대의 총본부인 좌병영성은 울산에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군이 부산에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들은 경상좌병사 이각은 동래성(당시 부산의 중심부)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부산진성을 간단히 함락시킨 왜군의 대군을 본 이각은 도망갈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곧장 성밖으로 도주하여 부랴부랴 일본군이 없는 곳까지, 즉 임금 선조가 있는 곳까지 내달렸다. 하지만 이각은 임진강에 만난 도원수 김명원의 군령 서린 칼날에 목이 달아났다.
ⓒ 정만진
그런가 하면, 수군의 연전연승은 선조를 비롯한 조선 지도부에게도 뜻밖의 놀라움이었다. 선조 등은 아군이 바다에서 일본군을 제압하리라고 전혀 기대한 바 없었다. 그들은 섬나라 일본은 당연히 수군이 막강하고, 상대적으로 육군은 약할 것으로만 지레짐작했다. 그런데 조선 육군은 약할 것 같았던 일본 육군에게 연전연패하고, 조선 수군은 강할 것 같았던 일본 수군에게 연전연승을 했다!  

조선이 임진왜란 초기에 곤욕을 치른 것은 군사력 증강, 축성 완비 등 전쟁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결과이지만, 일본의 전력을 결정적으로 잘못 판단한 데에도 큰 원인이 있었다. 조선 조정은 줄곧 일본의 수군 전투력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고, 육군 전투력을 현실과 상반되게 과소 평가해 왔다. 적국의 군사력을 실제와 정반대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지도부의 터무니없는 오판을 증언해주는 상징적 기록은 <세조실록> 1457년(세조 3) 1월 16일자에 실려 있다. 이 날 기사는 '남쪽 변방에 수군은 많이 설치하고 육군은 너무 적게 배치했다. 섬오랑캐는 수전에 능숙한 반면 육전에 서툴고, 우리나라는 육전에 장점이 있어도 수전에는 단점이 있다. 적들이 비록 수전을 잘하지만 우리가 전함으로 맞싸우지 않고 지는 체하며 그들을 육지에 끌어들인 다음 기병으로 공격하면 거의 물리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일본이 쳐들어오면 바다에서 싸우지 말고, 육지에 상륙시킨 다음 제압해야 한다는 판단이다.

그래서 이 날 기사는 '경상좌도는 영해에서 경주 감포까지 바닷길이 험악하고 섬도 없다. 따라서 비록 수군이 지키더라도 배를 익숙하게 부리지 못하므로 적이 갑자기 공격해오면 방어할 수 없다. 우리는 모름지기 육군을 움직여야만 가진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다'로 이어진다. 이는, 일본이 임진왜란 직전 100여 년 동안 통일 전쟁을 치르느라 내내 육지 전투를 벌여온 사실을 전적으로 무시한 치명적 오판일 뿐이다. 일본군들은 해전 능력은 없고, 공성전(攻城戰, 성을 공격하는 전투)과 평지전(平地戰, 평야에서 벌이는 대규모 전투) 경험으로만 똘똘 뭉친 유능한 육군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100년 동안 '통일 전쟁' 치른 일본, 육군만 유난히 강해

그 결과, 선조와 조선 조정은 급기야 임진왜란 직전 수군 해체 명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이 기사는 임진왜란 발발 첫날의 기록인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자에 실려 있다. 수군을 없애니 모두들 육군이 되어 적과 싸우라는 명령이다. 

기사의 전문은 '해도(海道, 바다를 끼고 있는 도)의 주사(舟師, 수군)를 없애고 장수와 병사들은 육지에 올라와 싸우고 지키도록 명하였는데, 전라수사 이순신이 급히 아뢰기를, "수륙(水陸)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 하고 반대하여 호남의 주사만 홀로 온전하게 되었다(湖南舟師獨全)'이다. 수군을 육군에 편입시키기로 결정한 임금과 조정이 수군 해체 명령을 내렸지만, 이순신이 거부하여 호남 주둔 수군만 수군으로 남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기사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첫째, '과연 이순신!'이라는 찬탄을 거듭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임진왜란 발발 전에도 이순신이 수군 해체 명령에 불복한 바 있다는 이 일화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정유재란 초 칠천량 해전 참패로 말미암아 조선 수군이 거의 궤멸되었을 때 선조와 조정이 내린 수군 해체 명령을 이순신이 거부한 것은 국민적 상식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모두가 아는 사건이다.

이때 이순신은 "상유십이척 미신불사(尙有十二隻 微臣不死, 아직 12척의 배가 있고 미천한 신도 살아 있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데 수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어느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절실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이순신이었던 것이다. 

이 기사는 둘째,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상좌수사 박홍과 경상우수사 원균의 행동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볼 점이 있지 않나 싶은 의문을 일으킨다. 이 의문은, 이 글 첫머리의 '개전 초기, 경상좌수사 박홍과 경상우수사 원균이 장렬히 싸우기는커녕 전함의 밑창을 뚫어 스스로 배를 물속에 가라앉히고 도주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였다'라는 진술에 대한 부정이다.

바꿔 말하면, 전쟁 발발 직전 '수군을 없애니 육군에 들어와서 적과 싸우라'는 명령을 받은 박홍과 원균은 임금의 지시에 따라 수군을 자진 해체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는 뜻이다. 4월 14일자 수정실록에 '(조정의 수군 폐지 명령에 저항한 이순신의) 호남 수군만 남았다'라는 기록이 그 증거이다. 그렇게 보면, 원균과 박홍은 도망을 간 것이 아니라 육군으로 싸우기 위해 자신이 보유한 배를 스스로 바다에 가라앉힌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단순 도주 이각 처형, 박홍 그저 백의종군 

 임진왜란 발발 초기 동래읍성 전투 상황을 그린 보물 392호 <동래부 순절도>(원본은 육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는 전국 대부분의 임진왜란 관련 기념관에 게시되어 있다. 이 그림과 관련해서는 1709년(숙종 35) 동래부사 권이진이 쓴 화기(畵記)가 전해진다. 위 사진의 빨간 동그라미 부분은 경상좌병사 이각의 도주 장면으로 추정되고 있다.
ⓒ 정만진
<선조실록> 1592년(선조 25) 4월 13일 기사에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의 도주 기록이 실려 있다. 동래읍성 전투 상황을 증언하는 이 전쟁 첫 기사 중에서 이각 부분은 '(동래읍성을 점령한 후) 적은 드디어 두 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여 김해·밀양 등 부(府)를 함락하였는데 병사 이각은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달아났다'이다. 그렇게 이각은 임진왜란 최초의 고위직 도망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4월 13일이라면 임진왜란 발발 첫날이다.
그 후 이각은 임금이 머물고 있는 평양을 향해 달려가던 중 임진강에서 도원수 김명원에게 참형을 당한다. 그렇다면 박홍은 어떻게 될까? <선조실록> 1592년 6월 28일자에 실려 있는 김성일의 보고서에 따르면 '좌수사 박홍(朴泓)은 화살 한 개도 쏘지 않고 먼저 성을 버렸다.'

박홍에 대한 논란은 실록에 연거푸 등장한다. 1592년 11월 15일자에는 사헌부 집의 이호민, 장령 이시언, 지평 유몽인이 '요즘의 군대 분위기를 보면 (중략) 적이 오기도 전에 모두 놀라 도망할 생각만 하고 맞아 싸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중략) 지금 군율을 엄하게 밝혀 면모를 일신하지 않으면 앞으로 있을 큰 싸움에서도 전철을 따르게 될까 염려'된다면서 '박홍은 적이 처음 쳐들어온 관할 도(경상좌도)에서 한 차례도 싸우지 않고 천리 밖으로 물러나 있어 남쪽 지방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의 살점을 씹고자 합니다. 하지만 박홍은 그 죄가 이각과 다르지 않은데도 아직껏 참형을 면하여 반년 동안 목숨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형벌이 이러한데 어찌 나라꼴이 유지되겠습니까?' 하는 내용의 차자(箚子, 간단한 상소문)를 올렸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각은 처형되었는데, 같은 죄를 지은 박홍은 처벌없이 살아 있으니 군대의 기강을 살릴 수 없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들의 차자는 소수 의견이었던 듯하다. 다음날인 11월 16일 실록은 비변사가 '박홍의 일은 그 당시(전란 발발 초기)에 즉시 처리했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세월이 오래 지났고, 또 한창 종군하면서 전공을 많이 세우고 있으므로 우선은 너그러이 용서하고 책임을 물을지 여부는 뒷날 결정해야 합니다' 하고 반대했다는 증언을 전해준다.

다시 선조는 1593년 1월 25일, '도망한 장수를 난리통에 일일이 군법대로 조치할 상황이 못 되어 어쩔 수 없이 구차하게 백의종군으로 처리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라가 처음으로 회복되었으니 군율부터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박홍 등 패배한 장수 및 도망한 수령으로서 특히 심한 자는 즉시 법대로 처벌하고, 그 아래 죄인들은 비변사에 의견을 묻노라' 하고 생각을 밝힌다.

그러자 비변사는 '임금께서 단호하게 법을 집행하려 하시니, 신들은 진실로 참견하여 말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당초에 박홍이 적을 잘 방어하지 못하자 군사를 버리고 지름길로 돌아온 것을 조정에서 이미 백의종군하도록 허락하여 뒷날의 성과를 보기로 했습니다. 이제 박홍이 적을 베고 사로잡은 공이 없지 않은데, 지금에 와서 (전란 초 경상좌수사 때 수영을 버리고 도망친 데 대한 처벌을) 시행한다면 임금과 조정의 일 처리가 혼란스럽다는 평만 들을 것입니다' 하며 또 반대한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박홍이 대장으로 있었던 부산 경상좌수영성의 남문 모습. 무지개 모양의 홍예로 된 성문 형상이 특징이다.
ⓒ 정만진
그로부터 1년 가량 시간이 흐른 1593년 10월 22일, 선조는 재차 박홍을 거론한다. 선조는 먼저 '왜적들은 비록 소소한 죄라도 반드시 참형에 처하기 때문에 그 군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적에게 달려든다. (중략) 우리나라는 본래 군율이 엄격하지 못하였는데 전쟁이 벌어진 뒤 더욱 해이되었다. 비변사는 군율에 따라 응당 죽여야 할 사람들을 하나도 법대로 처단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무장한 군사가 백만이 되고 10년분 군량이 있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옛사람들도 사람 죽이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죽이지 않으면 잃는 바가 매우 많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죽인 것이다' 하고 한탄한다.

선조는 '군율에 따라 응당 죽여야 할 사람'인데도 비변사가 '법대로 처단하지 않은' 인물의 예시로 박홍을 든다. 선조는 '박홍은 경상수사로서 진(鎭, 경상좌수영)을 버리고 평양으로 왔는데도 죄를 주지 않았다'라고 개탄한다. 이 외에도, 박홍을 예로 들어 선조가 도망자 처형을 주장하는 기록은 1596년(선조 29) 11월 28일자와 1605년(선조 38) 7월 6일자 실록에도 실려 있다. 

1605년 7월 6일이면 임진왜란 초기 박홍이 부산을 떠난 1592년 4월 15일 이래 13년 반이나 뒤이다. 뿐만 아니라 박홍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1593년으로부터도 거의 13년 시간이 경과했다. 그런데도 선조는 '임진년(1592)에 박홍이 경상좌수사로서 패강(浿江, 낙동강)에 와 있었다. 내가 박홍을 처형하고자 두 번 세 번 뜻을 밝혔으나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박홍이 방 안에서 천명(天命, 자연사)을 다한 것을 지금까지 분하게 여기고 있다'라고 말한다. 같은 해 9월 28일에도 선조는 비슷한 발언을 한다.

박홍이 자연사한 것이 13년째 분하다는 선조

선조는 끝까지 박홍을 사형시키지 못한 것을 한탄하지만, 조정은 박홍을 이각처럼 즉각 죽이지는 않았다. 이각은 단순한 도망자이지만 박홍은 경상좌수영을 떠난 이래 죽령, 임진강, 파주 등지에서 전투를 준비하거나, 직접 참전했기 때문이다. '박홍이 한창 종군하면서 전공을 많이 세우고 있으므로 우선은 너그러이 용서하고 책임을 물을지 여부는 뒷날 결정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조정의 다수 의견으로 자리잡은 것도 그 덕분이었다.

박홍은 어쩌면 선조와 조정의 명령에 따라 수군을 버리고 육군에 참여한 결과 '도망자' 오명을 얻게 된 인물일 수도 있다. 그는 전란이 일어나자 즉시 조정에 왜적의 침입을 알렸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손에도 4월 15일에 진작 왜선 350여 척의 침입을 알리는 위급 서신을 전달했다. 그리고는 무기와 전함 등을 바다에 수장했다. 적의 손에 넘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당연한 일이다. 박홍의 치명적인 문제는 김성일의 지적처럼 '화살 한 개 쏘지 않고 성을 버렸다(不發一失首先棄城)'는 점이다. 박홍이 경상좌수영성에서 끝까지, 육군으로서 싸웠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순신이 투옥된 뒤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수군의 기습을 당해 조선 수군의 전함 대부분을 잃고 참패한다. 원균 본인은 간신히 뭍에 오르지만 기다리고 있던 일본 육군 매복병에 걸려 죽임을 당한다. 칠천량 바다는 지금 일반인의 눈으로 보아도 육중하고 거대한 판옥선들이 자유자재로 항해하기에는 부적절한 바다로 보이는데 원균은 왜 이곳에 배들을 정박시켰을까? 이는 칠천량이 평소에 물결이 잔잔해 정박 장소로 줄곧 이용되어온 곳이기 때문이다. 칠천량 기습 대패를 앞둔 원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칠천량 바다가 전투 장소로는 전혀 적합하지 않고, 일본군이 밤새 기습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정만진
선조는 누군가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야 했다. 박홍은 아마도 그 대상으로 일찌감치 지목되었을 법하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두 번, 세 번' 처형 논란에 휩싸였다. 그래도 다행은 그가 1593년 들자마자 병사했다는 사실이다. 살아 있었더라면 내내 '죽여라, 죽이지 마라' 소란에 휘말렸을 터이고, 그것은 오히려 죽음보다도 못한 치욕이었을 것이다.

박홍에 비하면, 전란 초기에 박홍과 비슷한 행적을 보였던 원균에 대해서는 '죽여라, 죽이지 마라' 논란이 전혀 없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죽은 박홍을 두고는 그 뒤로도 13년 동안이나 '박홍이 자연사를 한 것이 지금도 분하다'라고 되씹은 선조가 살아 있는 원균에게는 아무 말도 없다…….

군영 불태우고 배 한 척만 남긴 원균은 비난 않는 선조

임진왜란 발발 이후 <선조실록>에 원균이 처음 등장하는 때는 5월 10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도망쳤다는 내용이 아니라 '원균이 적선 30여 척을 격파했다'는 옥포 승전 소식이다.

두 번째로 등장하는 원균 기사는 수군의 연전연승 소식을 전하는 6월 21일자 실록이다. 실록은 '대가(임금의 수레)가 이미 서로(압록강 방면 피란길)로 들어가자 황해도 이남에서 동래까지 오직 패전 소식만 들려오고 전혀 다른 소식은 없었다'라고 시작하여 '그런데 경상우수사 원균은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약속하여 한산도에서 회합하였다'로 이어진다.

'이순신은 원균과 약속하여'가 아니라 '원균은 이순신과 약속하여'라는 표현이 눈길을 끈다. 물론 이날 기사의 본문은 이순신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다. 또 본문 중에는 '6월 29일에 순신과 원균이 재차 노량에서 회합하여 적선 1척을 만나 불살랐다'라고, 이순신의 이름이 원균 앞에 나오는 예도 있다.

하지만 '7월 6일 이순신이 이억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이 부서진 배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서 정박해 있었다'라는 한산대첩 부분의 표현도 원균에게 어느 정도 우호적이다. 이렇듯, 전쟁 발발 이후 <선조실록>에 등장하는 원균 기사가 긍정적 내용 일색으로 시작되고 있는 점은 확실히 박홍의 경우와 대조적이다.

이순신만 성웅화하면 결국 역사의 공허화 초래

무엇보다도 이 기사들에는 임진왜란 초기 조선 수군의 연이은 승전이 이순신 혼자만의 업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는 의의가 깃들어 있다. 참고로, <신편 한국사>의 '조선 수군의 승리 요인' 부분을 읽어보자.

'무모한 침략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임진왜란을 실패로 끝낸 결정적인 요인의 하나가 그들 수군의 패배에 있었다는 사실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 학자들의 견해도 동일하다. 예컨대 덕부저일랑이 풍신수길의 오판으로 일어난 전쟁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주 요인으로서 조선의 '의병 봉기'와 '수군의 우세' 그리고 '명나라 군대의 지원' 등을 지적한 것은 그 한 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선 수군이 해상에서 적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었던 요인을 밝히는 문제이다. 조선 수군의 총수로 활약했던 이순신이 임진왜란 해전사에서 차지하는 위대한 전공을 가장 높이 평가하는 데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다만 그의 휘하에서 악전고투를 계속했던 수많은 수군 장졸들의 역전의 공과 그들의 희생 그리고 수군의 전쟁 준비를 뒷받침하기 위해 실전의 군사들 못지않게 고통을 치렀던 연해 지역 민중의 희생을 빼놓고 말한다면 성웅으로 극대화한 이순신의 전공이란 결국 공허할 뿐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승리가 이순신 한 사람에 의해 획득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수많은 수군 장졸들, 군사들, 연안 지역 민중들'의 공로와 희생을 잊고 이순신만을 '성웅으로 극대화'하는 인식에 머문다면 그것은 결국 '공허'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실록은 옥포, 당포, 한산도 등에서의 승리가 이순신, 원균…… 등등 수많은 참전자들의 업적임을 말해주고 있다. 원균의 공로도 잊지 말자는 뜻이다. 

원균의 전쟁 초기 활동에 대한 실록의 부정적 기술은 6월 28일에 이르러 처음 등장한다. 김성일은 '좌수사 박홍은 화살 한 개도 쏘지 않고 먼저 성을 버렸고 (중략) 우수사 원균은 군영을 불태우고 배 한 척만 보전하였다'라고 보고하고, 김수는 '원균은 수군 대장으로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내지(內地, 육지 안쪽)로 피하면서 우응신을 시켜 관청의 창고를 불살라 2백 년 동안 저축한 물건들을 하루아침에 없애버렸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술들에서도, '화살 한 개도 쏘지 않고 먼저 성을 버렸다'는 부정적 일색의 박홍 부분에 비해 원균 부분은 상대적으로 덜 부정적이다. 이는 바로 뒤에 이어지는 김수의 발언이 증언해준다. 김수는 '남해의 섬들은 비록 왜적의 난을 겪지는 않았으나 군량과 군기를 전라좌수사가 먼저 스스로 불태워버려 이미 빈 성이 되었다'라고 선조에게 아뢴다. 사관은 이 기사의 전라좌수사가 이순신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적의 침입 앞에서 청야(淸野)작전을 펼친 것은 당시 조선의 기본적인 전술 전략이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김수는 그 다음 문장에 '남쪽 변방을 침범한 왜적은 수사 원균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서 힘을 합해 잡았다'라고 적고 있다. 6월 28일자 실록까지 곳곳을 살펴볼 때, 원균에 대해 도망자 운운의 느낌을 주는 기술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조정의 수군 폐지령에 저항 못한 것이 원균의 한계

원균은 당시 조선 조정의 주된 인식이었던 일본 수군은 막강하다는 잘못된 생각에 빠져 있었던 탓에, 일본 수군과 맞붙었으면 승전했을 수도 있는 기회를 허무하게 놓쳐버렸던 듯하다. 그래서, 이순신과는 달리, 수군을 포기하고 육군으로 전환하라는 선조와 조정의 명령에 순순히 복종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원균의 한계였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원균은 전쟁과 전투를 포기하고 도망친 사람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인물로 단정할 일은 아니다. 이는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증언해준다. <난중일기>는 4월 15일 저녁에 이미 원균으로부터 왜군의 침입을 통보받았다고 적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그 다음날인 4월 16일에도 이순신은 원균으로부터 부산진 함락 연락을 받고, 4월 18일에도 동래 함락 연락을 받는다. 그리고 4월 29일, 원균으로부터 경상우수영이 함락되었다는 연락이 온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연락은 그저 사실을 통지하는 데 목적과 목표를 둔 것이 아니다. 원병을 보내달라, 함께 작전을 펼치자는 뜻이 담겨진 연락이다. 도망자가 이렇듯 연합 작전을 인근 아군 부대에 줄곧 제안할 리는 없을 것이다.   

 임진왜란의 맹장 이운룡을 배향하고 있는 경북 청도 금호서원의 모습.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308호인 이 서원은 보물 1212호인 이운룡 교서 등 여러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 정만진
원균에 대한 부정적 문장의 하나는 임진왜란 초기 옥포만호였던 이운룡(李雲龍, 1562∼1610)의 비명(碑銘, 묘비의 글)이다. 이운룡 사후 20년 뒤에 이식(李植)이 쓴 이 비명에는 갖가지 원균 험담들이 새겨져 있는데, 임진왜란 초기 원균이 도망을 치려다가 이운룡의 제지로 주저앉았다는 식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비명의 본론 첫머리는 '임진년(1592) 봄에 왜적이 처음 난리를 일으켰을 때 (중략) 원균이 배를 버리고 달아나려 하자 옥포만호였던 공(이운룡)이 "장군은 나라로부터 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의리로 보아 관할 지역을 죽음으로 지켜야 마땅하오. (중략) 지금 우리가 비록 곤경에 빠졌다고 하나 그래도 병력을 모아 지킬 수 있고, 또 호남의 수군은 완전하니 지원을 요청해서 견내량을 막아 적이 거제 서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면, 남방의 사태를 안정시킬 여지는 아직 남아 있오. 그런데도 공은 여기를 버리고 어디로 가려 하시오?" 하고 항의했다'로 시작된다.

이어 본문은 '그러자 원균이 성을 내며 "호남의 군대를 당신이 청해 올 수 있겠소?" 하고 말했고, 공이 "장군이 내게 명령을 내린다면 어찌 사양하겠소? 다만 율포만호 이영남이 평소 그쪽 군대와 잘 지내고 있으니 그에게 시키는 것이 더 좋을 것이외다" 하자 원균이 그 말을 따랐다'로 되어 있다.

결론만 말하면, 도망가려고 작정한 대장이 부하 장수가 말린다고 그냥 주저앉을까? 그런 점에서 '이운룡의 비명'은 이운룡의 이름을 빛내는 데에 오히려 방해가 될 듯하다. 이운룡은 의기소침해진 원균을 독려하고, 이순신에게 지원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자고 제안하여 성사시킨 침착하고 현명한 부하장수였는데 이식의 '비명'은 공연히 이운룡을 자신의 대장을 헐뜯는 사람인 양 표현하고 말았다.

아무튼 원균은 지금도 지하에서 억울한 가슴을 두 주먹으로 툭, 툭 치고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운룡도 약간은 얼굴을 찌푸린 채 자신의 비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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