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세계로의 여행 여행자를 위한 도시, 트빌리시 제1화, TBILISI LOVES YOU

2016. 5. 25.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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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로 유명한 미국의 조지아(State of Georgia) 말고 구소련과 러시아에서 독립한 신생국가 조지아(Republic of Georgia)라는 낯선 나라에 대한 흥미가 나를 자극했다. 가이드 북 없이, 이렇다 할 계획 없이, 별 생각 없이, 겁 없이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Tbilisi)에 두 발을 디뎠다. 이후 조지아를 시작으로 아르메니아, 터키, 불가리아로 이동 노선을 정하게 된 건 비행기 대신 버스나 기차로 각 나라의 국경을 넘기 위해서였다. 나는 확신한다. 여행자를 위한 최적의 도시가 있다면 그곳은 바로 트빌리시일 거라고.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는 과일 주인에겐 달가운 일이 아니다.
▶나를 정말 사랑한다고?

공항철도 대신 모스크바 현지인이 일러준 정보대로 움직였다. 지하철 환승 2회, 지하도 건너기 2회, 308번 버스 정류장 찾기, 요금 확인하기, 그리고 탑승하기를 완수한 후 예상보다 일찍 도모데도보 국제 공항(Domodedovo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했다.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곧 이륙하려던 비행기가 갑자기 멈춰서고 승무원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기 전까지는. 다급한 목소리로 첫 운을 뗀 승무원의 멘트와 동시에 러시아 승객들은 너도나도 안전벨트를 풀어헤치며 갖은 짜증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제 모든 것이 어그러질 차례였다. 뒤이어 영어 방송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승무원은 이미 자리를 떴는지 침묵만 감돌 뿐이었다. 재차 한숨을 내쉬던 옆자리에 앉은 러시아 남자는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내게 이 상황에서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친절한 짜증 섞인 얼굴로 “체인지(Change)”라는 단어를 연거푸 말했다. “다른 비행기로 갈아타야 하니 가만히 있지 말고 다른 러시아 사람들처럼 당장 벨트 풀고 짐 내리고 짜증을 토해내라”는 말이 함축되어 있었다.

두 번째 비행기가 무사히 이륙하기까지 3시간여의 시간이 지체됐다. 고민이 시작됐다. 비행기가 정시 운항을 했다면 일몰 전 트빌리시(Tbilisi)에 닿았을 테지만 일몰은 이미 기내 밖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혼자 여행할 때 어둠 속에서 낯선 곳을 맞이하는 건 언제나 달갑지 않은 일이다.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간은 콩알만해져 긴장해야 하니까. 게다가 트빌리시에서 머물기로 한 ‘카우치 서핑(Couch Surfing, 인터넷 여행자 커뮤니티로 현지인이 여행자들을 위해 자신의 거실 소파 혹은 빈방을 내어주고 여행자는 무료로 숙박이 가능하다)’ 호스트와의 약속 시간도 지킬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사실을 인지하고 나서야, 갖은 짜증이 밀려왔다.

트빌리시 국제 공항(Tbilisi International Airport)은 예상보다 규모가 작았다. 터미널 규모가 2만5000제곱미터로 김포공항(4만3600㎡)의 1.7배 가량, 인천국제공항(51만4910㎡)과는 20배 가량 차이가 난다. 공항 바깥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는 가로등이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아 저녁 8시가 채 되지 않았는데도 예상보다 훨씬 깊은 어둠 속에서 낯선 도시를 맞닥뜨려야 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두 어깨를 감싸는 긴장은 곧 사라졌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호스트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 와이파이를 찾던 중 ‘Tbilisi Loves You(트빌리시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와이파이 이름에 일순간 긴장보단 미소가 나를 에워쌌기 때문이다.

센트럴 마켓의 한 장면. 소시지와 치즈, 빵이 조지아 가정식의 주를 이룬다.
여행의 구심점이 되는 자유광장
▶손님을 왕으로 모시는 나라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37번 버스 안, 모두가 나를 바라본다. 그것도 대놓고 쳐다본다. 버스 안내원을 제외하고 모두가 혈기 왕성해 보이는 사내들이다. 버스 안내원에게 말을 걸기 위해 몸을 뒤쪽으로 돌리자 그들의 시선은 한층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자유 광장(Liberty Square)에 도착하면 알려달라”는 내 부탁에 버스 안내원은 물론 사내들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 말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자신의 나라를 찾은 방문객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들의 행동은 환대로 비춰졌다.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신생국가인 조지아는 러시아의 영향으로 언제 어디서나 게스트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문화가 자리한다.

러시아를 여행할 때의 일이었다. 삼대가 모두 모인 밥상 앞에서 가장 먼저 음식을 맛볼 수 있는 특권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아닌 내가 그 주인공이었다. 손님이 먼저 테이블에 앉고 난 뒤 가족들은 차례로 앉았고, 손님의 접시에 가장 먼저 음식이 놓인 후에야 다른 접시에도 차례로 담겼다. 그야말로 이곳에서 ‘손님은 왕’이다. 왕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버스 안 사람들은 왕이 떠날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광장에 닿으니 이제야 환한 불빛이 도시를 비춘다. 장엄한 건축물과 거리를 감싼 화려한 네온사인,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고 외치는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목소리, 블록마다 터를 잡은 다양한 버스커들의 음악 연주. 한 집 건너 하나씩 똑같은 붉은 글씨로 환율을 표시하고 똑같은 간판을 내건 채 늦은 시간까지 장사를 하고 있는 환전소, 남녀 할 것 없이 거리의 모든 이들이 피워대는 진한 담배 연기, 패션 스타일이랄 것이 전혀 없는 볼품없는 사내들에 비해 휘황찬란한 스타일을 과시하는 여인들의 감각적인 옷맵시, 도로 위 자신들이 최고라고 으스대는 경적소리의 불협화음, 명품 브랜드 매장 앞 행인들의 다리를 부여 잡고 악다구니를 써대는 거리의 아이들. 알 듯 모를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트빌리시의 첫인상은, 또 첫날밤은 그렇게 애매모호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적으로부터 가정을 보호하기 위한 검을 쥐고 있는 조지아의 어머니, 나리칼라 요새에서 내려다본 올드 타운 전경
나리칼라 성 주변 장엄하게 펼쳐진 식물정원, 성벽으로 둘러싸인 나리칼라 요새
▶치열한 역사로 꽃피운 생존방식

조지아는 오랜 세월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셀주크 투르크, 몽골의 지배도 받았다. 지금의 통일왕조인 조지아 왕국이 건설된 것은 10세기경이다. 18세기 조지아 왕국은 러시아 제국에 편입 및 합병되고 이후 조지아 공화국을 세웠으나 소련과의 재합병, 압하지야와의 재합병을 거쳐 1991년 4월 독립 선언 후 같은 해 소련 해체가 확정된 12월25일 완전한 독립국가가 됐다. 그러나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조지아와 압하지야 간 내전은 휴전협정을 하기까지 2년간 지속되었다. 이 내전으로 최소 2만명이 목숨을 잃고 25만명이 난민으로 전락했다. 휴전협정 이후 두 나라간 다시 전투가 벌어지기를 여러 차례, 2000년대 들어서는 조지아와 러시아간 외교 분쟁이 전쟁 발발로 이어지기도 했다. 조지아의 역사를 두고 전문가들은 ‘숙련된 생존’이라 일컫는다. 남성은 전쟁에 참전해 적을 무찌르며 스스로 생존방식을 터득해야 했고, 여성은 가장을 대신해 집안 경제와 살림을 책임지며 스스로 생존방식을 습득해야 했다.

숙련된 생존자의 발자취는 올드 타운(Old Town)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나리칼라 성(Narikala Castle)에 올랐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는 4세기경 페르시아 사람들이 사용하던 군사 요충지로, 현존하는 성벽은 8세기경 아랍 왕족의 의해 건설되었다. 올드 타운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 일몰 시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여행자뿐 아니라 현지인들이 몰려든다. 요새 안에 위치한 세인트 니콜라스 교회는 1990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올드 타운에서 성까지는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 산책하듯 오르기 좋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쿠라강을 조망하고 싶다면 케이블 카를 선택하는 것도 좋다.

요새 주변 푸르른 나무가 울창하게 펼쳐진 식물 정원을 200m 정도 지나치면 그곳에 ‘조지아의 어머니(Mother of Kartli)’라 불리는 거대한 조각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조지아 사람들이 어머니라 일컫는 카틀리(Kartli)는 고대 이래 조지아 동부에 거주한 부족을 뜻하며 ‘카틀리의 어머니’는 조지아 여성을 상징한다. 시내를 품에 안은 강인하면서도 인자한 어머니의 모습에서 외세로부터 가정을 지켜낸 지조가 한껏 느껴진다. 왼손에는 외부에서 찾아온 손님에게 대접할 와인이, 오른손에는 적으로부터 가정을 보호하기 위한 검을 쥐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조지아 남성의 상징은 쿠라강을 건너 만났다. ‘조지아의 왕’이라 불리는 동상은 어머니와 마주한 반대 지점, 즉 쿠라강 건너편에 놓여 있다. 말을 타고 질주하는 왕의 용맹함을 강조한 동상의 주인공은 바흐탕 고르가사리 왕(King Vakhtang Gorgasali)이다. 조지아 민족의 시조인 이 왕은 기원전 트빌리시를 건설한 영웅으로 추대된다. 고대시대부터 시작된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 백성을 향한 왕의 지극한 사랑은 21세기 2016년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조지아의 왕이 트빌리시를 굽어 살핀다.
▶여행자를 위한 도시가 분명하다

트빌리시 여행은 쉽다. 거리마다 여행자를 배려한 영어 표지판과 안내문이 잘 갖춰져 있고 관광안내소의 친절함은 말할 것도 없다. 무엇보다 도심 어디에서건 ‘Tbilisi Loves You’는 나를 계속 따라다녔다. 지하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하철과 와이파이만 있다면 트빌리시 시내 구경은 사실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서울 지하철보다 십여 년 앞서 1966년 개통된 트빌리시 지하철은 옛 소련 연방 국가들 중에서 4번째로 완공된 문명이다. 구소련 시절 지하철의 특이한 점은 개찰구에서 플랫폼까지의 거리가 상당히 멀다는 점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세계로 진입하는 기분은 꽤 신선하고 짜릿했다. 노선은 파란색과 빨간색 2개 라인, 역은 총 22개로 많지 않다. 과거로 회귀한 듯 구소련을 차려 입은 지하철에서 21세기 모던한 옷맵시를 뽐내는 조지아 여인들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도심과 바로 연결되는 리버티 스퀘어(Liberty Square)역, 조지아 전역을 잇는 시외 버스 정류장과 기차역이 자리한 스테이션 스퀘어(Station Square)역은 알아두면 유용하다.

특히 스테이션 스퀘어역 인근에는 마치 남대문시장과 같은 커다란 규모의 센트럴 마켓(Central Market)이 있다. 상인과 손님들로 꽉 들어찬 도로 옆 큰 거리를 살짝 벗어나면 미로 같은 골목이 나타나고 그 골목마다 작은 상점이 나타나는데 길을 잃을 만큼 상점 구경이 제법 흥미롭다. 우리네 시장이 그렇듯 의류에서부터 전자제품, 주방용품, 식재료, 빈티지 제품 등 사는데 필요한 아이템은 이곳에 모두 모여 있다. 한두 시간 정처 없이 떠돌다가 허기가 오면 노상에서 파는 케밥이나 핫도그로 채우면 된다. 경험상 트빌리시 여행을 어렵게 하는 것이 단 하나 있었는데 이는 화장실의 부재였다.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올드 타운이나 쿠라강 근처에서 공중화장실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 급할 때면 불필요하게 매출을 올려주더라도 카페나 레스토랑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여행자를 위한 도시라고 하더라도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다.

Travel Info

·찾아가기: 인천공항에서 조지아 트빌리시까지는 직항이 없다. 러시아 모스크바를 경유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 비행기를 타면 인천에서 모스크바까지 8시간30분, 모스크바에서 트빌리시까지 3시간이 소요된다. 트빌리시 국제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방법은 37번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이용하는 두 가지 중 택하면 된다. 버스 요금은 한화 약 300원이며, 택시 요금은 한화 약 2만원이다. 공항에서 시내 중심가인 자유 광장까지는 한 시간여가 소요된다. 택시를 탄다면 시간은 단축될 것이다.

·여행하기: 자유 광장 중심에 관광안내소가 있다. 트빌리시 관련 여행 정보나 지도, 지하철 노선도 등의 자료를 쉽게 구할 수 있고 영어로 친절하게 여행정보를 상담 받을 수 있다. 은행보다 거리에 있는 환전소의 외화 환율이 오히려 더 좋다. 도심 산책의 시작은 리버티 스퀘어역에서 시작되며 자유 광장을 지나 올드 타운, 쿠라강, 나리칼라 성까지 한 시간 내로 접근이 가능하다. 트빌리시의 기차역은 지하철 스테이션 스퀘어역과 연결되며, 시외 버스 터미널은 스테이션 스퀘어역과 디두베(Didube)역, 삼고리(Samgori)역, 이사니(Isani)역 네 곳에 위치한다. 스테이션 스퀘어역에 있는 시외 버스 터미널이 가장 규모가 크다. 시내에서 택시를 이용할 때에는 미터기가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타기 전 미리 금액을 물어보거나 제시한 뒤에 타야 한다.

[글과 사진 추효정(프리랜서 여행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530호 (16.05.3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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