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위엔 항아리, 발밑엔 돌부리.. 이런 문 만든 이유

정만진 입력 2016. 5. 2.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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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서원] 임진왜란과 사화의 역사를 되새기게 해주는 사적 488호, 도동서원

[오마이뉴스정만진 기자]

 도동서원 앞 은행나무의 여름과 가을 모습. '김굉필 나무'라는 이름을 얻은 이 나무는 그의 외증손인 정구가 1607년에 심은 것으로 알려진다.
ⓒ 정만진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 35번지에 있는 도동서원은 소수서원, 병산서원, 도산서원, 옥산서원과 더불어 우리나라 5대 서원으로 꼽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다섯 서원이 모두 대구, 경북에 있다는 사실이다. 도동서원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소수서원은 경상북도 영주, 병산서원과 도산서원은 안동, 옥산서원은 경주에 있다.

이들 5대 서원들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끄떡없이 건재했다. 물론 그때 살아 남은 서원이 전국적으로 47곳이었으니 5대 서원들이 훼철되지 않은 것이야 놀랄 일도 아니다. 서론의 요지는 '김굉필(1454~1504)을 기리는 도동서원은 우리나라 5대 서원 중 하나로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원 철폐

조선의 대표적인 사학 교육기관인 서원의 효시는 1543년(중종 38) 주세붕이 설립한 백운동서원이다. 이 서원은 1550년(명종 5)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현판)과 소유 농토를 받아 최초의 사액(賜額)서원이 된다.

서원은 인재 양성과 선현 배향, 유교적 향촌 질서 유지 등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한다. 하지만 차차 당파 형성, 백성 토색, 지방관청 압박 등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703년(숙종 29) 서원 설립 금지 조치가 내려지고, 1741년(영조 17)에는 1714년 이후 건립된 서원을 훼철한다. 하지만 기존 서원의 폐단은 더욱 심해졌다.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은 왕권 강화, 민폐 척결, 국가재정  건실화를 목표로 서원 철폐를 시작한다. 결국 전국 650개 서원 중 47개 서원만 남고 모두 훼철된다.

도동서원의 상징이 된 '김굉필 (은행) 나무'

다람재에 올라 도동서원 전경을 먼저 감상한다. 낙동강을 휘감아 끼고 있는 도동서원의 경치가 보는 이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김굉필의 한시 '노방송(路傍松)'과, 그것의 번역문을 새겨둔 시비를 읽고 난 후 넘어질 듯 급하게 엎어지는 내리막길을 걷는다.

그런데 도동서원에 닿으면 눈길이 온통 거대한 은행나무로 쏠려버린다. 도동서원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살아남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지라도, 서원보다 은행나무에 더 관심이 몰리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5대 서원 중 한 곳을 찾아 와서, 그것도 사적 488호인 도동서원에 와서 역사유적도 문화유산도 아닌 한낱 나무에 마음을 빼앗기다니!

서원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김굉필 나무'부터 먼저 둘러본다. 아름드리 거목이 수많은 가지를 땅으로 드리운 채 짙은 그늘을 만들어내고 있는 여름이나, 햇살과 바람 속에 숨어 있는 자연의 빛깔을 담뿍 품은 노란 잎사귀가 사방으로 흩날려 멀리서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뒤흔드는 가을이나, 이 은행나무는 참으로 사람들에게 전원의 경이를 깨닫게 해준다. 누가 '현대인은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정의했던가! 은행나무 한 그루 없는 곳에서 태어나 자란 도시인도 이곳에 오면 자신도 모르게 '귀거래'의 정서에 듬뿍 젖고 만다.

 은행나무 사이로 도동서원의 정문인 수월루가 보이는 풍경.
ⓒ 정만진
하지만 1607년에 식목된 이 은행나무는 평범한 거대 고목이 아니다. 깊고 큰 한이 서려 있는 '역사의 나무'이다. '김굉필 나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것으로도 짐작이 되는 일이지만, 이 나무에는 사화(士禍)의 붉은 피가 짙게 배어 있다. 나무의 주인 김굉필이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사형되었고, 나무를 심은 정구(1543~1620)가 김굉필의 외증손인 까닭이다.

도동서원에서는 사화를 돌이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사화의 처음은 1498년, 연산군이 이미 죽은 김종직을 무덤에서 꺼내어 목을 베는 처참한 부관참시에서 시작된다. 연산군은 이때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 등을 죽일 뿐만 아니라 많은 선비들을 귀양 보낸다. 이를 무오사화라 한다.

발단은 (항우가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일을 비판함으로써) 수양이 임금 자리에 오른 일을 에둘러 부정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성종실록에 실린 일이었다. 김종직이 이 글을 쓴 때는 1475년으로, 1498년의 무오사화 때는 그가 이미 죽은 뒤였으니, 사화가 일어난 해는 그가 세상을 떠난 때로부터도 8년, '조의제문'을 쓴 때로부터는 23년의 긴 세월이 흐른 후였다.

스승 김종직은 무오사화 때 부관참시, 제자 김굉필은 갑자사화 때 사형

하지만 계유정난(수양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한 1453년 사건) 때 공을 세워 벼슬을 차지한 훈구파 세력은 "계유정난을 헐뜯는 것은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해온 임금들의 정통성을 문제삼는 반역 행위이니 전하(연산군)의 폐위를 선동하는 짓이나 다름 없습니다." 식으로 연산군을 부추겼다. 연산군은 반대편 사림파 선비들을 죽이고 유배를 보냈다. 이때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도 귀양을 갔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504년, 연산군은 다시 사화를 일으킨다. 갑자사화이다. 자신의 어머니인 윤씨가 1479년(성종 10) 왕비 자리에서 쫓겨나 그 이듬해에 죽임을 당한 일을 두고 연산군이 보복을 하면서 발생한 사화였다. 이번에도 사림파들이 대거 피해를 입었다. 김굉필은 이때 사형을 당했다. 김굉필 선생의 묘소는 도동서원 뒤편 산자락에 있다.

 도동서원 전경
ⓒ 정만진
서원 안내판을 본다. 역사유적이나 문화유산 앞에 왔을 때는 당연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여러 해 전에 도동서원을 방문했던 사람은 새로 세워진 안내판을 보며 약간 놀라게 된다. 서원의 이력이 언제부턴가 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2011년 1월 3일 방문하여 찍은 안내판 사진은 서원의 내력을 '이 서원은 본디 비슬산 기슭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1605년(선조 38) 현재 자리에 다시 세우고 보로동서원이라 불렀다. 1607년(선조 40) 도동서원이란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賜額)서원이 되었다.' 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보는 안내판에는 '이 서원은 선조 1년(1568) 쌍계서원이란 이름으로 현풍 비슬산 기슭에 세워졌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그 뒤 선조 37년(1604) 보로동서원이란 이름으로 지금 자리로 옮겨 다시 세웠으며, 광해군 2년(1610) '도동(道東)'이라는 사액을 받았다.'로 내용이 바뀌어 있다. 현 위치에 재건된 시기가 1605년(선조 38)에서 1604년(선조 37)으로, 사액서원이 된 때가 1607년(선조 40)에서 1610년(광해군 2)으로 수정되어 있는 것이다.

도동서원이 사액된 때는 1610년, 나무가 심어진 때는 1607년

그렇다면 '김굉필 나무'의 이력에 대한 지식도 이제 바뀌어야 마땅하다. 종전에는 보로동서원이 도동서원으로 '사액된 사실을 기념하여' 정구 선생이 '1607년'에 나무를 심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식목을 한 1607년은 광해군이 보로동서원에서 도동서원으로 바꾸라고 서원 편액(額)을 내려준(賜) 1610년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 나는 속으로 '정구 선생은 사액을 기념해서가 아니라 사화와 임진왜란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나무를 심은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도동서원 배치도
ⓒ 정만진
'서원의 정문인 수월루(위 배치도의 10) 아래 외삼문(外三門, 서원 바깥으로 통하는 세 개의 문)과 환주문(16, 喚主門, 주인을 부르는 문)을 지나면 강당(講堂, 강의를 하는 집)인 중정당(5)과 유생들이 기거하던 동재(7)와 서재(8)가 있다. 중정당 오른쪽 건물은 서원 관리인이 살았던 전사청(6)이고, 왼쪽 뒤편의 건물은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던 장판각(4)이다. 중정당 뒤편에 있는 돌계단을 오르면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2, 內三門, 경내에 있어 사당으로 출입하는 세 개의 문)과 사당(1, 祠堂, 제사를 모시는 집)이 있으며, 내삼문 오른쪽에는 제기(제사용그릇)를 보관하는 증반소(3)가 있다.

도동서원은 수월루에서 높은 곳을 따라 환주문, 중정당, 사당을 일직선상에 두고, 앞에는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講學, 강의와 학습) 영역, 뒤에는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 앞은 공부하는 공간, 뒤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 구조이다. 또한 흙과 기와로 쌓아 만든 담장을 둘러서 검소하고 단아하면서도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는 점에서 한국 서원 건축의 전형을 보여준다.'

안내판의 해설과 건물 배치도를 견줘가며 도동서원을 둘러볼 여정을 짠다. 정문인 수월루 아래 외삼문에서 출발하여 사당 앞 내삼문까지 돌아보는 길은 자연스레 '(10) 수월루, 외삼문 - (16) 환주문 - (7, 8) 동재와 서재 - (5) 중정당 - (2) 내삼문' 순서가 된다. 물론 좀 더 정밀하게 둘러볼 답사자는 이 여정을 '(10) 수월루, 외삼문 - (16) 환주문의 높이, 절병통, 문턱의 돌, 담장 - (7, 8) 동재와 서재 - (5) 중정당의 구조, 기단의 돌들, 용과 거북, 건물 오른쪽의 생단 - (2) 내삼문' 식으로 보강할 일이다.    

 도동서원은 정문인 수월루의 중앙과 강학 공간으로 들어가는 환주문의 중앙, 그리고 강당인 중정당의 중앙이 일직선을 이룬다. 사진은 수월루에서 바라본 환주문이다. 이곳에서는 문의 높이, 지붕 위의 항아리 모양 기와, 문턱의 돌, 그리고 문 좌우로 이어져 있는 담장(이 담장은 국가 보물이다!)을 유심히 보아야 한다.
ⓒ 정만진
강학 영역으로 들어가는 환주문은 규모가 아주 작다는 것이 첫째 특징이다. 높이가 채 169cm도 안 된다. 갓을 쓴 선비라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 고개를 숙이지 않고는 안으로 들어설 수가 없다. '이곳은 학문을 연마하는 신성한 공간이니 함부로 속된 세상의 권세를 뽐내려고 들지 말라'는 경고를 낮은 문 높이로 말없이 던지고 있는 것이리라. 향교와 감영 등의 하마석(下馬石)과는 견줄 수 없는 품위를 환주문은 보여주고 있다.   

교육기관을 출입할 때는 누구든 자세를 낮추라

환주문의 두 번째 특징은 (아래 사진 왼쪽 위의 동그라미에서 보듯이) 지붕 위에 항아리 모양의 장식용 기와 절병통(節甁桶)이 얹혀 있고, (아래 동그라미에서 보듯이) 문턱 위치에 꽃봉오리가 새겨진 돌을 박아 두었다는 점이다. 이 역시 천방지축으로 뛰지 말고 천천히 서원 안으로 들어오라는 무언의 가르침일 것이다. 머리 위에서 항아리가 굴러 떨어질지도 모르고, 발가락에 돌부리가 부딪힐지도 알 수 없는데 누군들 이곳에서 잠깐 호흡을 고르지 않겠는가. 향교와 감영 등지의 하마석(下馬石)과는 결코 견줄 수 없는 환주문의 품위 넘치는 '명령'을 들으며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사진, 왼쪽) 환주문 위에 얹힌 항아리 모양의 장식용 기와 절병통(위의 동그라미)과, 꽃무늬가 새겨진 예쁜 돌이 문턱에 놓인 모습(아래 동그라미), (사진, 중앙) 강당 기단에 박힌 용이 머리만 내민 채 여의주를 물고 있다. (사진, 오른쪽) 제사에 쓰일 음식물을 점검하는 생단
ⓒ 정만진
 도동서원의 담장은 국가 보물로 지정된 '흔하지 않은' 담장이다.
ⓒ 정만진
환주문 앞에 잠시 멈춰선 채 서원을 둘러싼 담장을 감상한다. 그냥 '본다'고 하지 않고 '감상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곳 담장이 강당 중정당과 더불어 국가 보물 350호로 지정되어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담장의 벽은 암키와와 수막새를 무늬를 만들며 어우러게 배치하여 음양오행설을 반영하고 있고, 담장의 높이는 놓인 땅의 고저와 각도에 상하좌우로 부드러운 선을 연출하고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가 펴낸 <답사여행의 길잡이 - 팔공산 자락>은 "(도동서원의) 이 담장이 지형에 따라 꺾이고 높낮이가 바뀌며 만들어내는 담장 면의 변화와 담장 지붕이 그리는 스카이라인은 우리 건축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눈맛을 준다."고 격찬한다.

 도동서원 강당
ⓒ 정만진
환주문을 지나면 강당인 중정당의 뜰이 펼쳐지고, 마당의 양 끝에 동재와 서재가 놓여 있다. 방위를 기준으로 보면 동재가 중정당의 서쪽에 있고, 서재가 동쪽에 있는데 어째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우리나라의 집들이 대체로 남향인 까닭에, 사람이 건물을 등지고 섰을 때 좌측이 동쪽이고 우측이 서쪽이다.

도동서원은 북향이다. 그래서 도동서원은 자연의 방위가 아니라 사람을 기준으로 좌측 즉 서쪽의 건물을 동재, 우측 즉 동쪽의 건물을 서재라 이름붙였다. 담장이 암키와와 수막새를 넣어 쌓아 음양오행설을 반영했듯이, 동재와 서재의 호칭 또한 '인간의 인식을 우위에 두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드러내기 위해 자연의 방위와 반대로 정해진 것이다.

 강당 기단이 제각각 크기와 빛깔이 다른 돌들로 짜맞추어져 있어 특이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도동서원 강당은 국가 지정 보물이다.
ⓒ 정만진
중정당 앞에 서면 건물을 받치고 있는 기단이 '경탄' 그 자체이다. 기단을 이루고 있는 돌들이 하나같이 크기가 다르다. 기단의 돌들은 네모난 것에서부터 육각형, 심지어 십이각형까지 제 각각 모영이 다르다. 그것들이 절묘하게 서로 각을 맞추어 튼튼한 기단을 구축하고 있다. 동일한 재질, 동일한 규격의 사각형 석재로 쌓은 흔하디 흔한 건물 기단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어디 그뿐인가! 돌들은 빛깔까지도 모두가 서로 다르다. 돌들은 제 각각 쑥빛, 연한 잿빛, 엷은 가짓빛 등등 말 그대로 다채로운 색감을 뽐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한데 어울려 기단 전체를 하나로 형상화해내고 있다. 조화의 극치다.

크기도 빛깔도 다른 돌들로 건축된 강당 기단의 아름다움

데포르마시옹(deformation, 대상이나 소재가 되는 자연물을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고 주관적으로 바꾸어 표현하는 미술 기법)의 기막힌 변형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도동서원 강당 기단을 찾으라! <답사여행의 길잡이>는 "(도동서원 강당의) 기단이 가진 색감은 조각보에도 몬드리안에도 없는 이 기단 고유의 것"이라면서 "빛깔들이 농도를 달리하며 만들어내는 은은한 색감과 그 조화는 어떤 화려한 빛깔로도 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나라 건축물 가운데 이만큼 아름다운 기단을 가진 것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라고 경탄한다.

 도동서원의 강당 내부
ⓒ 정만진
이제 도동서원에서 볼 수 없는 문화유산 한 가지를 언급할 차례다. 임진왜란 의병장(초계군수) 곽율, 곽승화, 배신, 원개 등을 모시던 별사(別祠)다. 중정당 뒤편의 사당은 보통 문이 잠겨 있어 안을 볼 수 없지만, 별사는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이후 아예 사라지고 없어 역시 볼 수가 없다.

물론 도동서원의 원형인 쌍계서원도 볼 수가 없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들이 불태워 없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도동서원은 사화 유적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同心)' 임진왜란 유적이다. 그래서 침략군들이 불사른 폐허를 딛고 일어나 다시 세워졌고, 서울의 동쪽에서 김굉필을 모시고 있는 서원이라 하여 임금으로부터 "(유학의) 도(道)가 동(東)쪽에 있구나!" 하는 찬탄과 도동(道東)서원 사액을 받았던 것이다.

임진왜란과 사화 등을 잊지 않는 사람, 몇이나 될까

사람의 길(道)은 어디에 있는가? 세상을 떠난 지 510년도 더 되었지만 김굉필은 도동서원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다람재 정상에 '노방송' 시비를 남겨 우리에게 대답을 들려준다.

一老蒼髥任路塵
勞勞迎送往來賓
歲寒與爾同心事
經過人中見幾人

한 그루 늙은 소나무 길가에서 먼지 맞으며
괴로워도 오가는 길손 맞이하고 또 보내네
찬 겨울에도 너처럼 변하지 않는 마음
지나가는 사람 중에 몇이나 보았을까

 도동서원의 사당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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