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 아래서 다시 떠오른 라스베이거스의 악몽

입력 2014. 12. 18. 21:33 수정 2014. 12. 18.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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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 쓰고 떠난 세계일주 74] 미국 유일의 열대우림? 올림픽내셔널파크

[오마이뉴스 김동주 기자]

시애틀에 머무른 삼 일간 레드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다. 운전대를 잡는 것도, 우리가 갈 목적지를 지도로 확인하는 것도, 하다못해 호텔 앞 마트에서 맥주 한 캔을 사는 것도 한사코 직접 했다. 하긴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내가 녀석을 만나 몇 번이나 웃었는가를 생각해보니 녀석의 과잉보호가 괜한 행동은 아니었다.

올림픽내셔널파크로 가던 그날도 그랬다. 장장 세 시간은 걸릴 거리건만 녀석은 절대로 운전대를 내어주는 법이 없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한국과는 다른 내비게이션이었을까. 분명히 구글 지도로 확인한 국립공원의 위치는 시애틀의 남서쪽, 캐나다와 미국 사이를 가로지르는 해협을 남쪽으로 빙 둘러가야 했다. 그런데 막상 출발을 하고 보니 내비게이션은 시애틀의 북쪽을 가리켰고,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안내선이 표시됐다. 우리는 그것이 해협을 가로지르는 다리임을 의심치 않았다.

바다 위를 건너라고?

▲ 바다를 건너는 선착장

- 뜻밖에도 네비게이션이 우리를 안내한 곳은 반도를 둘러가는 도로가 아닌, 바다를 건너는 선착장이었다.

ⓒ 김동주

그러나 뜻밖에도 그곳은 배를 타는 선착장이었다. 우리가 다리라고 믿었던 그 이정표는 뱃길이었던 것이다. 헛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어떻게 된 내비게이션이 뱃길을 안내한단 말인가. 한겨울의 일요일이던 탓에 배는 고작 하루에 한두 대가 있을 뿐, 진입로도 막혀있고 거리에는 사람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 라스베이거스에서의 악몽이 떠올랐다. 5시간을 꼬박 달려서 도착한 그랜드캐니언에는 유례없이 굵은 비가 며칠째 쏟아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큰 사고없이 7개월을 여행하면서 그간의 운을 다 써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결국 다시 차를 돌려 남쪽으로 해협을 돌아 국립공원 입구의 관광안내소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이미 2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5시간 운전, 3시간 관람

"와, 이렇게 늦은 시간에 방문하는 손님이라니 드물군요. 날씨도 좋지 않은데…."

예상대로 손님은 우리뿐이었고, 내비게이션 때문이라고 볼멘소리를 하자 직원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면적이 무려 3600㎢에 달하는 올림픽내셔널파크는 말이 국립공원이지 제주도 면적의 두 배다. 캐나다와 국경을 가로지르는 해협 아래 반도를 형성한 이 국립공원은 미국 전역에서 가장 비가 많은 지역으로, 한겨울에도 며칠씩 비가 쏟아져 1년 내내 우림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 곳을 달랑 승용차 한 대 끌고 이미 오후가 한참인 시간에 도착했으니 말이다.

▲ 올림픽내셔널파크 관광안내소

- 입구에 있는 관광안내소에서는 지도와 함께 각 트레킹코스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들을 수 있다. 국립공원의 계절별 파노라마 영상을 담은 비디오도 수시로 상영한다.

ⓒ 김동주

간단한 설명을 마친 관리인은 내가 지도의 특정 부분을 손으로 가리킬 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은 채 4시간이 남지 않았고, 일부 눈길과 빙판길은 승용차로는 무리였다. 결국 우리는 그 엄청난 빙하를 홍보용 비디오를 통해 볼 수밖에 없었다.

영상은 공원을 달리는 차로 시작했다. 달리는 내내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모두 아름다운 한 장의 그림엽서였다. 길가의 낮은 판자 건물들도, 숲 속의 별장 같은 집도, 뜰엔 잘 가꿔진 온갖 꽃들이 눈길을 머물게 해 지루한 줄 몰랐다. 산의 봉우리에 오르자 본격적인 빙하지대가 시작되고 화면은 헬리콥터로 바뀌었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험한 산길과 천 길 낭떠러지 사이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오르면 올림픽국립공원의 하이라이트라는 허리케인 힐(Hurricane Hill)에 닿는다. 만년설을 봉우리에 얹은 채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그 모습에 나는 눈을 감고 파타고니아의 엘찰튼을 떠올렸다. 마치 까마득히 옛날일 같은 그때를 떠올리고 있으려니 관리인이 지도를 펼쳐 보이며 한 곳을 찍었다. 레이크 크레센트(Lake Crescent), 그곳은 남은 세 시간여 동안 우리가 닿을 수 있는 유일한 숲이었다.

빙하 속에 자라는 열대우림

오랜 여행자의 미덕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내심 불편했다. 이 먼 곳까지 와서 하이라이트는 허리케인 릿지(Hurricane ridge)와 호 우림(Hoh rain Forest)을 보지 못한다니….

"걱정 마세요. 크레센트 호숫가로 나 있는 트레킹 코스에서도 우림을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관관안내소 관리인은 그렇게 말했지만 국립공원 안은 모든 것이 고요했다. 사방이 숲으로 둘러 쌓였지만 우림과는 거리가 먼 차가운 기온의 침엽수뿐이었고, 오전까지 계속된 비로 자욱한 안개만이 피어 나고 있었다. 빙하를 얹은 봉우리는 호수에서 피어난 안개에 가로막혔고 산허리의 눈은 계속된 모조리 녹아버렸다. 어쩐지 으슬으슬한 느낌마저 들었던 그 넓은 공원에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은 우리들뿐인 것만 같았다.

▲ 회색빛 강

- 올림픽내셔널파크 안의 곳곳에는 크고 작은 강이 형성되어 있는데 위로는 눈 덮힌 산, 좌우로는 뾰족한 침엽수림, 강위로는 안개가 피어나 겨울철이면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 김동주

작은 개울가를 지나다 차를 세운 그곳에서 나는 영화 속의 폐허가 된 지구를 떠올렸다. 모든 것이 원시로 되돌아 가버린 지구에는 한 차례 빙하기가 찾아오고 그 틈 속에서 생명력을 잃지 않은 것은 끝이 뾰족한 침엽수뿐이다. 무언가에 타버린 듯 나뒹구는 시커먼 나뭇더미 탓에 빙하가 녹아 생긴 강은 검고 잿빛이다.

▲ 크레센트 호수

- 빙하기가 끝나고 녹아내린 빙하는 대부분 바다로 흘러나가고, 남아 있는 강물이 모여 거대한 호수를 만들었다.

ⓒ 김동주

녹아내린 빙하가 산자락을 따라 바다로 흘러나가고, 남은 것들은 거대한 호수 크레센트호를 만들었다. 사람의 흔적이 닿지 않은 오랜 세월 동안 바닥 깊숙이 뿌리 내린 호숫가의 나무와 돌은 이끼들의 차지가 되었다. 눈이 녹고 황금빛 햇빛이 쏟아지는 여름이었다면 분명히 에메랄드 빛 파란색을 뿜어냈을 호수의 곳곳에서는 마치 연기가 피어나듯 안개가 솟아나고 있었다.

문이 굳게 닫힌 방문자 센터를 기웃거리다 옆으로 나 있는 길을 발견한 우리는 별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으로 이것이 끝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 앞에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길이 열릴 줄은 레드도 나도 예상치 못했다.

▲ 올림픽내셔널파크의 우림

- 뾰족한 침엽수들이 사라지고, 털뭉치 같은 녹색 이끼를 두른 그곳은 한발 한발 내딛는 것이 조심스러울 정도로 전혀 다른 세상 같았다.

ⓒ 김동주

농담처럼 한 이야기지만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길'은 올림픽내셔널파크에 있는 냉대 우림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다. 온통 침엽수로 둘러싸인 도로를 벗어나 축축한 숲길로 접어든 그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땅은 온통 이끼로 뒤덮여있고, 안개와 더불어 스산한 분위기를 만들던 침엽수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미역이라도 매단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끼를 두른 나무가 초록색 털 뭉치 같은 가지를 늘어뜨린 채 빽빽이 들어섰다. 추운 곳에서 자라는 침엽수와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활엽수의 공존하고, 빙하와 우림이 공존하는 곳. 사람들은 이 신비로운 곳을 가리켜 냉대림(Cold Rainforest)은 신묘한 단어를 만들어냈다.

- 녹색 이끼와 양치식물들이 젖은 땅을 온통 뒤덮은 그곳은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어 더욱 신비감을 자아냈다.

ⓒ 김동주

숲이 깊어질수록 나무들은 화려해져만 갔다. 언제나 그렇지만 지나치게 놀라운 광경을 보면 의문조차 들지 않는다. 내가 궁금한 것은 이토록 놀라운 곳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레드와 나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유일하게 살아있다고 느낄만한 것은 마치 버섯처럼 나무 틈새에 자리 잡은 이끼들과 진흙 길 주변의 양치식물뿐이었다.

거친 사막과 기암괴석, 협곡이 펼쳐지는 미국 서부의 풍광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수백 년간 뿌리를 내렸을 오랜 나무들이 뿜어내는 기운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어디선가 반인반수가 나타나 잠시 몸이나 녹이라며 인사를 건네도 전혀 어색할 것 같지가 않다. 2차 세계대전 피난 중에 들른 시골집의 옷장을 열었더니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는 영화 속 이야기는 진짜인지도 모른다.

▲ 젖을 주는 나무

- 너스로그(Nurselog) 라고 불리는 오래된 고목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나무를 뜻한다. 1년 내내 습한 기후의 영향으로 나무가 쓰러진 자리는 어느새 이끼들이 싹을 틔우고 다른 나무의 영양분이 된다.

ⓒ 김동주

한참 길을 걷다가 쓰러진 나무들을 발견했다.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죽음을 맞이한 나무에는 어김없이 이끼들이 싹을 틔웠다. 죽은 나무는 그렇게 새로운 생명의 터전이 될 것이다. 그래서 '젖을 주는 나무'(Nurselog)라고 부른다고 했다. 괜스레 감상적이 된 나는 문득 그녀를 떠올렸다. 내가 곁에 있었더라면. 마치 이 숲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이끼들처럼, 그래서 당신이라는 가지를 붙들어 좀 더 든든했었다면.

숲을 돌아 나오는 길에 나는 자꾸만 시계를 확인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이 신비로운 자연 속의 시간은 도시와는 다른 속도로 흐를 것만 같았다. 마침내 굳게 닫힌 레이크 크레센트 안내소(Lake Crescent Visitors Center) 앞에 섰을 때, 나는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스미는 여름을 상상했다. 야생의 자연에서 즐기는 캠핑과 빙하호를 누비는 카약킹, 그리고 허리케인 힐(Hurricane Hill)이라는 멋집 이름이 붙은, 눈으로 덮인 꼭대기에도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차가운 눈이 녹으면, 그때야말로 환상 속의 기이한 생명체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기어코 해가 지고 모든 것이 어둠에 묻힐 준비를 하던 그 시간에도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곤 했다. 그 신비로운 옷장이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간략여행정보

시애틀에서 올림픽 국립공원으로 향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육로와 배를 이용하는 것이 무난하다. 항구에서 크루즈로 30분 거리의 베인브릿지 섬을 거쳐 포트엔젤리스, 세큄을 지나 3시간이 넘게 달려야 만날 수 있다. 시애틀 면적의 10배에 이르는 올림픽내셔널파크를 하루 만에 돌아보기란 불가능하며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여름철에 며칠간 숲 속에서 캠핑을 하며 머물러야 한다.

반도 내에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숲이 많지만,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은 호 우림(Hoh Rainforest)과 허리케인 힐(Hurricane Hill)이다. 이끼를 털 뭉치처럼 두른 냉대 우림이 펼쳐진 호 우림은 비교적 짧은 트레킹으로 올림픽내셔널파크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허리케인 힐은 해발 1600m 전망대까지 차로 오를 수 있지만, 겨울철에는 길이 닫히는 날이 대부분이니 사전 확인이 꼭 필요하다. http://www.nps.gov/olym/index.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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