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짓는 연기 안 보이게'.. 낮은 굴뚝에 담긴 배려

2014. 9. 1.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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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정봉 기자]

무주 지전마을에서 거창 황산마을은 그리 멀지 않다. 시간에 쫓겨 지전마을에서 되돌아와 이제야 황산마을을 가게 되었다. 한 번에 돌지 못하고 쪽잠 자듯 '쪽여행'을 하게 됐다. 길이 새로 나 가까워졌다 해도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에게는 별 소용없다.

▲ 황산마을 정경

황산마을 중 큰땀마을의 정경. 지붕끼리 촘촘히 어깨를 나누고 있는 것이 딱 봐도 부농마을이다

ⓒ 김정봉

지전마을 근처, 나제통문(羅濟通門)에서 시작하였다. 물론 잘못 알려진 것이지만 백제와 신라, 전라도와 경상도를 넘나드는 상징적 문이어서 그러고 싶었다. 전라도와 경상도, 도만 다를 뿐 무주와 거창은 예전에 모두 백제 땅이었는데 공연히 부산을 떨었다.

▲ 나제통문

무주 지전마을 근처에 있다. 일제강점기 때 무주-김천 길을 낼 때 뚫은 바위터널. 대개 백제와 신라를 잇던 통문으로 오해하고 있다

ⓒ 김정봉

아름답기로 소문난 길, 나제통문에서 무주구천동 계곡 따라 굽이굽이 넘어가면 거창. 덕유산을 중심으로 무주와 거창은 이쪽 저쪽에 있다. 경상북도로 착각하기 쉽지만 경상남도다. 위로 전라북도 무주와 접해 있고 동쪽으로 대구, 남으로는 함양, 산청으로 통한다.

황산마을의 뿌리, 원학동 이야기

거창 중에 무주를 향해 제일 먼저 코 내민 곳이 위천면이고 위천의 중심에 원학동(猿鶴洞)이 있다. 조선선비의 자취가 다닥다닥한 화강암 덩어리, 수승대가 가운데 있고 그 주변에 정자와 서원이 있어 자연풍광은 물론 인문적 깊이 면에서 거창에서 제일이다. 함양의 화림동(花林洞), 안의의 심진동(尋眞洞)과 함께 안의삼동(安義三洞) 중의 하나다.

원학동에 기대어 대대로 살아온 집안이 있다. 거창신씨와 은진임씨. 거창신씨는 중종 때 사람, 요수 신권(?權)이 벼슬을 마다하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그 후손들이 황산마을에 뿌리를 내렸다. 임씨 집안은 원학동계곡 상류, 북상면에 터 잡고 집성촌을 이루었다.

▲ 수승대

원학동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거북처럼 보인다하여 거북바위라 불린다

ⓒ 김정봉

두 집안은 수승대를 두고 갈등을 빚었다. 수승대에 영역표시 하듯 새겨진 이름과 문구, 시구 등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수승대(搜勝臺) 원래 이름은 수송대(愁送臺). 근심을 멀리 떨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곳에서 백제가 신라로 사신을 보내면서 수심(愁心)으로 전송(餞送)하여 '수송'이라 했다는 말도 있다.

퇴계는 이런 의미의 수송대는 좋지 않다하며 수승대로 고쳐 부를 것을 권하는 개명시(改名時)를 신권에게 남겼다. 그는 이를 덥석 받아들이며 화답시를 지었고 신씨 집안은 퇴계의 시를 수승대에 새겼다.

이에 임씨 집안 선비, 갈천 임훈은 직접 와보지도 않고 이름을 고쳐 부르라한 퇴계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며 시를 지어 수송대 바위에 새겼다. 수승대에 얽힌 퇴계, 요수, 갈천의 이런, 저런 시가 이 바위에 새겨져 바위는 성한 곳이 없다. 퇴계의 영향력은 대단하여 여기를 찾는 조선 선비 모두 퇴계의 개명시를 찾았다 한다. 500년 지난 지금 나도 오자마자 개명시를 찾아 카메라에 담았으니 퇴계의 권위는 아직 유효하다.

▲ 수승대 글씨들

퇴계, 요수, 갈천의 싯구와 임씨·신씨 집안의 이름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바위는 성한 곳이 없다. 오자마자 퇴계의 개명시를 찾았으니 퇴계의 권위는 아직 유효하다

ⓒ 김정봉

수승대를 스치는 물을 보고 있으면 세상근심(愁)이 물에 씻겨나가는(送) 듯하다. 퇴계가 직접 보고나서도 이름을 바꾸려 했을까? 아름다운 경치를 찾는다는 의미의 '수승'은 주인이 아닌 객이 보는 관점으로 아무런 감흥이 없다. 이제라도 다시 수송대 이름을 되찾아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수송대 이름에 한 표 행사하겠다.

신씨 집안은 요수 신권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고 있다. 신권은 원학동 곳곳에 자취를 남겼다. 수승대 양옆에 요수정(樂水亭)과 구연재(龜淵齋)를 지어 수승대의 주인 노릇을 하였다. 구연재는 후대 구연서원(龜淵書院)이 되었다.

▲ 요수정 정경

요수 신권이 언덕에 지은 아담한 정자. 신권이 이곳에 터 잡은 후 착착 뿌리를 내리고 있다

ⓒ 김정봉

서원의 문루(門樓)는 관수루(觀水樓), 턱하니 한 발은 바위에 걸친 채 추녀를 받치고 못생긴 아래 기둥은 춤추 듯 휘어졌다. 발갛게 얼굴 붉힌 배롱나무가 구연서원의 민낯을 가리고 있는데 남도의 나무, 이 배롱나무를 보고 남도에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창은 경상남도였지!

▲ 구연서원과 배롱나무

붉게 달아오른 남도의 꽃, 배롱나무를 보니 거창은 역시 경상남도 구나 느끼게 된다

ⓒ 김정봉

500여 년 전, 신권이 원학동에 터 잡은 후, 후손 신수이는 300년 전, 수승대 길 건너편, 황산마을에 들어와 마을을 번창시켰다. 거창신씨가 황산을 포함하여 원학동을 세거지로 삼은 것은 이제 500년이 된 것이다. 황산마을의 뿌리를 보았으니 이제 줄기와 잎을 볼 차례다.

황산마을의 무던한 토석담과 예쁜 꽃담

마을 언덕배기 느티나무 한 그루. 햇빛에 부셔 검게 보이는데 그 위용이 대단하다. 600년 먹었다는데 번창한 신씨 집안을 대변하 듯 가지와 잎이 무성하다. 언덕에 올라가 보았다.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논밭, 신씨의 세거지다운 땅이다. 500년 전통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 황산마을 느티나무

600년 먹었다는데 번창한 신씨 집안을 대변하듯 가지와 잎이 무성하다

ⓒ 김정봉

터 좋은 곳에 물이 빠질 리 없다. 뒷산 호음산에서 흘러내린 실개울, 호음천이 마을을 둘로 갈랐다. 서쪽은 큰땀(황산1구)마을, 동쪽은 동녘(황산2구)마을이다. 큰땀마을은 50여호 모두 기와집, 부농마을이고 동녘마을은 여느 농촌마을과 같다.

개울 따라 들어선 기와집들, 담이 이어져 길이 되었다. 대문에 하나같이 대과댁, 산양댁, 정안당, 남정재... 이름표를 달고 있는데, 민박을 겸하고 있는 집들이다. 마을 정자 위에 올라섰다. 큰땀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붕끼리 촘촘히 어깨를 나누고 있는 것이 딱 봐도 부농마을이다. 누가 궂은 일, 농사일을 맡아 했을까? 옆 마을, 동녘마을에서 했다는 말이 있다.

이 마을담도 다른 산간마을처럼 토석담이다. 담 아래 부분은 막돌로 건성건성 쌓았다. 건성쌓기라 한다. 담이 숨 쉴 수 있도록 억지로 끼우지 않고 그냥 편안하게 놓아 쌓는다. 빗물을 잘 빠지게 하고 흙이 씻겨나가지 않도록 한 것이다. 막돌 위에는 흙을 반죽하여 돌과 함께 빈틈없이 차지게 쌓았다.

▲ 황산마을 토석담

여느 산간마을의 토석담처럼 무던하고 빛깔 좋다

ⓒ 김정봉

대과댁 외벽만 꽃무늬 꽃담이고 나머지 담은 무던하고 빛깔 좋은 토석담이다. 꽃담도 많이 있으면 질린다. 요새 새로 짓는 한옥담은 지나치게 화려한 꽃담으로 눈이 부신데, 이 마을 꽃담은 적당하여 눈이 피로하지 않다.

▲ 대과댁 꽃담

수로와 꽃담이 참 예쁘다. 이 마을은 이 꽃담 외에 원학고가 헛담 꽃담, 구연서원의 꽃담이 전부다. 꽃담이 많지 않아 오히려 눈이 피로하지 않다

ⓒ 김정봉

황산마을 원학고가의 낮은 굴뚝

원학동에 수승대가 있다면 황산마을에는 원학고가(猿鶴古家)가 있다. 원학동의 '원학'을 배타적으로 사용할 권리를 얻은 양 대문에 원학고가라 적었으니 이 고가가 황산마을 대표고가임에 틀림없다. 대갓집답게 정갈하다. 언제나 그러했듯 먼저 종부와 눈인사를 하고 집 구경을 하였다.

마당에 들어서자 왼편에 헛담이 보였다. 헛담으로 가린 것은 화장실. 화장실을 헛담으로 가린 것도 모자라 암키와와 수키와로 꽃무늬를 만들어 꽃담을 쌓았다. 능소화가 늘어져 꽃무늬가 없었어도 이 담은 이미 꽃담이었다.

마당에 깔린 자갈로 햇빛이 분산되어 눈이 피로하지 않은데 발걸음을 뗄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몸을 웅크리게 된다. 뒤뜰로 가보았다. 허세부리지 않은 키 작은 장독대와 사랑채 뒤편 낮은 굴뚝이 눈에 들어왔다. 마당에 깔린 자갈, 키 작은 장독대, 낮은 굴뚝 모두 몸을 낮추고 자만하지 말라고 조용히 알리고 있었다.

▲ 원학고가의 낮은 굴뚝

낮은 굴뚝은 밥 짓는 연기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하는 주인의 배려다

ⓒ 김정봉

굴뚝 연기는 따뜻한 방과 따뜻한 밥의 상징이다. 낮은 굴뚝은 밥 짓는 연기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하는 주인의 배려라 들었다. 낮은 굴뚝에서 나오는 낮게 깔린 연기는 해충을 없애는 기능도 하지만 그보다 배려의 의미가 강하다. 소작마을을 곁에 두고 있는 원학고가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더 절실했을지 모른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이 떠오른다. '유리잔에 물이 차면 물이 넘칠 줄 알았는데 마술처럼 어느새 유리잔이 다시 커져 넘치는 물이 없다'고 했다. 차지 않는 잔은 배려 없는 욕망의 잔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비집 낮은 굴뚝같은 배려의 정신이다. 곧고 키만 크면 뭐하겠나?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키듯 낮은 굴뚝이 이웃 살피는 것을...스마트하게 오마이뉴스를 이용하는 방법!☞ 오마이뉴스 공식 SNS [ 페이스북] [ 트위터]☞ 오마이뉴스 모바일 앱 [ 아이폰] [ 안드로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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