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 5천 받았지만.. 서울을 버렸습니다

2012. 9. 21.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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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조남희 기자]

제주도 군산에서 바라본 바다와 산방산(오른쪽). 하늘과 바다가 더없이 푸르다.

ⓒ 조남희

여기는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대평리 우리집. 벽에 기대 책을 읽고 있자니 벽의 진동이 느껴져 영 집중이 안 된다. 창문 밖 바람소리가 사람을 심난하게 만든다. 아차. 양초 사는 걸 잊었다. 지난번처럼 동네가 정전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온 놈은 태풍 '산바'. 제주로 '이민' 온 후 벌써 세 번째로 맞는 태풍이다.

지난 8월 31일, 태풍 볼라벤에 이어 온 덴빈의 비바람이 잦아든 후 밖에 나갔을 때, 집 근처 도로 아스팔트는 무너져 있었다. 공사장 펜스도 어디로 날아갔는지, 모두 자취를 감췄다. 큰길 곳곳에서 신호등은 허리를 꺾고 운명을 다한 채 널브러져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안덕면사무소로 향했다. 공무원에게 전입신고서를 내민 지 5분도 채 안 돼서 운전면허증 뒷면에 제주도 주소 한 줄이 추가되었다. 이로써 나는, 제주도민이 됐다.

내 나이 올해 서른 셋. 서울에서 나고 자란 평범한 직장인이었던(그래, 이젠 과거형이다) 내 주소지는 그동안 한 번도 서울을 벗어나지 않았다. 학생시절, 어학연수를 위해 중국에 머문 1년만이 내가 서울을 떠나 지낸 시간의 전부다.

세 번의 태풍, 호된 섬사람 신고식

8월 14일, 서귀포의 작은 어촌마을인 대평리에 연세 집을 구하고 입주했다. 대평리는 크고 넓은 들판이라는 뜻의 '난드르'라는 옛 지명을 가졌다. 올레길 8코스 끝자락에 있는 마을이다.

제주도 안덕면사무소에서 전입신고를 마쳤다. 어쨌든 나는 '법적으로' 제주도민이 됐다.

ⓒ 조남희

볼라벤이 서귀포를 강타했을 때, 나는 피난 아닌 피난을 가야만 했다. 낯선 집에서 홀로 무시무시한 태풍을 맞는 건, '육지 것'인 내게 무척 버거운 일이었다. 내가 피난 간 곳은 올해 여름까지 문턱이 마르고 닳도록 드나들고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 '곰씨비씨'였다.

태풍의 공포는 무시무시한 비바람 소리와 함께 지붕이 일부 깨져나가면서 시작되었다. 천정과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빗물 탓에 집 일부 바닥은 흥건했다. 창문에 < 영남일보 > , < 코리아헤럴드 > , < 서귀포신문 > 등등 대선 관련 지면의 박근혜와 김문수의 찢어진 얼굴 사진을 이어붙이며 비명 속에 퀭한 밤을 보냈다.

태풍 산바도 지났으니 이제 본격적인 가을날씨가 시작될 것이다. 얼마 안 있어 제주도는 길마다 억새가 가득할 것이고, 나는 여행자로 혼자 제주땅을 밟았던 2009년 가을의 풍경을 떠올리며 여기저기 쏘다니고 있을 거다.

직장생활 5년 차쯤 되었던 당시, 뭐가 그리 힘들었는지 훌쩍 혼자 떠났던 제주도여행. 지금처럼 동네마다 몇 개씩 게스트하우스가 들어서기 전이었다. 올레길을 걷거나 자전거로 일주하는 여행자도 많았지만, 나는 초보운전인 주제에 겁도 없이 렌터카를 빌려서 제주를 종횡무진 달렸다.

점심은 제주시에서 한라산소주에 멍게와 소라를 먹고 저녁은 서귀포 모슬포의 횟집을 찾아가는 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은 것이, 지금은 대평리에서 한시간을 운전해서 약 40km 떨어진 제주시까지 한 번 나간다는 게 '큰 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를 타고 잠실에 있는 집과 용산의 회사로 출퇴근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일이다.

그 후로 서울이 답답하게 느껴지면, 아니 틈만 나면 제주행 비행기표를 끊어댔고, 횟수를 거듭하면서부터 여행의 패턴은 고정돼 갔다. 금요일에 갔다가 일요일에 오는 한이 있어도, 무조건, 갔다. 그리고 어느새 대평리가 편해지니 마을에서 한 발자국도 뜨지 않고 있었다.

제주도 푸른 초원과 말. 평화로운 모습이다.

ⓒ 조남희

제주도 협재해수욕장. 맥주 한 캔 들고 망중한을 즐기기도 했다.

ⓒ 조남희

서울로 향할 때면 늘 초조... "누가 때리냐?"

서울로 돌아갈 비행기 시간이 다가오면, 보고 있는 사람이 초조해질 정도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도축장 끌려가는 소 마냥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했다. 그런 나를 보고 게스트하우스 주인장 언니들은 "서울 가면 누가 때리냐?"며 놀려댔다. 물론 때리는 사람은 없었다. 도돌이표 같은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을 뿐이다.

서울에서 사표를 던지기 직전, 직장생활 7년 동안 무얼 남겼나 생각해봤다. 허울 좋은 명함, '쏘맥'을 제조하는 갖가지 스킬과 소주와 맥주의 황금비율에 대한 감각, 그리고 만성적인 어깨의 통증과 뱃살. 물론 7년을 그냥 놀진 않았기에, 내 연봉은 어느덧 5000만 원이 넘었고 내년이면 진급이 확실했다.

표면적으로 볼 때, 나는 안정적인(?) 회사에서 적지 않은 연봉을 받으며 살아가는 서울여자였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거였다. 일요일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홍대 어느 술집에서 소주 한 잔을 앞에 두고 동일한 멘트를 날리고 있었다.

"선배, 출근하기 싫어서 미치겠어요."

"...나도 그래."

조직생활 15년이 다 되어가는 선배가 그랬다. 조직생활에 '나'란 있을 수 없다고. '나'여야 이 자리에서 이 일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누구라도 대체 가능하다고.

제주도 군산에서 바라본 하늘과 바다. 저 아래 보이는 마을이 내가 사는 동네 대평리다.

ⓒ 조남희

아침에 눈을 떠 출근을 하고, 야근 혹은 회식을 하고 집에 와서 잠깐 눈 붙이고 다시 아침에 눈을 떠 출근을 하고... 하루 24시간 중 내가 온전히 '나'로, 내 감성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지내는 시간은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하루하루가 지나서 한 달이 되고, 계절이 변하는가 싶으면 금세 일년이 또 지나서 '살아지게' 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와 동시에 이렇게 지내면 직급은 올라가고, 연봉은 더 많아지겠지만 그렇게 사십대를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삼십대의 나에게 미안하진 않겠느냐' '후회는 없겠느냐'라고 물었을 때의 답도 분명했다.

잠시 직장 생활을 돌아보자. 마지막으로 다닌 회사에서 인간관계와 실적에 대한 스트레스로 하루가 다르게 날이 섰고 사람들은 나를 볼 때마다 말라간다고 했다.(물론 얼굴만!) 스트레스는 자주 술로 직결됐고, 술은 다시 똥배로 진화했으며, 그 똥배는 다시 바지를 살 때마다 더 큰 좌절감을 내게 안겨줬다.

마약 같은 월급 끊고 얻은 자유... 결국 '선택'의 문제다

출근길에 내 차를 막고 선 이웃의 차에 종종 험한 말을 하고, 회사 교육시간에 앞자리에 앉은 상사의 뒤통수를 보며 '한 대만, 정말 한 대만 때려봤으면 소원이 없겠다'를 진지하게 되뇌는 나를 발견하면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조직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한 팀장은 '치사하고 드러워도' 기어야 할 존재지만, 조직이 아닌 곳에서 만났으면 좋은 '옆집 아저씨'도 될 수 있다는 걸. 그리고 내가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마약 같은 월급과 그걸 받기 위해 치러야 하는 주차전쟁, 출근전쟁 등은 서울에서 살 때나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더불어 이 모든 것은 결국 내 선택의 문제라는 것도 퍼뜩 깨달았다.

제주도 대평포구 쪽에서 바라본 박수기정. 해질녘에 보면 무척 아름답다.

ⓒ 조남희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깨달음을 얻기 훨씬 이전부터 제주도는 저 남쪽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 고민과 걱정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터. 그래도 용기를 냈고, 결단을 했다. 6월, 사표를 던졌다. 이로써 나는 서울에서의 7년 직장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곧바로 제주로 가는 배가 있는 전남 장흥으로 차를 몰았다. 날씨도, 기분도 좋았다. 전남 담양에서는 나 홀로 막걸리도 한 잔 했다.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전남 장흥에서 차를 싣고 성산포항으로 향했다. 몇 시간 뒤, 제주에 도착했다. 나는 혼자였다.

마약과도 같은 월급을 끊은 지 4개월. 금단 현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직 살만하다. 풀벌레 소리 들으며 잠들고 아침에는 파도소리를 듣는다. 지척에는 박수기정이 늠름하게 서 있고, 해질녘이면 녀석은 더욱 멋지다. 서울에서는 거의 해보지 않았던, "우리 동네 좋네!"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종종 나온다.

태풍 볼라벤에 벌벌 떨었던 것처럼 제주의 생활이 쉽지는 않을 거다. 그래도 사표 던진 용기로 살아 볼 참이다. 제주에서 해야 할 일 중 한 가지는 '나'를 들여다보기다. 나는 지금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더불어 보람있는 일을 찾는 중이다.

지난 여름 제주도 대평리에서 바라본 선명한 무지개.

ⓒ 조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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