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 산 바위 낙서 문제] " 낙서로 몸살 앓는 산, 몸서리쳐지는 이기주의"
적발 어렵고 처벌 약한 것이 더욱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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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산]경규양 회장이 관악산 바위 낙서를 지우는 모습. 화학약품이 바위 주변이나 토양을 오염시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비닐을 덧대 주변을 철저하게 보호한다. |
'예수나 부처님을 기원하나니 사람 없거든 나라도 시켜주오'
'경수♡미영'
'2000년 9월 10일, 합격 기원'
일기장에 쓰면 아름다워 보일지도 모를 사랑과 기원의 문구들, 하지만 이런 문구들이 아름다운 산의 바위들에 빨간 페인트로 적혀 있다면?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풍경이 아닐까. 하지만 실제로 이런 문구가 시민들이 즐겨 찾는 관악산, 북한산, 인왕산 등의 자리 좋은 바위에 버젓이 적혀 있다.
'매월당 김시습도, 우암 송시열 선생도 바위에 낙서를 하지 않았던가?'라며 아무 일 아닌 듯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관악산에 올라보라. 의미 없이 빨갛고 검은 스프레이래커로 갈겨댄 기괴한 문장들은 보기만 해도 역겹고 소름끼친다. 모두가 함께 보고 즐기는 자연바위에 페인트로 낙서를 하는 행위가 과연 정상일까.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이런 낙서를 하는 것일까.
2000년 초반에는 주한미군들이 우리 산의 바위에 낙서를 많이 해 문제가 됐었다. 당시 한 신문에 '수도권 지역 산은 미군의 낙서판?'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기사에는 '녹색연합에 따르면 수락산 509봉에 올라서면 5개 바위에 낙서가 되어 있으며, 청계산 꼭대기 바위 곳곳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낙서가 되어 있다. 소요산 공주봉과 의상대 2개의 봉우리에 낙서가 되어 있으며, 천보산에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큰 미군부대 마크가 그려져 있다. 이 마크는 병사들의 전·출입 때 기념행사로 그린 것이다'라고 나와 있다. 이후 시민단체의 항의와 주한미군 측의 자제로 현재 미군들에 의한 낙서는 거의 사라졌다.
이제 문제는 부끄럽게도 '한글'로 적힌 낙서들이다. 우리나라의 명문대학교가 들어서 있는 관악산의 경우, 정상 부근 바위들엔 해당 대학교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해서 'XX대학교 합격 기원' 등의 기원낙서가 수없이 발견된다. 산의 정기를 받는다며 생년월일과 이름을 적기도 한다. '누구누구 왔다 간다' 식의 산행기념 낙서도 많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애교다. 빨갛고 검은 페인트로 '도를 깨우치는 자, 예수고 부처니' 같은 뜻을 알 수 없는 장문의 글귀를 바위는 물론이고, 데크 전망대, 심지어 철 계단에까지 빼곡하게 적어놓았다.
관악산에서 주로 발견되는 이 글귀는 글씨체나 내용으로 봐서 동일인물의 소행임이 유력하다. 관악산 곳곳을 마치 제 것인 양 낙서질을 해대고 있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고 있다. 관악산은 야간산행이 가능한 곳인 데다 CCTV도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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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산]대학합격을 기원하며 학교 방향의 바위에 생일과 이름을 적어놓았다. |
스프레이래커 낙서 지우기 까다로워 골치
이렇게 페인트를 이용한 낙서는 쓰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지만 이를 지우는 데는 몇 시간, 때론 꼬박 하루가 걸리기도 한다. 더구나 낙서를 지우는 방법도 까다롭다. 바위가 미끈한 게 아니고 우둘투둘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완벽하게 지운다는 건 힘들다.
환경 색채 디자이너이자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blog.daum.net/85876)'이란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며 '山사랑'이란 별명으로 20여 년 전부터 바위 낙서 지우기 운동, 케이블카 반대 운동 등 산 사랑운동을 펼치고 있는 경규양(58) 회장은 "과거에는 일반페인트를 이용해 붓으로 한 낙서라 리무버(도장탈막제)를 바르고 낙서 도막이 쭈글쭈글해질 때 와이어브러시로 털어내면 쉽게 제거되었는데, 십여 년 전부터는 스프레이래커를 사용하는 통에 바위의 미세한 구멍까지 칠이 침투해서 지우기가 무척 까다롭다"고 말했다.
"낙서자국이 남더라도 시너와 약품으로 씻어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남은 흔적은 전동드릴에 접시형 와이어브러시를 장착해 갈아냅니다. 낙서의 유형에 따라서 약품준비와 제거방법이 다릅니다. 일부 시너나 리무버 종류를 잘못 사용하면 토양 등 2차 환경오염을 일으키고 작업자의 안전도 위협할 수 있어 반드시 고무코팅 장갑과 보안경, 마스크를 착용하고 2차 오염을 방지하는 조치를 한 후 경험자에 한해서 작업해야 합니다. 만약 표면이 거칠어 위 방법이 적합하지 않을 때에는 페인트를 바위 색깔과 비슷하게 맞춰 바르는 착색기법을 적용합니다."
'山사랑' 경 회장이 말하는 '착색기법'이란 바위와 비슷한 색을 여러 개 만들어 진한 색부터 묽게 해 남은 낙서자국에 침투시키는 것이다. 진한 바탕색을 침투시킨 후에는 밝은 바위색을 3~6회 이상 색상을 조절해 튀어나온 부분을 원상태대로 터치해 준다. 칠 하듯 바르는 게 아니라 낙서자국에 '침투시키는 것'이라 바위 원래의 색을 표현하기 쉽지 않지만 최대한 흔적 없이 낙서를 지우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닙니다. 저는 환경디자인을 직업으로 하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자, 컬러리스트기사(색채전문가)로서 기술자문을 해주는 입장이라 가능하지만 이를 무시하고 바위에 아무 페인트나 색이 비슷하다고 해서 함부로 덧바르는 것은 도리어 낙서를 지운 자국이 더욱 거슬리게 보입니다."
간혹 관공서에서 임의로 회색 페인트나 아예 시멘트를 얇게 펴 발라 낙서를 덮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되면 낙서 제거 작업이 더욱 어려워져 경 회장조차 손을 대지 못하게 된다.
바위 낙서에 관한 엄중한 처벌 반드시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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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산]붉은 페인트로 쓴 낙서(위쪽)와 경규양 회장이 화학약품과 와이드브러시로 제거작업을 한 후 착색기법으로 복원한 바위(아래쪽). |
이렇게 바위에 낙서를 하는 행위는 단속도 어려울뿐더러 잡는다 하더라도 처벌이 미약해 더욱 문제다. 바위에 낙서를 하면 자연훼손죄로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하지만 이 조항은 북한산이나 설악산 등과 같은 국공립공원에만 적용될 뿐 관악산이나 인왕산처럼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하는 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또한 산나물이나 산약초를 채취하는 경우에는 최대 500만 원까지 벌금을 부과하지만 바위낙서와 관련한 규정은 없다. 따라서 만약 관악산에서 낙서를 하다가 적발되면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10만 원 이하의 벌금만 부과된다. 그야말로 솜방망이 처벌인 것이다. 바위 낙서 등 자연을 훼손하는 것에 대해서 더욱 강력하고 엄중한 처벌 법률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경 회장은 "낙서 지우는 일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할 수 있는 일"이라며 "더욱 안타까운 것은 바로 등산객들의 무관심"이라고 말했다.
"얼마 전 노적봉에 갔다가 새로운 낙서를 발견했어요. 그런데 등산객들이 흉물스런 낙서를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욕을 하면서 화를 내는 이는 열 명 중 한 명뿐이었어요. 어떻게 산을 찾는 사람들이 산을 해치는 행위를 보고도 분노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등산인구 1,500만 명 시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만큼 우리나라엔 산을 찾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부디 산을 오르는 행위에만 열을 올릴 것이 아니라 진정 산을 사랑하고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자랑스러운 산으로 가꾸는 것이 '등산인의 의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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