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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
리빙센스 | 2012.12.07 10:09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물건에는 부모의 인생이 담겨 있다. 잘살아왔다면 잘산 대로 부족했다면 부족한 대로 아이에게 자신의 세월을 넘겨주는 것이다. 품안에서 떠난 자식을 향한 당부도 있다. 거기에 그리움과 아쉬움이 보태진다. 무턱대고 흐르는 시간에 대한 야속함이거나 미처 말하지 못한 말들이다. 오랜 시간 후 그들의 아이들이 받게 될 물건들. 소중한, 그래서 위대한 그들의 물건들.

1. 다일공동체 최일도 목사의'냄비'

배를 곯는 사람들에게 밥을 나눠주는 일명 '밥퍼 활동'을 24년째 하고 있다. 이맘때 청량리역에서 끓였던 라면이 하루 5천5백 명의 몫으로, 지금까지 5백만 그릇으로 늘어났다. 지금은 다 찌그러져 볼품없어 보이는 이 냄비가 그때의 시작을 함께한 물건이다. 나는 이걸 '초심 냄비'라고 부른다. 외로운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와 가슴이 아려 함께 슬퍼할 수 있는 마음을 언제나 처음처럼 간직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까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고 항상 스스로를 다진다. 책 < 밥心 > 에서도 말했듯이 밥은 누구나가 누려야 하는 삶의 기본이자 기회다. 그 밥을 담은 밥그릇을 나누고 사람에 대한 따뜻한 마음씨까지 가지고 아이들이 살았으면 한다. '지금부터, 여기부터, 작은 것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 그리고 나부터' 조금씩 실천해가기를.

2. 떡 블로거 허지연의'간식 상'

어릴 적, 집에 돌아가는 하굣길은 언제나 즐거웠다. 엄마가 차려주는 간식 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바쁜 와중에도 딸인 내가 먹고 싶다고 하면 강정부터 카스텔라, 튀김, 부침개까지 못하는 것 없이 손수 만들어주셨다. 간혹 외출을 해야 할 때면 미리 차려놓고는 감동의 편지 한 장을 함께 남겨 나를 울리기도 했다. 그게 우리 엄마의 마음이었다. 엄마가 된 나도 우리 아이에게 똑같이 하고 있다. 그때만큼 거창한 요리는 아니더라도, 겨울이면 폭신하게 찐 고구마를, 여름이면 옥수수나 감자를 상에 올려놓으며 내 엄마의 마음을 대신하고 있다. 그저 빵이나 과자를 사다 놓아도 함박웃음을 짓는 아이라 참 다행이지만…. 부디 그 행복이 상 위의 음식만이 아니라 엄마인 내 사랑까지 배부르게 차려진 것을 알기 때문이길 바란다.

3. 만화가 남지은의'이발 가위'

남편(만화가 김인호)은 단지 그림을 잘 그린다는 이유로 이발병이 되었지만, 전역 후에도 굳이 미용실을 가지 않고 혼자서 머리를 깎을 정도의 실력이 있다. 종종 내 머리도 다듬어줬다. 단돈 2천원을 주고 시장에서 사온 가위로 자르는 것치고는 꽤나 솜씨가 정교해 놀라곤 했다. 결혼 후 낳은 삼형제의 머리도 남편의 몫. 매달 이발을 해주고 화장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손수 치우는 그.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더운 날이면 땀까지 흘리며 열중하는 모습을 보면 괜스레 엄마인 나까지 사랑받는 것 같아 흐뭇해진다. 지금은 입소문이 나서 내 친정아버지와 교회 집사님까지, 남편에게 머리를 맡기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 그래서 이참에 좋은 가위를 하나 샀다. 문득 이 다음에 할아버지가 된 남편의 머리를 아이들이 깎아주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기분이 좋다.

4. < 크루징 코리아 > 발행인 정석헌의'트래비스'

이 차보다 좋은 차는 많다. 분명 15년 후에는 더 많아질 것이다. 어쩌면 툭하고 시동이 꺼질 법한 똥차를 선물하는 게 아닌가 걱정되긴 하지만, 이 차는 생각보다 귀한 차다. 우선 희소가치가 높다. 일본 다이하츠가 유럽 수출용으로 제작한 걸 직접 병행 수입해서 산 차다. 보기 드문 그린 컬러인데다 현재는 단종된 상태. 우리나라에는 공식 수입원도 없기 때문에 직접 부품을 찾아 헤맨 적도 있고, 애초에 고장 나지 말라고 닦고 조이고 매일 기름을 칠한다. 틈틈이 설명서를 보면서 간단한 건 수리 방법까지 터득해놓고 있다. '아빠가 이 정도 공을 들이면 미안해서라도 받지 않을까'라는 게 은연중 나의 생각이다. (분명 좋다고는 안 할 테니) 거부만 하지 않는다면, 생애 첫 차로 선물해 아이가 출퇴근용으로 타고 다니길 바란다. 동시에 '차가 너의 명함도 아닐뿐더러 배기량이 차의 가치도 아니고, 단지 어울리는 옷을 찾듯이 자신을 알아차리는 감각과 안목을 길러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그러니 부디 받아달라'고도 전하고 싶다.

5. 금나나의 어머니 이원홍의'책상'

결혼 당시 화장대 대신 혼수로 가져온 것이다. 아무래도 교직에 있다 보니 화장보다는 공부를 하는 일이 많을 것 같아서였다. 지금은 하도 굴러서 서랍에 달린 바퀴도 느슨해졌고,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많다. 나나의 짓이다. 수업 준비 좀 하려고 자리에 앉으면 관심을 끌고자 괜히 주변을 맴돌다 치고받곤 했으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안 됐던지 언제부터는 그냥 지켜보는 시간이 늘었고, 아이가 조금 크자 자연스럽게 옆에 앉아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나는 무엇이든 혼자 하기 시작했다. 바쁘다며 못 챙겨준 내 탓이기도 하지만, 그 책상에 앉아 있던 엄마의 모습을 보고 나나가 무언가 느낀 것은 아닐까? 만일 그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면, 비록 그때 있던 책장은 없고 나머지 부분은 많이 낡았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선물일 것 같다.

6. 디자이너 서승연의'드레스'

제때 밥을 챙겨준 게 손에 꼽을 정도로 늘 바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지키는 건 딸아이가 가장 예뻐야 하는 날은 직접 드레스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 옷을 입고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관객에게 박수를 받는 모습을 보면, 과거 내 엄마가 내게 해줬던 그때가 기억나기도 하고, 행복해하는 아이를 보면 대견하기도 해서 빼먹을 수가 없다. 새삼 그때마다 찍은 사진으로 만든 앨범을 뒤적거리다 한 날은 빨간 드레스를 입고 마법사로 변신했던, 다른 날은 파란 꼬까옷을 입고 천사로 변신했던 딸을 발견했는데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비록 다른 엄마들처럼 너를 보듬을 순 없지만 딸의 최고의 순간만큼은 항상 같이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하다.

7. 짐블랑 대표 김은희의'선반'

직접 디자인 소품 매장을 운영하다 보니 예쁘고 좋은 물건이야 수도 없이 봐왔고 사들였지만, 아이가 이보다 좋아한 건 없었다. 그림을 그리고, 장난감을 만들고, 책도 보는 거실 한쪽에서 꼬물꼬물한 손을 이용해 만들어낸 모든 작품이 나란히 줄지어 있다. 여섯 살짜리 아들의 전시장쯤 된다. 전문가인 내가 봐도 선반은 매력적이다. 심플한 스틸 프레임이 돋보이고 그 덕에 오래 쓸수록 멋스러워지는 분위기 때문에 무언가를 안 놓고는 못 배길 것 같다. 아들 방에 놓으면 딱이겠다. 물론 지금보다 커서 좋아하는 책이 많아지고, 오래 두고 싶은 음반과 소품이 발에 채일 때의 얘기지만.

8. 여행작가 권다현의'스탬프 북'

나의 서른은 정말 남다르다. 예기치 못하게 임신을 했고, 남편과 함께 당황했고, 준비하고 있던 이직을 포기했다. 결과적으로 아줌마가 되었다. 복잡한 마음에 여행을 떠났다. 평소 좋아하던 기차로 전국을 돌았고, 그러면서 만든 것이 스탬프 북이다. 한 정거장 한 정거장 도착할 때마다 도장을 찍고 나면 비었던 마음이 채워지듯 가슴이 두둑했다. 그렇게 두 달여의 여정을 수첩에 모두 채우자 애초에 가졌던 당혹감이 소중함으로 바뀌어 아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길 위의 학교'라고도 말하는 여행은 일상을 탈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저 다시 일상으로 '잘' 돌아오기 위한 과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맨 처음 혼자 여행을 했던 열다섯 살 때는 몰랐던 사실이다. 아이가 커서 생애 처음 혼자 여행을 떠날 때, 그때의 아이에게 꼭 알려줘야겠다.

9. 다이어트 블로거 김단아의'덤벨'

나는 현재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당당한 엄마다. 그게 뭐 중요한 거냐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절실했다. 두 아들을 연년생으로 낳고는 몸무게가 20㎏ 가까이 불었다. 자연히 자신감이 줄고 무기력함에 빠졌다. 주변의 눈초리와 들리는 말들도 너무 괴로웠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당당하지 못한 내 자신이 너무 싫었다. 그러니 운동을 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살을 뺐고, 덤벨을 들었다. 몸이 단단해질수록 마음도 단단해졌다. 자신감이 생겼고, 뿌듯함에 미소를 짓게 되니 덩달아 아이들도 엄마를 보고 신이 났다. 물론 아직은 나의 기쁨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테지만, 어서 아이들이 커서 진정으로 엄마를 칭찬하는 그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다. 자랑을 좀 하고 싶달까.

10. 댄스스포츠 강사 정병준의'시집'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한마디 던졌다. "아빠, 제가 시를 쓰면 뭐 해주실 거예요?" 내가 말을 받았다. "종합장 한 권 다 쓰면 책으로 만들어줄게!" 그러자 아이가 이내 시를 써냈다. 그래서 '달팽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직접 그린 그림으로 표지를 장식해 진짜 시집을 출간했다. 그렇게 우리 둘 사이에 첫 번째 추억이 생겼고, 그 이후로 네 번의 추억이 더 쌓이는 동안 아들은 커서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새삼스럽지만, 그걸 기념해 얼마 전 또 한 권의 책을 냈다. < 아버지와 아들의 추억 > . 단지 간직하고 싶은 마음 그 하나로, 아들도 마찬가지이길 바라면서 말이다.

11. 한복 디자이너 박술녀의'모시 한복'

어머니가 살아생전 고이 간직하고 아껴 입으셨던 유품이다. 어머니도 어디에선가 물려 받은 것인데, 해지고 구멍이 나면 내가 기워드리곤 했다. 저고리는 누렇고 군데군데 낡은 흔적이 많지만, 어머니는 낡은 것을 잘 입어야 새것도 잘 입는다며 그 옷을 고수하셨다. 그런 어머니에게서 나는 옷에 대한 애착과 고집을 배웠다. 유행 따라 변하는 게 있다지만 불과 1년 만에 촌스러워졌다며 팽개치는 건 옷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물론 물려주려는 모시 한복은 낡아서 입을 수 없고 양장보다 다루기도 어렵다. 그러나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정신만 아이가 지닐 수 있게 된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12. 녹색친구들 대표 김두석의'신문 스크랩'

나의 서재 한쪽에는 20여 년 동안 소중히 모아온 이야기가 있다. 매일 신문을 들춰보며 인생에 약이 될 만한 지혜와 꿈을 오려낸 것들이다. 그 속에는 자연의 이야기와 각박한 삶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특히 환경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 주변에는 자기 자신 외에도 지킬 것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어느덧 세 아이 태성, 태후, 연희의 키를 합한 만큼 높아진 스크랩 더미를 보면서 이따금 아이들이 자라는 만치 신문 속 세상이 지혜와 꿈을 못 만들어낼까 두렵기도 하다. 혹여나 그런 날이 온다면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지혜를 얻어갈 수 있는 물건으로 쓰이게 되길 소망한다.

 

 

진행:최진주 기자 | 글:허영섭(프리랜서), 임해경(프리랜서) | 일러스트: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