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처녀 유라의 청년 농부 육성 프로젝트

취재 조고은 2014. 4. 25.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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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핫피플_ 유쾌 발랄 스물일곱 아가씨, 행복한 농촌을 꿈꾸다

20대 한창 꽃다운 나이에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귀농을 택한 아가씨. 시골에서의 생활은 평범했던 그녀를 농부로, 시장 판매자로, 프로젝트 기획자로 만들었다. 그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강원도 춘천에 있는 한 카페에서 유라 씨를 만났다. 서울시 마포구에 있는 늘장을 통해 알게 된 그녀는 2012년 3월, 경북 봉화로 내려갔다가 도시형 장터에서 농산물을 판매하기 위해 1년 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온 당찬 아가씨였다.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귀농하려고 잠시 춘천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남다른 이력을 전해 듣고 당연히 서른은 훨씬 넘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더 앳된 모습에 실례를 무릅쓰고 나이부터 물었다. 그녀 나이, 이제 겨우 스물일곱. 청춘의 눈으로 바라본 농촌은 어땠을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지 더 궁금해졌다.

내 삶의 주인이 바로 '나'라는 걸 알게 해준 시골살이

그녀의 원래 이름은 '장경미'. '유라'는 봉화로 귀농하면서 양부모님이 주신 이름이다. 어려서부터 쭉 서울과 수도권에서 살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친부모님은 문경으로 내려가셨다. 홀로 남는 것을 택한 그녀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각종 아르바이트, 사무 경리, 텔레마케팅, 공장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친딸처럼 대해주시는 양부모님은 그때 인연이 닿아 만난 분들이다.

"'고졸'이라는 한계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어요.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고, 돈이라도 제대로 벌어보자고 생각했죠. 공장 기숙사에 머물면서 12시간씩 주야 교대로 일하며 악착같이 살았어요."

집안 사정이 넉넉지 않았던 그녀는 대학 진학을 순순히 포기했다. 경제적 상황을 딛고서라도 꼭 배우고 싶었던 것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공부를 꽤 한다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서 친구들은 이름만 대면 아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번듯한 대기업에 다니고 있지만, 공장에서 만난 동료들은 달랐다. 대부분이 고졸이었고 매일 '현실'과 대면하며 치열하게 살고 있었다. 양극단을 동시에 경험하며 그녀는 씁쓸했다. 한쪽은 학벌과 명예, 다른 한쪽은 생계. 결국 모든 것은 '돈'으로 귀결됐다

"제 삶도, 다른 모두의 삶도 다 자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매달 월급이 꼬박꼬박 나왔지만 그뿐, 거기에 진짜 '나'는 없었던 거죠."

그러던 어느 날,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양부모가 있는 봉화 산골짜기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스물두 살이 되던 해에 양어머니의 건강 악화로 두 분이 귀촌하고 나서는 자주 오가며 양아버지를 도와 흙집을 짓거나 휘돌아 흐르는 강물을 보며 마음을 다독이곤 했었다. 그때마다 받았던 '살아있다'는 느낌이 회의만 가득한 삶에 답을 내려줄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있었다. 실제로, 그곳에서의 1년은 그녀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엄마를 따라 산속을 누비며 생전 처음 산나물을 뜯고 요리하면서 깨달았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고, 그만큼만 되돌려 받는 것. '이런 게 진짜 사는 것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늘 했어요."

그곳에도 부딪혀야 할 '현실'은 있었다

자연이 주는 것들로 충분히 먹고살 수는 있었지만, 휴대폰 요금은 낼 수 없었다. 최소한의 생활비를 마련할 돈벌이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시작한 것이 농산물을 판매할 블로그를 개설해 운영하는 것이었다. 수확물 그대로 파는 것보다 가공해 팔면 수익률이 더 높다는 얘기에 쨈, 푸딩, 양갱, 장아찌 등도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온라인에서 개인이 가공식품을 소량으로 판매하는 것이 불법행위라는 것이다. 일명 '식파라치'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돈을 목적으로 그런 사례들만 찾아 신고하는 바람에, 세상 물정 어두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고추장, 된장 좀 팔아보려다 자칫 그에 몇 배가 되는 돈을 벌금으로 물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가진 것이라곤 작은 논•밭이 전부인 사람들이 식품위생법 규정대로 공장을 지어 식품을 가공•판매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큰 농장을 가진 분들은 대부분 공판장에 수확물을 대량으로 넘기지만, 소농들은 시장에 내다 팔거나 알음알음으로 소매점에 넘겨 생계를 유지해요. 온라인 직거래를 하려면 생산은 물론 포장, 마케팅, 유통, 판매까지 모두 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런 일에 능숙한 젊은이는 지금 농촌에 거의 없죠."

어쩌다 농사짓는 청년들이 있다 해도 고립감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도시로 빠져나가는 일이 다반사다. 50~60대가 '청춘'이라 불릴 정도로 노령화된 농촌에서 노는 땅은 늘어만 갔다. 농사짓던 할아버지, 할머니 중 한 분이 연세가 많아 돌아가시면 보통은 홀로 농사를 지을 수 없어 그 땅을 헐값에 넘겼다. 그녀는 농약도 치지 않고 직접 손으로 가꾼 그 좋은 땅이 하나둘 사라져가는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때부터 '어떻게 하면 청년들이 농촌으로 올 수 있을까', '소농이 경제적으로 정당한 대가를 받을 방법이 뭘까' 하는 고민이 시작됐다.

"산야초 효소, 오디 쨈, 산딸기 푸딩 등을 만들어서 시장에 직접 내다 파는 건 문제가 안 되더라고요. 마침 서울에 도시형 장터들이 한창 활성화되고 있었고, 광화문 광장에서 열리는 '서울 농부의 시장'에 참여하게 됐어요."

직거래 장터에 농산물을 팔러 간다니 '가는 김에 우리 것도 팔아 달라'는 이웃들의 요청이 줄을 이었다. 양아버지의 트럭에 이장님 댁 브로콜리, 이웃 할머니가 담근 고추장과 된장, 각종 말린 채소 등을 싣고 서울로 향했다. 손님들의 반응은 꽤 긍정적이었고, 하루 기본으로 70만원 어치는 팔았다. 5~7월 동안 매주 장에 참여했던 이 경험을 발판 삼아 7월 말부터는 마포구 공덕역 근처에서 매일 열리는 '늘장'에 본격적으로 자리 잡았다. 컨테이너를 구해 직접 페인트칠하여 판매장을 마련한 후, 각 지역에 있는 생산자를 발굴해 자연 먹거리를 판매했다. 예쁘지는 않지만 농약 없이 자연재배한 농산물도 충분히 맛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사과, 귤 등의 잉여농산물을 활용한 워크숍과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곳곳에서 농촌 생산자를 위한 직거래 장터가 열리고 있지만 아직 한계가 많아요. 생산자가 직접 지방에서 올라오려면 최소 이틀은 잡아야 하고 교통비, 숙식비만 해도 20만원이 넘는데, 이를 감수하고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예요. 저같이 경험이라 생각하지 않으면 하기 어렵죠."

산골처녀 유라, 청년 농부와 행복한 농촌을 꿈꾸다

"구인•구직 사이트에 '농촌'이라고 검색해본 적 있으세요? 정말 아무것도 안 나와요(웃음)." 그녀의 농담 섞인 말과 이어지는 웃음이 유쾌하지만은 않다. 농촌에 관심 있는 청년이라도 실제로경험할 기회가 거의 없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초, 그녀는 상설시장이라 항상 발이 묶여 있어야 했던 늘장을 정리했다.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그려오던 프로젝트를 위해서다.

그 프로젝트란 바로 농부를 꿈꾸는 청년과 농촌을 연결하는 중간다리가 되어줄 플랫폼을 만드는 것. 그동안 그녀는 소셜다이닝 모임 '집밥'에서 귀농•귀촌을 주제로 오디 빙수를 먹는 모임을 주최하거나 각종 청년 모임이나 사회적 기업 관련 모임을 찾아 농촌에 관심 있는 청년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농부를 꿈꾸는 청년들이 의외로 많고, 그들이 가진 인력과 아이디어로 농촌에 남아도는 자원들을 활용하여 농부들에게 새로운 판로를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도와줄 기관이나 사회적 인식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 역할을 직접 맡아 새로운 농촌 풍경을 만들어보려 한다.

"농촌에 계신 분들은 마을에 누군가 새로 들어오는 것에 굉장히 예민해요. 그래서 낯선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 어울려 살아간다는 자체가 힘들고 어려울 수 있죠. 농사를 배우는 것은 물론, 농촌에 잘 적응해갈 수 있도록 돕는 일도 저의 몫이에요."

이런 생각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4월부터는 전남 곡성의 작은 땅에 청년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품앗이를 시작한다. 내년쯤에는 흙집을 지어 그곳에서 숙식하며 농촌을 바꾸어갈 예비 청년 농부들을 불러 모을 계획이다. '대한민국 제1호 청년 농부 양성소'로서 곡성뿐 아니라 전국 각지로 퍼져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종 목표다.

그녀는 많은 청년이 대기업 입사를 꿈꾸듯 '농부'도 하나의 장래희망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막상 가서 살아보니 '이게 아니다' 싶을 수도 있고 문득 새로운 일이 하고 싶어질 수도 있는데, 그럴 땐 다시 도시로 가면 된다. 현재와 미래에 대한 선택은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지만, 부족한 현실 때문에 어떤 꿈이 시작하기도 전에 좌절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산골처녀 유라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그녀의 도전이 많은 청년에게 농촌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심어주고, 이것이 작은 구심점이 되어 더욱 활기 넘치고 풍성한 농촌의 모습으로 바꿔갈 수 있기를, 마음을 다해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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