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63> 조화의 집 - 김동수 가옥

2012. 10. 16.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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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흐르듯 이야기가 섞이고 공간이 어울리는 곳

[세계일보] # 너른 호남 들판에서 집터를 찾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에서 목포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군산을 지나면서부터 눈앞이 시원해진다. 이 부근부터 북쪽으로는 군산과 경계를 이룬 만경강과, 남쪽으로는 부안과 만나는 동진강 사이에 펼쳐진 광활한 호남평야가 펼쳐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전체 면적의 절반이 논이다. 7400만여평의 논에서 생산되는 쌀은 연간 12만7000여t으로, 가마 수로 따지면 176만8000가마나 된다고 한다. 그래서 김제 사람들은 예부터 이 땅을 '징게맹게 외배미들'이라 불렀다. 징게는 김제, 맹게는 만경, 외배미는 이 배미 저 배미 할 것 없이 모두 한배미로 탁 트였다는 뜻이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거의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김제 초입 논 한가운데 솟아 있는 백산에 오르면 그 장관을 볼 수 있다.

백산은 부안 인터체인지에서 고속도로를 내려 태인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봉곳한 언덕이다. 고도 47m로 산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낮은 논 한가운데 있는 언덕 정도의 높이지만, 그 위에 오르면 일망무제의 너른 들이 펼쳐져 눈은 물론이고 가슴까지 확 트인다. 그곳은 동학농민들의 한이 서린 산이기도 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에 동학군이 첫 지휘소인 '호남창의대장소'를 설치하고 전열을 정비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 들에서 바라보이는 풍경은 아주 단순하고 명쾌하다. 화면을 7대 3으로 구획하고 그 경계선에 수평선을 죽 그으면, 위는 코발트색 하늘이고 아래는 초록색 혹은 황금색 들판이며, 그 사이에 아주 가늘게 사람과 집들이 끼어 있을 뿐이다. 그곳에서는 해가 땅에서 솟아오르고 땅으로 떨어진다.

또한 자연은 무척 크지만 보는 사람을 내리누르거나 무섭지 않고 참 포근하다. 평화로운 조화, 누구나 이곳에 오면 마음이 무척 평화로워질 것이다. 특히 가을의 들판은 더 없이 좋다. 추수를 앞둔 넉넉한 가을 들판을 원없이 만끽할 수 있다.

그리고 근처에 그런 평온한 조화를 볼 수 있는 집이 한 채 있다. 정읍군 산외면 오공리라는 곳에 있는 '김동수 가옥'이라는 집이다. 이 집은 따로 전해지는 당호는 없고, 다만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의 소유주였던 김동수라는 사람의 6대조가 지은 집이라는 사실과 지은 지는 200년이 조금 넘었다는 사실만이 전해진다.

1772년 전라도 정읍 땅에 광산김씨 시조인 김흥광의 30대손이며 파시조(派始祖)인 판교공(判校公)의 11대손 김명관이라는 사람이 자손 대대로 살 집을 짓기 위해 땅을 찾아다닌다. 듣자 하니 전라도 태인 땅에 청석골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자리가 아주 좋다 하여 찾아갔으나, 마침 그 자리에서 강아지가 똥을 누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는 이곳은 강(姜)씨네 터라며 단념한다.

그러던 중 어떤 잡목이 우거진 숲에 도착하게 되는데, 땅을 보는 안목이 뛰어난 김명관은 한눈에 범상치 않은 곳임을 알아챈다. 땅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이윽고 밤이 되고 어디선가 도깨비들이 나타났다. 몸을 숨기고 도깨비들을 지켜봤더니, 그들은 북을 세 번씩 울리면서 "한 말… 두 말…" 하며 곡식을 되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들은 김명관은 '이곳이 바로 내가 찾던 집터다'라고 확신을 하게 된다. 북소리가 난다는 것은 이 자리에서 부자가 난다는 의미이고, 도깨비는 김씨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호남지방에서는 어민들은 뱃고사를 지낼 때 물 도깨비를 향해 "물 위의 김서방… 물 아래 김서방" 하면서 축원하기 때문에 도깨비를 '김씨'로 의미 치환한 것이다) 드디어 자리를 정한 그가 집을 지은 것은 1794년(정조8년)의 일이다.

김동수 가옥 안채.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대등한 공간 구성으로 균형을 이루고자 한 좌우대칭의 안채가 이채롭다.

# 자유롭게 공간이 펼쳐진 99칸 집

김명관이 고른 자리는 앞으로는 호남평야의 젖줄인 동진강이 발원하고 있었고, 뒤로는 창하산이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을 갖춘 아주 이상적인 집자리였다. 더군다나 주산인 창하산은 지네의 형상이 있어 명당의 격을 더해주고 있었다. 지네는 비록 생긴 것은 징그럽지만 최소 15쌍에서 최대 170쌍에 이를 정도로 다리가 많아 천룡(天龍)이라고도 부른다. 풍수에서는 지네형국(蜈蚣形局)의 터를 길지로 여기며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즉 자손이 번성하고 재화를 많이 모을 수 있는 자리라고 본다. 이미 상당한 수준의 안목으로 집자리의 장단점을 충분히 파악한 김명관은 10여년 동안 집을 지으면서 장점은 살리고 부족한 곳은 풍수적인 비보(裨補)까지 훌륭히 해낸다.

당시 김명관은 17세였다고 하는데, (약간의 전설이 덧붙여진 듯하다) 약관의 나이에 어떻게 저런 집을 구상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집의 규모는 무척 크다. 칸 수로는 100여칸이고(현재는 80여칸이 남아 있다) 동수로는 7동, 영역으로 구분하자면 5개의 영역이 있다. 지금은 한 채밖에 없지만 당시에는 8채의 노비 집이 주변에 있었다고 하니 보통 큰 집이 아니었다.

사실 이 집에서 볼 만한 것을 꼽아본다면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자라 모양의 빗장이 달린 대문이라든가, 7채의 집들을 연결하기도 하고 분리하기도 하는 적당한 높낮이의 담장, 사랑채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쭉 질러놓은 것같이 생긴 무덤덤한 난간, 다양한 형태의 문틀과 창틀, 공간 사이사이에 박아 놓은 굴뚝들….

집안 구석구석 남아 있는 당시의 생활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시설 하나하나가 모두 보통의 솜씨가 넘는다. 무엇보다도 이 집에서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하는 보물은 다양한 공간들의 조화로운 구성이다. 이 집의 모든 공간들은 흘러간다. 마치 물이 흐르듯이, 이야기가 흘러가듯이 서로 조금씩 간섭을 하면서 흘러간다.

옛집들 중 만석꾼 부잣집이라면 경상도 경주의 최부자집이나 강원도 강릉의 선교장 등이 손꼽히는데, 같은 99칸 집이라도 각각 지역별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김동수 가옥은 전형적인 호남 부잣집의 모양대로 여러 개의 건물들이 자유롭게 분산되어 있는데, 그 공간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무척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대문채·바깥행랑채·사랑채·안행랑채·안채·안사랑채·사당채 등 7동의 건물이 마치 윷을 던져놓은 듯이 여기저기 퍼져 있다. 그러다 보니 외부에서 안으로 들어가기의 동선이 길고 다양하고, 그 과정에서 연속되는 마당들을 만나게 된다.

행랑채와 담장으로 ㅁ자형을 구성하는 문간마당은 마당의 크기, 사랑채로 이어지는 중문의 위치, 식재 그리고 담장 너머로 머리가 살짝 보이는 안행랑채의 배치 등 어느 곳 하나 허술한 곳이 없다. 안마당은 ㄷ자형의 안채 내부 마당과 안행랑채 사이의 긴 가로마당이 만나서 아늑함과 긴 마당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고, 좌측 안사랑채 사이의 담장은 두 공간의 관계를 잘 정리하고 있다. 다양한 동선체계와 그 사이사이를 잇는 마당의 구성은 이 집의 가장 큰 매력이다.

안채마당은 그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공간이다. 사랑마당을 지나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을 지나면 안행랑채 마당과 겹쳐지는 안채마당이 나온다. 그 모양이 마치 테트리스게임에서 도형이 맞추어지듯 마당은 철(凸)자처럼 생겼고 안채는 뒤집어 놓은 요(凹)자처럼 생겼다. 안채마당은 공간들이 흘러가다가 잠시 끊어지는 부분이다. 도형으로 표현하자면 선으로 흐르다가 갑자기 점으로 모여 멈추어 있다가 다시 흐르는 곳이다.

집의 전체적 흐름에서 볼 때 안채마당은 상대적으로 정지된 공간이다. 흐르는 공간에서 정지된 공간은 무척 특이한 느낌을 준다. 마치 모든 흐름을 빨아들이는 혹은 모든 흐름이 처음 시작하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든다.

안행랑채에서 바라본 안채와 마당으로 가족과 공간의 이야기가 흘러다닌다.

#서로를 배려하는 건강한 조화를 담다

많은 전통주택들이 그렇듯 이 집 역시 전체 공간의 중심을 안채에 두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안채의 형태가 안대청을 중심으로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데 있다. 왼쪽과 오른쪽에 똑같이 부엌도 두 개, 방도 두 개, 다락도 두 개다.

이런 비슷한 유형의 집을 몇 채 더 본 적이 있다. 충청도 논산의 윤증 고택이나 경기도 여주의 김영구 주택이 이 방식이다. 모두 부엌이 두 개, 방이 두 개인 좌우대칭형의 안채가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두 개의 태양이 공존하기 위한 방식이다.

대체로 당시의 경제권은 여자가 쥐고 있었다. (원래 우리나라만큼 양성평등, 더 나아가서는 여권이 확고한 나라도 드물었다) 딸과 아들이 재산을 균분하는 것은 물론이고, 제사도 돌아가면서 지냈으며, 결혼을 하면 처가살이는 기본이었다. 장남은 처가로 장가를 들고 차남이 집안의 대를 잇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사회에서 지방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경제권의 이양은 대부분은 일정한 기간이 되면, 즉 며느리가 다시 며느리를 볼 정도의 연륜이 생기면 스스로 안방을 물려주고 명예롭게 은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부 지방에서는 시어머니의 권한을 종신제로 인정해 주었다. 말하자면 운이 나쁜 며느리는 죽을 때까지 안방 차지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던 것이다.

이 방식은 경기도·충청도·전라도 등 백제권의 지역에서 주로 발견된다. 그 경우 며느리를 위해 안채에 따로 며느리의 부엌을 둔다. 그런데 김동수 가옥의 경우에는 그 균형이 무척 엄정하다. 정면에서 볼 때 왼쪽의 시어머니 영역과 오른쪽의 며느리 영역 모두 똑같은 모양의 부엌과 방, 그리고 그 상부의 다락 등이 마치 그림을 그리고 반을 접어 똑같이 찍어낸 것처럼 똑같다.

이에 대한 많은 추측이 있다. 당시 김명관 집안의 고부 관계에서 며느리의 힘이 무척 강했을 것이라든가 혹은 처가 쪽의 재산으로 집을 지은 것이 아닌가 등등. 그러나 사실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안채의 좌측에 위치한 시어머니의 공간인 안방의 주변을 둘러보면, 안방의 뒷문과 담을 하나 사이에 둔 안사랑채에 시집 간 딸이 해산을 할 때나 친척들이 놀러올 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안채의 우측에 위치한 며느리가 기거했던 건넌방의 주변에는 살짝 감춰진 통로가 있다. 인접한 사랑채의 작은 방에서 기거하는 아들이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통행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으로, 모두 예쁜 굴뚝이나 낮은 담으로 살짝 경계만 지어 놓았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가족들 각자의 처지에 맞는 사적인 공간들이 사이사이 배치되어 있는 모습은 권위적이며 근엄한 표정의 앞쪽의 마당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는 권력은 넘겨주지 않아도 실질적인 권한은 동등하게 가지고 나간다는 인간적인 배려를 통해 공존의 실마리를 찾아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럼으로써 고부간은 서로 일정한 거리와 더불어 일정한 영역을 소유하게 되며, 상호 인정을 통한 건강한 조화를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조화는 집을 처음 지을 당시 지네의 기운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며, 받아들인 그 기운이 흩어지지 않도록 어떻게 보존할까 고민했던 김명관의 치밀하고 탁월했던 마스터플랜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집은 200여년 전에 지어진 모습대로 거의 유지되고 있으며, 지금도 호남평야의 젖줄 동진강의 물기를 머금은 느티나무에 덮여 아름답게 남아 있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작은 집, 큰 생각'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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