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이 살아 있는 초미니 사무실, 세련된 촌놈 같은 집

2014. 9. 30. 11:13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 건축가 김희준은 예의 빙긋 웃는 표정으로 한마디를 툭 던졌다. "아주 이상한 땅에 제 사무실 건물을 지으려고요." 도대체 어떤 땅이기에? "높은 돌 축대와 작은 실개천 사이에 낀 사다리꼴 땅이에요. 큰 기대는 마세요." 김희준은 다시 웃기만 했다.

구본준의 '건축소 습격기'

구본준은 <한겨레>의 문화부 기자다. 그는 오랫동안 건축과 디자인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써왔다. 앞으로 그는 매월 건축가의 사무실을 습격할 계획이다. 건축가의 개성이 가장 두드러진 공간을 <아레나>에 소개하기 위해서다.

한반도의 땅끝 고장 출신인 김희준은 스스로 '촌놈'이라고 말하는 건축가다. 사실이지만 실은 겸손한 거짓말이기도 하다. 그의 건축은 언제나 깔끔하고 세련된 것이 특징이다. 디자인은 과감한데 절제된 품위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를 지칭하는 또 다른 단어는 '은둔'이다. 건축계에서 김희준은 조용히 그리고 홀로 작업을 이어왔고, 그런 그의 존재를 아는 이는 건축계에서도 의외로 적다. 하지만 그는 이른바 '선수들이 인정하는 선수'로 꼽히는 실력파다. 작고한 법정 스님의 마지막 거처였던 일월암 객실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아주 작은 방 한 칸짜리 집인 일월암 객실은 조형물처럼 기하학적이면서 건축 안에 담긴 네모꼴 분할 단위가 중심을 두고 회전하는 콘셉트로 디자인한 특별한 집이다. 문을 열면 정자처럼 사방이 뚫리고, 닫으면 조용히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싶어지는 집. 자연 속에 폭 들어간 이 집은 아쉽게도 사람들이 찾아갈 수는 없지만 이미지만으로도 건축계에서 '역시 김희준'이란 평을 들었다. 그런 김희준이 자기 사무실을 아주 작게 스스로 짓는다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반년쯤 지난 올봄, 그는 "이제 놀러 오셔도 될 정도는 됐다"고 또 툭 던지듯 이야기를 했다. 개천과 축대 사이 틈새에 낀 사무실이라니, 어떤 모습일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사무실이 있는 곳은 서울 삼청동 끄트머리, 경복궁 뒤 웅장히 솟은 백악산의 뒤쪽 기슭,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골목이 고불고불 높고 낮게 이어지는 개천가 마을이었다. 카페가 즐비한 삼청동 큰 길에서 겨우 10여 미터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30~40년 전으로 시간 이동을 한 듯한 동네다. 작은 개천이 흐르고, 그 위에 대충 얹은 철제 다리를 건너니 높은 축대가 나오고, 왼쪽으로 방향을 트니 드디어 그의 사무실 건물이 모습을 나타냈다. 사무실 건물은, 조금 미안하게 말하자면, 개집을 크게 키운 모습이었다. 모든 건축 재료가 가장 싼 것들이었다. 농촌에서 주로 창고를 지을 때 쓰는 샌드위치 패널로 우리가 '집'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그 형태 그대로 지은 정말 작은 집이었다. 집의 이름은 '검은 집'이란 뜻인 '현재(玄齋)'라고 한다.

현관 문짝은 이전 집에서 쓰던 장식 강한 키치적인 디자인의 것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새로 지은 게 아니라 허름하기 짝이 없는 오래된 시멘트 블록 집을 고친 집이었다. 집 바로 옆은 개천이고, 돌 옹벽과 집 사이는 겨우 1미터도 안 되는 공간뿐. 겨우 8평짜리여서 딱 4명까지만 일할 수 있는 단층 사무실은 낡고 오래된 동네와 잘 어울려 보였다. 새로 지은 집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 동네에 있던 집 같았다. 이런 땅에도 집을 짓는다는 것이, 그리고 이렇게 짓는 사무실도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방 하나로만 이뤄진 내부였다. 문을 여는 순간, 검고 거칠어 보이던 집의 느낌은 완전히 바뀌었다. 하얀 벽과 나무 합판 마감뿐인데, 따듯하고 밝았다. 들어가보니 곳곳에서 빛이 퍼지고 있었다. 가장자리로 ㄷ자 모양으로 책상을 둘러 모두가 벽을 보고 일하는데, 답답하기보다는 아늑한 느낌이었다. 앉는 자리에 따라 창문이 다르게 뚫려 있어 직원 자리에선 돌 축대와 그 위로 자란 나무가 보였고, 김희준 소장의 자리에선 마을 입구 쪽이, 반대편으로는 백악산이 저마다 살짝 보였다. 바닥으로도 빛은 스며들었다. 개천 쪽 벽 바닥에 긴 띠 창문을 넣어 개천 풍경과 빛이 동시에 내부로 들어왔다. 겨우 8평짜리 작은 집엔 작기 때문에 생기는 귀여움과 건축가의 내공으로 나온 디자인의 묘미가 공존하고 있었다. 건축가는 미리 빛이 들어올 방향, 창문에서 보이는 풍경을 고려해 크기와 형태가 다른 창을 구상했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나무만으로 내부를 꾸몄다. 예산이 넉넉했다면 요즘 대유행인 자작나무로 마감했겠지만, 이곳의 나무는 그냥 값싼 미송이었다. 넓은 ㄷ자 책상 아래로는 나무 상자를 척척 쌓아 수납을 해결했다.

1 네 명이 일하는 이 작은 사무실 안에선 자리마다 보이는 풍경이 모두 다르다. 하늘에 낸 창문에선 빛이 들어오면서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인다. 2, 3, 4 김희준 건축가는 잡동사니 같은 것들을 모아놓는다. 재료의 특성이 잘 살아 있는 것들, 공사 현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들, 가족이 쓰던 물건들이 모여 추억을 상징한다. 5 지금 설계 중인 전원주택. 자연 속으로 흐르는 건축을 지향한다.

내부에는 아래와 위를 나누는 중간 층이 있었다. 그 중간 층 낮은 간이 천장 아래에 매단 펜던트 조명에 절로 눈길이 갔다. 벌레가 마구 파먹은 나무 속에 홈을 파고 형광등을 끼웠는데, 추상 조각 같은 매력이 넘쳤다. "일산 목재상에 버려져 있던 느릅나무를 몇만원 주고 가져왔어요. 이 벌레 구멍 좀 보세요, 얼마나 근사해요?"사무실 안에는 오브제처럼 가져다놓은 것들이 곳곳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다. 남들은 버리는 잡동사니 같은 것들이 작품처럼 존재를 뽐내고 있었다. 김희준 건축가는 재료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들, 그러면서도 기능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물건들을 좋아하는 듯했다. 모아놓은 물건은 실로 다양했다. 아주 작은 양철 쓰레받기를 집어 들어보니 만듦새가 놀라웠다. 창가에 놓인 옹기들은 처가에서 쓰던 것들이고, 쇳덩어리 기계 특유의 맛이 있는 펌프 손잡이는 공사 현장에서 주워온 것이라고 한다. 깨진 기왓장이며 여러 현장에서 모은 돌멩이들 사이에 1980년대 중·고생들이 쓰던 도시락통도 있었다. "물건스러움을 좋아하시나 봐요." "진짜를 좋아하는 거죠, 사람이 쓴 진짜 물건. 시간을 탄 것들이어서 더 좋아요. 분칠 안 한 것들, 너무 세련되지 않은 것들."

그의 사무실에선 가공과 비가공, 기교와 무기교, 빛과 어둠, 부드러운 재료와 강한 재료 같은 것들이 대조와 조화를 동시에 이루는 것처럼 보였다. 재료는 적게 쓰고, 생각은 많이 한 건축이었다. 디자인의 테마는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이 집 내부에서 중요한 것은 '결감'이에요. 질감이란 말 대신 제가 쓰는 말인데, 재료 자체에서 나오는 총체적이고 정서적인 분위기 같은 거죠. 그래서 나무판에도 페인트로 완전히 불투명하게 칠하지 않고 나뭇결이 조금씩 보이게 퍼티로만 칠했어요. 저는 너무 매끈하게 분 바른 느낌이 싫어요." 결국 꾸미기보다 재료 자체의 좋은 느낌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건축가나 디자이너들은 알 것이다. 이게 얼마나 쉽지 않은 것인지. "흐르는 건축을 하고 싶어요. 막힌 건축이 아니라. 이 작은 공간에 있지만 하늘이며 산을 끌어들이고 싶었어요. 담으려 하는 거죠. 그래야 건물이 작아도 갇히지 않거든요."

1 나무 자재상 마당에 버려진 느릅나무를 가져다 펜던트 등을 만들었다. 벌레 파먹은 자국이 추상화 같은 무늬가 되었다. 2 나무 상자만으로 해결한 가구와 수납. 서로 다른 나무들이 모여 서로 다른 '결'을 보여준다. 3 선수들 중의 선수인 그의 모형만 보아도 작업이 기대된다. 4 김희준 스튜디오 ANM(http://studioanm.com) 대표.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2대에 걸쳐 건축주가 된 묵리주택, 방과 집의 경계를 허문 일월암 객실, 전수리 주택 등을 설계했다.

차가 들어가지 않는 이 좁은 길로 온갖 자재와 물건을 나르며 집을 고쳐 지었을 때의 수고로움이 절로 느껴졌다. 이 작은 사무실 어디에도 돈을 많이 들인 부분은 없었지만, 정성과 감정이 밴 것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특별한 느낌은 풍성하게 넘쳐흘렀다.그가 이 땅을 산 것은 2003년, 작은 사무실은 10년의 프로젝트였다. 그 세월이 공간에 어떤 힘을 더해주는 것 같았다. 사다리꼴이면서 약간 휜 땅 모양 그대로 집을 지어 내부는 직사각형이 아니라 약간 휜 형태다. 그래서 오히려 공간감이 묘하다. 일반인은 직각 공간을 좋아하지만 건축가들은 미묘하게 뒤틀린 공간을 더 좋아한다. 위치마다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축대와 개천 사이 좁은 땅이라니 참…, 이 땅은 어떻게 고르신 거예요?""이쪽에 있던 사무실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이 동네가 좋았어요. 서울 한복판에 이런 동네가 또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이 땅이 딱 나온 거예요. 집이 중요한 게 아니라 동네가 중요했으니까 과감하게 사버렸어요. 동네가 고요해서 좋고, 개천이 옆에 있어 좋았어요.""공간을 꾸민다는 건 참 간단해서 더 어려운 것 같아요.""그냥 기본에 충실한 게 최고인 것 같아요. 예쁘게 꾸미는 것보다 먼저 내 추억이 어린 물건들을 간직하는 것, 채광과 환기 같은 기본 기능을 충실히 고민하는 게 중요하죠."그가 이 작은 집 하나 만드는 데 들인 돈은 실로 적다. 좋은 중형차 한 대 값 정도였다. 그럼에도 김희준의 사무실 건물 '현재'는 공간의 매력이란 결국 공간 주인의 생각에 달려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물론 건축가 중에서도 선수로 꼽히는 그였기에 가능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곳에 특별한 것은 없다. 뜯어보면 볼수록 누구나 이렇게 해볼 수도 있을 법해 보였다.

구경 잘하고 떠나며 하나 물어봤다. 어느 시간에 이 집이 가장 좋게 느껴지는지."아침이에요. 출근할 때 불을 안 켜도 창이 있어서 알맞게 빛이 들어와 있어요. 아침은 차분해서 좋고, 본연의 분위기가 있어서 좋아요. 동네가 간직하고 있는 본연의 분위기는 아침에 드러나니까." 대답을 들으니 '시간의 결'이 떠올랐다. 결이 살아 있는 집, 그런 집을 손수 만든 그가 새삼 부러웠다.

WORDS 구본준(건축 칼럼니스트) | photography 린 | editor 조진혁

Copyright © 아레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타임톡beta

해당 기사의 타임톡 서비스는
언론사 정책에 따라 제공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