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통증엔 내일의 에너지가

2015. 7. 2.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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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어정밥상 건들잡설] 육체 회복에 대한 신뢰가 있었던 열셋, 내일 아프더라도 내일은 그 통증을 이겨낼 에너지가 다시 생겨난다고 믿게 된 서른여섯

팔이 부러졌었다. 나무토막이 부러지듯 그렇게 살 속에서 부러진 뼈가 뒤틀려 피부가 불룩 튀어나왔다. 부러진 팔을 들어올리자 몸과 분리된 살과 뼈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준수하겠다는 의지를 필역하듯 아래로 휘어졌다. 부러진 뼈가 다시 한번 어긋나며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부러졌어도 여전히 내 몸이고 내 뼈인 모양이었다. 왼손으로 부러진 오른팔을 감싸안고 운동장을 걸어나왔다.

조금 있으면 아프지 않을 건데, 뭐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가장 크고 힘이 센 아이였다. 몸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내 스스로 느낄 수 있던 시기였고, 어제보다 오늘 더욱 힘이 세졌다는 것을 눈을 뜨는 아침이면 아침마다 느낄 수 있던 나이였다. 가장 높은 철봉에 매달려 가장 높이 구를 수 있는 아이기도 했다. 손아귀의 힘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두려움만 버린다면 철봉을 잡고 한 바퀴 돌아 그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 거란 생각을 그해 봄부터 해오던 터였다. 실패하면 창피할 것 같아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늦은 오후에 운동장에 홀로 남았다. 뛰어올라 철봉을 잡았다. 발목을 꺾어도 발가락은 땅에 닿지 않는 높이였다. 몸을 흔들어 진자운동을 시작했다. 몇 번을 힘차게 구르자 몸이 운동장과 평행을 이룰 만큼 높이 올라갔다. 공중에 떴다 내려오는 몸에 힘을 주어 가속도를 붙이자 몸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그때 손아귀의 힘은 내 몸의 무게와 가속도를 견디지 못했다. 잡고 있던 철봉을 놓쳤다. 철봉에서 떨어져나간 몸은 직진 방향으로 날아가다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본능적으로 땅에 손을 짚었다. 몸의 무게와 낙하 속도를 견디지 못한 팔목은 맥없이 부러지고 말았다. 부러진 오른팔을 감싸안은 왼쪽 손바닥이 쓰라려 펼쳐보았더니 손바닥에 단단히 자리잡았던 굳은살이 떨어져나갔고 그 자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철봉을 잡고 있던 마지막 순간에 온 힘을 다해 손아귀를 움켜쥐자 살이 뒤틀리다 못해 떨어져나간 모양이었다.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창피했을 테지만 여전히 나는 혼자여서 창피하지 않았다.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웃을 수 없는 상황이므로 웃지 않았겠지만 혼자였으므로 히죽 웃을 수 있었다. 그 순간에, 부러진 팔을 부여잡고 주저앉아 철봉을 올려다보며 히죽 웃음이 나왔다. 부러진 뼈가 살 속을 이리저리 들쑤실 때마다 소름 돋는 고통이 이어졌고 살점이 떨어져나간 손바닥은 지독하게 쓰라렸지만 설명할 길 없는 어떤 만족감에 부르르 몸이 떨리면서 웃음이 나온 것이었다. 그 이유를, 히죽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20년도 더 지난 요즘에야 알게 되었다.

'무목'이었다. 13살이던 나에겐 목적이 없었다. 목표하는 방향은 하늘이었고 그 하늘을 날아 멋지게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목적이었다. 만약 성공했다 해도 그만큼만 웃었을 것이다. 성공과 실패는 무의미했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날아올랐고 나름 멋지게 착지하지 않았던가. 추락이란 실패는 성공적인 비행 앞에 명함도 내밀지 못할 만큼 하찮았다. 날았고 팔이 부러졌다. 그 통증이 뭐 그리 대수라고.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통증에 무감했다. 통증을 느끼지 못한 것이 아니라 통증을 예사롭게 여겼다. 형에게 한 대 맞고 '에엥' 하고 울었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아프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번에 쥐어맞을 때는 울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아프지 않을 건데, 뭐. 깨진 유리를 밟았다. 신기하게도 몇 주가 지나자 상처가 아물고 다시 뛰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망치로 손톱을 때렸고 피멍 든 손톱이 빠지더니 그 자리에서 다시 손톱이 돋아났다. 멍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졌고 상처도 아물었고 손톱도 다시 자라났는데 부러진 뼈라고 다시 붙지 않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두 달 만에 소멸한 근육과 힘에 대한 믿음

간호사는 손목을 잡고 의사는 팔꿈치 쪽을 잡았다. 두 사람은 양쪽에서 팔을 잡아당겼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눈을 질끈 감고 이빨을 부드득 갈았다. 부러진 팔에서 빠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의사와 간호사는 부러진 팔을 잡아당기고 주물러가며 반듯하게 맞춰나갔다. 얼추 뼈를 맞춘 다음 깁스를 하고 석고가 굳길 기다리는 동안 간호사가 물었다.

"아프지 않았니?"

'시바, 말이라고….'

통증 앞에서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목'뿐만이 아니었다. 내 육체의 회복력에 대한 순수한 신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부러지고 까지고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져나가도 언제나 내 몸은 다시 회복됐고 전보다 더 세지고 커져만 가던 나이이지 않았던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팔이 부러지던 순간에도 '다음번엔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말 다 한 거다.

지난해 한 해 동안 산과 들, 바다에서 먹을 것을 찾아 먹으며 연명해보겠노라 작심하고 온 나라를 떠돌아다녔다. 내 몸과 내가 가진 지식은 이 여행 동안 총동원됐고 바닥을 드러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내 몸은 건장했었다. 뼈는 크고 단단했으며 그 뼈에 붙은 근육과 살은 어떤 역경도 견뎌낼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우람했다. 땅을 딛고 선 발바닥은 단단했고 손아귀의 힘은 소도 때려잡을 성싶었다. 여행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몸무게는 20kg 이상 줄어들었다. 한 달 만에 몸에 붙어 있던 군살은 에너지로 소비됐고 두 달이 지나자 빗장뼈와 흉곽, 골반이 툭툭 튀어나왔다. 사용하지 않는 허튼 근육까지도 살아남기 위한 에너지로 소비됐다. 육체에 대한 믿음, 구체적으로 근육과 힘에 대한 믿음은 두 달 만에 소멸됐다. 13살 무렵에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육체가 눈에 보였다면 36살 무렵에는 하루가 다르게 쇠락해가는 육체가 눈에 보였다.

그럼에도 내 몸은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다. 아침이 되면 눈을 떴고 몸을 일으켜 먹을 것을 찾아나섰다. 산으로 들어가 마와 더덕을 캐서 먹고 바닷물 속에 뛰어들어 조개나 전복 따위를 잡아 먹었다. 먹은 것은 그날을 살게 했다. 가끔 몸무게를 재보면 69kg이거나 70kg이었다. 줄지도 늘지도 않았다. 며칠 잘 먹었다고 해서 몸이 붇지 않았고, 또한 며칠 밥을 먹지 못해도 몸무게는 여전했고 다음날 아침이면 눈이 떠지고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힘도 마찬가지였다. 근육이 줄어드는 시기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은 무기력이 찾아왔지만 다음날이면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먹을 것을 찾아냈고 그만큼의 힘은 계속 몸에 남아 있었다.

자영업, 휴식은 '필망'으로 이어지기에

쇠락의 끝자락에 소멸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오늘의 에너지로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통증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일관되지만 그 성격을 달리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여전히 통증에 무감하지만 성장하던 어린 시절처럼 내일은 통증이 사라지고 전보다 좋아질 것이란 믿음은 더 이상 내 뇌리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다만 오늘의 통증이 내일까지 이어진다 해도 내일은 그 통증을 견뎌낼 만큼 에너지가 몸 안에 다시 생겨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통증을 대하는 방법도 자연스럽게 변하게 되었다. 몸이 아프면 밥을 참았고 배고픔을 견디기 힘들면 통증을 견뎌냈다. 너무나도 간명해서 말할 가치도 없어 보이지만 휴식과 노동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을 때까지 6개월이 걸렸다.

2월에 여행을 마치고 전북 전주로 돌아와 3월에 작은 배달식당을 열었다. 하루 종일 칼질을 하고 프라이팬을 굴려 볶고 지지고 튀기고 끓여 '밥'을 만들어 판다. 아침에 눈을 뜨면 칫솔을 쥘 수 없을 만큼 손가락과 손바닥이 아프지만 '밥'을 참을 수 없어 다시 칼과 프라이팬을 손에 든다. 몇 주 전엔 팔이 너무 아파 병원에 갔더니 '엘보'라는 병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일명 '테니스엘보'라 하고 의학 용어로는 '상완골외상과염'(上腕骨外傷顆炎, Lateral Epicondylitis)이라고 한다. 이 통증이 팔꿈치에 눌어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지만 너에게 주는 밥과 내가 먹을 밥 모두를 끊을 수 없어 통증을 견디며 일을 한다.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엘보라는 게 움직이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낫는 병이지만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나 찾아오는 병이죠."

하나 마나 한 소리 덕에 팔꿈치의 통증은 예사로운 것이 되고 말았다. 통증이 예사로운 것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므로 의사의 진단은 그러려니 할 수 있겠으나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 고통을 '무목'으로 치환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밥을 팔아 너의 입과 나의 입에 밥을 넣어야 한다는 목적이 너무나도 명료해서 예사롭게 여기려야 예사롭게 여길 수 없다. 겨우겨우 웃어넘기려 하면 밥이 넘어가는 목울대에 통증이 걸려 턱 숨이 막히고 만다. 장사를 말아먹어도 히죽 웃을 수 있다면 깁스라도 하고 며칠 쉬어가자 말할 수 있을 테지만 무대책인 휴식은 '필망'으로 이어지는 자영업이란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이상, 노동과 통증을 하나로 엮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하여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이빨을 앙다물고 하루 종일 '깨스불' 위에 프라이팬을 굴리고 또 굴려 밥을 볶는다.

그리고 오늘은 일주일에 하루 있는 휴일이었다. 휴일이라도 가게에 나가 미뤄둔 일을 했지만 오늘은 공원과 시장을 어슬렁거리며 연꽃을 구경하고 머릿고기를 안주 삼아 막걸리도 한 병 마셨다. 그렇게 어슬렁거리는 와중에도 팔꿈치의 통증은 계속 느껴졌다.

'나의 에너지가 소비재로 전락하지 않고, 나의 통증을 자연스럽게 견디며 무목으로 치완할 방법은 없는가.'

묵직한 통증을 무심하게 감내하는 사람들

어슬렁어슬렁 술 취한 발걸음으로 시장 한 귀퉁이를 지날 때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오후 3시 무렵이었다. 시장은 한산했고 상인들은 저마다 나름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파라솔 아래 이불을 깔고 잠을 자는 좌판 상인부터 늦은 점심을 먹는 아주머니, 나처럼 점심과 낮술을 겸하는 아저씨들, 다라이를 뒤집어놓고 그 위에 팔을 괴고 눈을 감은 할머니, TV를 보는 아주머니, 칭얼대는 아이를 안고 달래는 부인과 고기를 써는 아이의 아빠, 무더위에 시들어가는 총각무와 반짝 향기로운 자두….

묵직한 통증을 무심함으로 감내하는 사람들 사이로 향기로운 자두 냄새가 차악 내려앉아 팔랑거린다. 장맛비가 내릴 모양이다.

전호용 식당 주인·<알고나 먹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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