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무 몰골로 돌아온 옥순이가 찾던 밥

입력 2014. 9. 19. 14:50 수정 2014. 9. 19.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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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강원도의 맛] <밤밥> 밤과 찰떡궁합으로 어울리는 줄콩을 넣어 햅쌀로 지은 밥, 중앙청 꼭대기같이 담은 밥을 게눈 감추듯 비웠으니

우리 집은 줄밤나무 집이라 가을이면 낮에는 밤을 줍고 저녁이면 식구들이 등잔 밑에 둘러앉아 손에 든 밤가시를 바늘로 파내고 내일 밥해먹을 밤을 한 다래끼 까놓고 잡니다. 밤밥을 먹어본 사람들은 그 맛을 잊지 못해 다음해 가을에는 꼭 한 번씩 찾아옵니다.

이웃의 예쁜 옥순이는 시골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도시로 시집갔습니다. 봄에 공무원한테 시집가 잘사는 줄만 알았는데 추석 때 거무(거미) 같은 몰골로 시댁 어른들과 같이 친정에 왔습니다.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무슨 중병이라도 들어서 쫓겨온 줄 알았습니다.

임신한 지 3개월인데 입덧이 심해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그렇답니다.

밤밥이 먹고 싶다고 하여 시장 가서 제일 좋은 밤을 사다가 밥을 해줬는데 한 수저도 안 먹고 우리 집 무쇠솥에 줄콩 넣고 한 밤밥이 먹고 싶다고 하여 왔답니다. 시댁 어른들은 입도 촌스러워가지고 고기 반찬도 안 먹고 유별을 떤다고, 며느리 입덧이 마치 우리 집 밤밥 때문인 것처럼 갖은 퉁명을 다 떨면서 고기랑 많이 사왔으니 미안하지만 밤밥을 해달라고 합니다. 가뜩이나 일손이 바쁜 가을이라 퉁퉁대는 시댁 어른들을 보면 안 해주고 싶지만, 옥순이 불쌍해서 얼른 울타리에 있는 각종 줄콩을 따다 깝니다.

콩은 풋콩일 때 먹는 것이 특별한 맛이 납니다. 콩들은 종류마다 다 다른 맛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집은 여러 가지 콩을 심었다 가을 한철 밤과 함께 밥을 해먹습니다. 금방 쓰러질 것 같던 옥순이는 줄콩과 누릇누릇 익어가는 밭의 콩을 보자 눈을 반짝입니다. 이것은 화초콩, 까치콩, 제비콩, 호랑이콩, 앵두콩, 하얀줄콩, 검은줄콩, 양대콩, 동부, 서리태, 검정콩, 백태, 서목태, 아주까리콩, 청태… 일일이 이름을 부르며 깝니다. 콩들은 저마다 생긴 대로 이름이 붙었습니다. 서리태는 겉은 까맣고 속은 초록입니다. 흑태는 겉은 까맣고 속은 노랗습니다. 서목태는 쥐눈이콩이라고도 하는데 쥐눈처럼 작고 반들반들합니다. 백태는 겉과 속 모두 노랗지만 아주 옛적부터 백태라 부릅니다. 아주까리콩은 아주까리같이 알룩알룩합니다. 청태는 겉과 속이 모두 초록입니다.

햅쌀에다 어제 저녁에 까놓은 밤과 각종 줄콩을 넣고 밥을 합니다. 햅쌀은 밥물 맞추기가 까다롭습니다. 묵은 쌀이나 잡곡보다 물을 조금 붓고 먼저 쌀물을 맞춘 다음에 밤과 줄콩을 넣고 고루 섞습니다. 밤과 콩이 많아 쌀을 누르기 때문에 함께 안치면 물이 많아 보여 평소처럼 물을 맞추면 고두밥이 될 염려가 있습니다. 햅쌀밤밥이 끓으면 벼꽃 향이 납니다. 향긋하고 구수한 밥 냄새는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먹으면 입안에서 살살 녹는 것처럼 마음도 아주 고와지는 것 같습니다. 밤만 해도 맛이 안 나고, 여러 가지 콩만 해도 맛이 안 납니다. 밤과 풋콩들은 정말 찰떡궁합인가봅니다. 반찬용인 제비콩 꼬투리와 여러 가지 연한 콩 꼬투리는 실을 앗아(억센 섬유질을 제거하고) 밀가루 묻혀 찌고 풋고추도 쪄서 무쳤습니다.

고실고실하고 윤기 자르르 흐르는 예쁜 밥을 큰 사발로 하나 수북이 차렸습니다. 옥순이네 시댁 어른들은 무슨 밥을 중앙청 꼭대기같이 담았느냐고 밥그릇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한 수저 떠보고는 밤이 시내 밤하고는 모양부터 다르다고 무슨 금맥을 캐는 것같이 먹어도 먹어도 새로운 콩이 나오냐고 이렇게 향기가 나는 쌀밥은 처음 먹어본다고 야단스럽게 먹습니다. 중앙청 꼭대기 같다던 밥그릇이 바닥이 났습니다. 옥순이는 게눈 감추듯 한 그릇을 다 먹고 더 먹겠다고 하여 조금 쉬었다 더 먹으라고 달랬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니 모두 표정들이 밝아졌습니다. 옥순이네 시댁 어른들은 입덧이 멎을 때까지 친정에 있으면서 밤밥 많이 먹고 오라고 옥순이를 두고 갔습니다. 옥순이는 즈네 집에 갈 생각도 안 하고 밤을 줍고 때마다 콩을 까고 푸성귀 뜯어다 우리 어머니를 도와 반찬을 만들어 잘도 먹습니다. 옥순이는 한 가을을 우리 집에서 보냈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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