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식의 사회]수능 파동의 진정한 민낯

2014. 10. 22.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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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는 수능시험 전 과정의 공정성을 담보하는 감독기구다. 그런데 공정성에 하자가 있는 문제가 생겼다. 제대로 된 감독기구라면 나서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런 의무가 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수능 세계지리 8번 문항. 몇 줄에 불과한 작년 수능시험 문제가 목하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아이로니컬한 점은 명백하게 틀린 문제를 틀렸다고 인정하는 데 장장 1년씩이나 걸렸다는 점이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1심 판결이다. 교과서에 그렇게 써 있으니까 맞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교과서를 비판 없이 믿으라는 것이다. '무엇이 진실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진실이라고 윗분들이 가르치는가'를 보고 믿으라는 것이다. 잘못된 판결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모처럼 고법이 사태를 바로잡았다.

그런데 뒷맛이 영 씁쓸하다. 왜냐하면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나라 교육제도와 사법제도의 고질적인 문제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지리 8번 문항 오류 논란이 벌어진 지난해 11월 29일, 임윤태 변호사(왼쪽)와 박현지 변호사가 수험생들을 대리해 서울 양재동 행정법원에서 수능시험 출제오류 소장을 접수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교육은 진리의 전수와 사회화의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기능은 종종 충돌한다. 덴마크의 동화작가인 한스 안데르센의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동화는 이런 갈등을 잘 묘사해주고 있다. 재단사에게 속은 임금님이 벌거벗고 지나간다. 이때 교육은 어떤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가. 진리를 탐구하고 전수하는 기능을 강조한다면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점을 알려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사회화의 기능을 강조할 경우에는 진실을 은폐하고 임금님이 스스로 멋있는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니 백성들도 그대로 믿으라고 가르칠 수도 있다. 어떤 것을 더 우선해야 할 것인가. 동화책을 읽은 모든 어린이들은 말할 것이다.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이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교육과정평가원의 변명과 1심 판결은 정확히 그 반대 논리를 폈다. 교과서에 그렇게 적혀 있으니 그게 진리이고, 교과서를 열심히 공부한 학생은 충분히 답을 할 수 있으니 문제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생텍쥐페리의 말대로 "모차르트를 죽이는" 교육이다. 이런 교육풍토에서는 노벨상 수상자도, 빌 게이츠도 나올 수 없다. 오직 권위추종적인 눈 먼 백성들만을 만들어낼 뿐이다.

고질적인 교육·사법제도 문제점 확인

고법 판결에도 씁쓸한 부분은 있다. 교육부는 아무런 처분을 한 적이 없으므로 잘못이 없다는 부분이다. 흐음. '재판의 도사'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어찌 이리도 생각이 꽉 막혔을까. 우리들 중 그 누구도 교육부가 이번 사태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잘못된 문제가 출제된 것이야 어찌 교육부 탓을 하겠는가. 문제는 그 후다. 교육부는 세계지리 8번 문항의 논란이 제기된 이후 어떤 적절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것이 잘못된 부분이다.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고법은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 그 점을 들어 면죄부를 부여했다. 이 무슨 궤변의 향연인가.

교육부는 수능시험 전 과정의 공정성을 담보하는 감독기구다. 그런데 공정성에 하자가 있는 문제가 생겼다. 제대로 된 감독기구라면 나서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런 의무가 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직무유기라고 표현하건, 부작위처분이라고 포장하건 그것은 법률 전문가들이 할 일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법원이라면 이 중 어떤 논리를 채택하건 간에 이런 무사안일과 진실 은폐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했어야 한다. 고법이 실패한 부분은 바로 이 점이다. '재판의 도사'를 자처하려면 단순히 '법을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주어진 법 속에서 사회적 상식을 발견'해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못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에피소드가 있다. 지난 2000년 11월 8일에 있었던 미국의 제45대 대통령 선거의 재검표 파동이 그것이다. 공화당의 부시 후보와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가 맞붙은 이 선거에서 플로리다주는 두 후보의 표차가 0.5% 이내여서 자동 재검표에 들어갔다. 여기까지는 특별할 것이 없다. 문제는 부시 후보의 동생인 젭 부시가 플로리다 주지사였다는 점이다. 젭 부시 주지사의 선거캠프 출신인 해리스 플로리다주 국무장관은 아직 재검표가 완료되지 않았지만 재검표 시한이 끝나자 그대로 재검표 종료를 선언한 후 그때까지의 결과를 토대로 부시 후보가 플로리다주에서 승리했음을 선포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앨 고어 측의 법무팀이 법원으로 달려가서 해리스에게 '재량권'이 있었음을 호소한 것이었다. 그때 필자는 어리둥절했다. 아니 재량권이 있다면 재검표를 시한이 되어 종료한 것이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맘대로 해도 되는' 재량권까지 있는 사람이 시한 다 지켜서 재검표를 종료했는데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의무 저버리고 아무 일도 않은 교육부

그런데 신기한 것은 부시 측 법무팀의 태도였다. 그냥 얼씨구나 재량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를 쓰고 재량권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법의 원칙이 '재량권이 있으면 상황을 파악하여 적절하고 공정하게 행동해야 할 의무'가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아직 재검표가 완료되지 않은 정황을 고려했어야 할 의무가 발생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무릎을 쳤고, 이런 법리가 상식으로 통하는 미국 사회가 무척 부러웠다. 플로리다주 법원은 해리스에게 재량권이 있음을 확인했고, 이에 따라 자동적으로 재검표는 연장되었다.

우리는 어떤가. 교육부가 수능시험의 감독당국이라면 재량권을 들먹일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상황을 공정하게 관리하고 감독할 의무가 당연하게 전제된다. 그런데 교육부는 이런 의무를 저버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직무유기 또는 부작위처분은 위법한 것이다. 우리나라 법원이 실패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상식을 상식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상식이 침해되었을 때는 상식이 쓰러지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어주는 보루가 있어야 한다. 선진사회에서 그 역할은 법원이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구조가 작동하지 않는다. 교육은 진실을 외면해도 된다고 가르치고, 법원은 감독당국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경우 아무 책임도 지울 수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이런 시스템은 창의성을 말살하고 붕어빵 같은 부속품만을 찍어낼 뿐이다. 이번 세계지리 8번 문항이 초래한 수능 파동의 진정한 민낯은 바로 이것이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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