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양사건 연루 복역·은둔.. 비참하게 최후 맞은 유병언

정용인 기자 입력 2014. 7. 26. 15:20 수정 2014. 7. 30.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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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비누 발명가이자 사업가, 전경환과 친분 과시하며 5공서 성공가도, 오대양사건 연루 혐의로 복역 후 은둔, 베일 속 사진작가 '아해'로 활동하다 세월호 침몰사건으로 수배자 신세, 풍운의 삶 결국 주검으로 돌아와

"여기 딱 폈습니다." 자신의 무릎을 가리키며 양 손바닥으로 치는 73세 노인. 허리를 굽혀 무대 아래까지 양손을 뻗는다. "그리고 음…. 폼 좀 재도 되겠습니까." 태권도 품새 동작을 하던 노인이 발차기 동작을 한다. 객석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객석에는 성김 주한 미대사, 가수 박진영씨 등 유명인사가 눈에 띈다. 노인의 이름은 유병언.(이하 유 회장으로 지칭) 지난 2013년 1월 서울 모 호텔에서 열린 사진집 출판기념회장이다.

은둔의 사진가 '아해'로 알려진 그는 이 행사에서 자신의 과거 수감생활에 대해서도 숨기지 않고 털어놓는다. "돈을 빌려 썼는데 안 갚는다. 그래서 법으로 뭐라고 해가지고 죄명을 정해서 내주더라고요. 4년 만에. 미안하지만 내 평생 어느 누구에게도 돈을 빌리겠다든지, 빌려 달라든지, 빌려 오라든지 부탁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유씨는 오대양사건 당시 신도들 돈을 횡령하는 등 상습사기 혐의로 구속되어 1991년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만약 세월호 사건이 나지 않았다면 그는 이후 여생도 은둔의 사진작가 '아해'로 살아갔을지 모른다. 지난 7월 4일 프랑스 콩피에뉴에서는 '한국의 천재작가 아해의 사진과 함께하는 콘서트'가 열릴 뻔했다. '한국의 세월호와 연관되어 의혹을 받는 인사의 사진전을 왜 하느냐'는 내외의 비난여론이 거세지자, 프랑스 외무부 장관은 6월 30일 행사 취소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고 행사조직위원회가 받아들여 결국 행사는 무산됐다.

지난 2013년 1월, 아해 사진집 출판기념회에서 자신의 인생이력에 대해 말하고 있는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ahaepress 동영상 캡처

은둔의 사진작가 '아해'

사진작가 '아해'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밝힌 이력은 '발명가', '태권도 유단자 7단', '조각가', '화가', '무술인', '기부자' 등이다. 2012년 2월, 그가 프랑스의 시골마을 쿠르베피를 52만 유로(약 7억5000만원)에 사들였을 때 "도대체 아해가 누구냐"는 화제가 일었다. 당시 한 주간지에 '사진작가 아해'의 추적기가 실렸다. 아해의 주변 취재를 했지만, 그의 본명도 밝혀낼 수 없었다. 기사는 사실상 '취재 실패기'를 다루고 있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등에서 대대적인 전시회를 열었지만 '은둔의 사진작가 아해'는 자신의 정면사진을 공개하지 않았다. 사진을 찍는 모습도 안경을 벗은 옆얼굴만 나와 있었다.

"여기서(안양) 세 번 맞는 성탄절이군요. 카드 한 장 보내는 맘으로 썼답니다. 세상 어떤 이들이 간직한 부적이라는 것보다 좋을 것이니 집에 잘 보관해 두면 혹 식구들이나 자녀들 중에 이루어질 주님의 원하심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유병언의 저서 < 꿈같은 사랑 > 에서 '저자의 말' 중 일부다. 이 '저자의 말'의 말미에는 1994년 12월 19일 새벽 6시40분이라는 시간이 적혀 있다. 이른바 오대양사건 관련으로 감옥에 갔다가 출옥한 뒤 쓴 책이다.

'세상 어떤 이들이 간직한 부적'이라는 것은 기독교라기보다 불교나 무속에 가까운 말이다.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책은 1995년 8월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책 내용은 크게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꿈만 같으면서도 뚜렷한 사랑'은 신·구약 성경에 비춰본 예수 탄생의 의미를 다루고 있다. 2부 '넓고 크고 높고 깊은 사랑'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매개로 예수의 대속(代贖)에 대해 다루고 있다. 종편을 통해 '이단의 근거'로 부풀려 소개되었지만, 내용을 보면 비교적 성경 인용에 충실하다. 책의 부피는 얇다. 소책자 분량이다. 새벽 6시40분이라는 시간을 명기한 것은 그가 이 책을 단숨에 썼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앞의 저자의 말에서 유 회장은 "쓰고 싶은 어떤 충동에서 그냥 성경을 묵상해 가며 써내려갔다"고 밝히고 있다.

유 회장과 등을 돌린 사람도 그의 '비범함'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한다. 유 회장의 통역사로 가까이서 보좌하다 기도 문제 등으로 70년대 말에 갈라선 정동섭 목사는 유 회장이 "성경 문구를 정확하게 인용하는 것이나 도상을 그려가며 설명하는 것 등에 있어서 남다른 능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 회장이 안경을 쓰게 된 이유도 "눈매가 너무 매서워서 다른 사람이 기가 질린다"는 이유였다고 에피소드를 전했다.

오대양사건과 관련, 대전지검에 소환된 유병언 세모 회장. 1993년 10월./최재영 기자 경향자료 사진

종이비누 국제발명대회 은상

1941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유 회장은 일제 패망 후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고향 대구에 정착한다. 대구 성광고 재학 시절 공부를 썩 잘하지 않았지만 유도와 합기도 등을 하면서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 회장이 세상에 알려진 첫 직함은 '유병언 사장'이었다. 1976년 유병언은 봉제완구·직물자수 수출회사였던 삼우무역(삼우트레이딩)을 인수해 사장으로 취임한다. 언론에 그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79년이다. 수재민 모금에 유 사장을 비롯한 이 회사 직원들이 20만원을 냈다는 보도다. 그해 말 "우연히 길을 걷다 만난 신문배달 소년의 학교를 방문해 10만원을 냈다" 등의 미담기사가 이어졌다. 당시 한 언론은 "평소 유 사장이 신문배달사원, 무의탁고아, 수술비에 쪼들리는 딱한 가장에게 '무명의 인사'로 금일봉을 건네준 일이 수없이 많았다"고 전했다.

이 시절 유 사장의 가장 큰 업적이자 이른바 '오대양사건' 전 그를 따라다녔던 수식어는 '종이비누의 발명자 유병언'이다. 그가 착상했다는 종이비누는 1981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5회 국제발명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해 4월 30일 청와대에서 '노사협력의 모범을 세운' 중소기업 대표 7인을 만나 면담하는데, 그 중 한 명이 유병언이었다.

유 전 회장의 정·관계 로비가 성공가도를 달린 것이 5공화국 정권 시절부터라는 것이 미국에 거주하는 한 구원파 탈퇴인사의 증언이다. "1970년대에도 유 전 회장은 정권의 시책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활동을 여럿 벌였다. 녹색회를 만든 것은 1982년으로 알려져 있지만 박정희 정부 말기에 정부가 그린벨트를 만들고 자연보호운동을 벌이자 자연보호기금을 모집해 전달한다고 직원들에게 편수물이나 양초 등을 만들도록 시켰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렇고 그런 기업 중 하나였다. 본격적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것은 정권의 실세 전경환과 친분을 과시했고, 실제 그것이 통하면서부터다."

종이비누에 이어 삼우트레이딩은 컬러모니터 생산 등으로 품목을 다양화한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삼우트레이딩의 부평공장을 방문해 모니터 생산현장을 둘러보는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다.

6월 12일 전남 순천시 서면에서 발견된 변사체가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인 것으로 확인되자 경찰이 7월 22일 시체 발견 장소 주변에 뒤늦게 폴리스라인을 설치하고 있다./연합

한강유람선 사업 '정권 유착설' 터져

유병언과 정권 실세 간의 유착 의혹이 나오게 된 것은 선박사업에 전혀 경험이 없던 그가 1985년 한강유람선 관광사업권을 따내면서부터다. 선박사업에 전혀 경험이 없다고 하지만 유 회장의 1980년대 발명은 '인명사고 방지 보트', '오토바이를 구동력으로 하는 선박' 등 선박과 관련된 것이 많았다. 1986년 1월, 그가 아이디어를 내 디자인한 한강유람선 안이 공개되자 여론의 뭇매를 맞는다. 공개된 세모유람선 디자인은, 1호는 높이 5m, 길이 14m짜리 호랑이상을, 2호는 사자상을 갑판에 세우는 안이었다. 한 달 후 열린 서울시정 자문위원회에서 유병언의 아이디어는 "물 위에 맹수를 띄운다는 유치한 발상"이라는 맹공을 받았다. 유병언은 "호랑이도 수영은 한다"고 변명하면서 안을 철회한다. 세모 한강유람선은 1985년도부터 강서구 방화동 한강변에서 건조되었다. 퇴출된 호랑이 모형은 서울대공원 입구에 현재까지 설치되어 있다. 한강유람선 건조과정에는 구원파 신도들이 동원되었다.

유병언의 회사 삼우트레이딩의 '석연치 않은 종교관계'가 처음 드러난 것은 1983년이었다. 그해 2월, 삼우트레이딩 회사원들은 대형버스를 타고 대전으로 가 '기독교복음침례회' 중앙위원 이복칠 목사 등을 감금하고 폭행한다. 이 결과 회사의 주임과 종업원 5명이 구속된다. 앞의 미국에 거주하는 구원파 탈퇴자는 "삼우트레이딩과 세모 등 직원들 다수가 공장 기숙사 등에서 합숙을 하면서 거주했는데, 대부분이 권신찬 목사의 추종자들"이라며 "권신찬 목사가 이끄는 기독교복음침례회라는 공식 이름이 있었지만 사위 유병언은 '평신도복음선교회'라는 이름을 고집하며 신도들 사이의 교제를 우선하는 것을 강조했었다"고 말했다.

이번 세월호 사건이 나기 전, 유병언과 구원파를 따라다니던 꼬리표는 1987년 8월에 발생한 오대양사건과 관련된 사이비종교라는 것이다. 오대양사건은 오대양 대표이자 종말론을 믿던 교주였던 박순자와 종업원 32명이 집단변사한 사건이다. 당초 자살사건으로 알려진 오대양사건에 대해 타살의혹이 제기되었고, 배후에는 정권의 실세와 연결되어 있는 종교집단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유병언과 구원파의 이름이 공개적으로 거론된 것은 1991년 신도 6명이 다른 신도들을 타살, 암매장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다. 이들 중 일부가 구원파 쪽을 찾아가 자수를 '상담'했고, 오대양 측과 유병언 회사의 금전관계가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유병언과 구원파, 그리고 이들과 5공 정권의 관계가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게 된다. TK 출신 유력인사들로 구성된 월계수회와 유병언의 관계, 청와대 수석팀의 내사문건 등이 폭로되면서 의혹은 절정을 이뤘다. 교회 내 내부문서를 통해 오대양사건 관계의 실체를 들여다봤다는 한 구원파 인사는 "오대양 박순자씨가 한때 대전지역 모임에 출석했던 것은 사실이고, 신도가 상담해왔다는 것도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교리적으로 보더라도 오대양이 주장하는 종말론은 우리와 전혀 다르며, 전 오대양 신도에게도 '인간세상의 죗값은 치르고 와야 한다'고 자수를 권유했던 것"이라며 오대양과의 관련을 부인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이른바 '오대양사건' 관련으로 복역하고 나온 유 회장은 그때부터 거의 은둔에 가까운 생활에 들어간다. 특히 1997년 세모그룹이 부도가 나면서, 주변에서는 경영일선에서는 완전히 손을 떼고 사진에만 몰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양의 금수원에서 '칩거생활'을 이어갔다. '아해' 사진에 등장하는 자연풍광도 대부분 금수원에서 찍은 것들이다. 청해진해운과 천해지를 중심으로 과거 세모 시절의 체제를 재건하는 시도도 아들 대균씨와 혁기씨의 이름으로 진행됐다.

서류상으로는 그의 이름이 빠졌을지 모르지만 그는 여전히 '무관의 제왕'이었다. 사실상 왕국이었다. 유병언이라는 이름 대신 '아해'라는 아명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신도들은 앞서 언급한 그의 저서 < 꿈같은 사랑 > 의 영어판 암송대회를 매해 열었다. 책의 내용은 뮤지컬로도 만들어져 상연되었다. '아해'가 지은 시에는 노래가락이 붙여져 모임에서 널리 불렸다.

지난 1988년 여름 중부지방 폭우로 유병언의 행주대교 부근 세모 작업장에서 만들어졌던 호랑이 모형이 한강을 표류하고 있다. 나중에 이 모형은 한강유람선에 실리지 않고 서울대공원으로 가게 됐다. /경향자료사진

오대양사건 이후 관심은 '건강'

복역 후 그의 발명에 대한 관심사도 달라졌다. 몸의 건강이 주제였다. 1980년대의 유병언에게 종이비누가 있었다면 세월호 사건이 나기 직전까지 그의 대표적 작품은 장세척기 '내클리어'였다. 구원파 인사들 대부분이 이 기계를 구입해 사용했다. 국내외에서 열린 구원파 행사장에서도 마이크를 잡은 유 회장의 강조점은 유기농 식습관과 피의 순환, 건강이었다. 이 무렵의 구원파 내부게시판을 확인해보면 오로지 건강과 유기농만을 강조하는 것에 대한 불만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구원파 핵심인사는 "세월호 사건과 관련해 유병언을 치고 들어오는 것은 사실상 별건 수사가 아니었느냐"며 억울해했다. 은둔생활을 택한 유병언 회장은 오대양사건 이후 사실상 '은둔생활'에 들어갔고, 관심사도 건강과 사진밖에 없었기 때문에 회장직 직함을 걸었을지는 모르지만 사실상 해운업에서는 관심이 멀어졌다는 것이다. "구원파 신도들도 건강 관련 식품을 주로 취급한 다판다가 구원파 회사인 것은 알지만 이번에 세월호 사건이 나면서 청해진해운이라는 회사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사람이 많다."

기자는 유 회장의 시체가 발견된 이후 그가 고가의 외제 명품 브랜드를 선호한 이유가 무엇인지 구원파 핵심인사에게 문의했다. "유 회장 자신은 자신이 입은 옷이 고가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외국에 있는 아들딸이 보내줘서 그저 입었을 따름일 것이다."

5월 하순 어느날 새벽, 수배 끝에 전남 순천의 별장을 나와 어두운 숲속 길을 헤매던 유 회장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운명(運命)이라는 것이 있다면 너무나 얄궂다. 비록 '오대양사건 연루 복역'이라는 시련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그의 삶을 보면 풍운의 삶이었다. 구원파에서는 "존경받는 평신도 중 한 명"이라고 하지만 종교적으로는 수만명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사업적으로도 그 과정의 정당성은 차치하더라도 수백억원대 재산을 일궜다. 그는 스스로를 메시아로 자처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와 사업, 정치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해왔다. 아마 세월호 사건만 없었다면 그의 줄타기는 성공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말년에는 예술까지 즐겼다. 그러나 말로는 너무도 비참했다.

그의 인생에서 최대의 시련은 오대양이 아니라 그가 세상을 떠나기 50여일 전 벌어진 세월호 침몰사건이었다. 세월호 사건의 원흉으로 지목된 그는 검찰과 경찰의 수배망을 피해 도망치다가 끝내 변사체로 발견됐다. 그의 죽음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미스터리로 남았다. 아니 그의 인생 자체가 미스터리였는지도 모른다.

<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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