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이훈삼] 블랙홀과 고독한 이슈들

이훈삼 주민교회 담임목사 2014. 8. 22.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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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 가기 딱 좋았던 4월 16일 이후로 우리는 계절을 차압당했다. 꽃피는 봄에서 뜨거운 여름으로, 그리고 어느새 입추를 지나 선선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지만 우리의 오감은 아직 한 가지에 붙잡혀 있다. 희생자 304명의 고통이 여전히 시대를 떠돌고 아직도 10명은 깊은 바닷속에 잠겨 있다. 그 안타까움과 절망과 분노,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향한 갈망에 감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가 없다. 온 국민이 지금 집중하지 않으면 마땅히 책임져야 할 정부가 또 슬그머니 대충 덮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불행한 추측이 현실로 다가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참 씁쓸한 믿음이다.

원래 믿음이란 세상에서 가장 희망찬 것이건만 국민이 뽑은 정부를 믿을 수 없는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24시간 모든 언론이 똑같은 내용을 전하는 날들이 이어지면서 국민의 관심이 좀 무뎌졌을 때 우리는 또 다시 유병언 시신 발견이라는 특보에 빨려들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하루 종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보아야 했다. 검·경의 발표에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요소가 많을수록 그것은 신기하게도 더 강한 흡인력을 발휘했고, 세월호 사건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는 이 엽기적인 시신 앞에서 우리는 다른 이슈에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너무나 매력적인 교황의 방한

이어서 우리 시대 가장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다. 교황은 종교와 정파를 넘어 파격적이고 감동적인 4박5일을 우리 사회에 선사했다. 지도자의 참된 권위가 무엇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우리는 세계 12억명 가톨릭의 수장이요 바티칸 공국의 대표인 교황의 겸손과 소통,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정의와 평화에 대한 명확한 증언에 모두 매료되고 말았다.

500년 전 종교개혁자들이 그렇게 목숨 걸고 투쟁했던 교황이 정말 이 교황이 맞는가 하고 몇 번이나 되물어야 할 정도로 교황의 일거수일투족은 우리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개신교 목사로서 너무 부럽고 동시에 너무 부끄러운 한 주간이었다.

본질적 과제에 매진해야

세월호-유병언-교황으로 이어진 굵직한 사안들은 사회 전체의 영혼을 흡수하는 블랙홀이었다.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곳에 피 끓는 분노가 피어나는가 하면, 반대로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신선한 언사들을 경험하면서 온 나라가 충격과 감탄을 반복하는 사이에 국군사이버사령부의 대통령 선거 개입, 증거를 조작한 국정원의 간첩 만들기, 그리고 의료기관의 사영화 정책이 별 관심을 끌지 못한 채 넘어가고 있다. 국가안보와 헌정질서 최후의 보루인 우리 국군이 민주주의의 근간인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혐의에 대해 수사가 진행중이다. 사이버사령부 소속 이모 심리전단장의 경우 이미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우리나라 최고의 권력기관이 목숨 걸고 넘어온 탈북자를 잡아다가 증거를 조작해 간첩 누명을 씌웠다. 이제 우리는 그 누구라도 간첩죄를 뒤집어쓸 각오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 국민의 건강권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고 의료체계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영리병원 허용 문제가 의료인들의 관심에만 머물러 있다. 그 결과는 의료체계 붕괴와 가난한 이들의 건강권 훼손임은 명약관화다.

우리 사회에 근본적인 과제들을 함유하고 있는 주요 이슈들이 그냥 침몰하고 있다, 4월 16일의 세월호처럼! 이 또한 누군가 언론을 이용해 만들어내는 의도적 블랙홀이라는 의혹이 물안개처럼 피어난다. 우리 사회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사안임에도 고독한 이슈들을 끝까지 지켜내는 것 또한 세월호와 교황이라는 정반대의 블랙홀 상황에서의 중요한 과제다.

이훈삼 주민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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