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00일, 달라진 게 없다]"우리딸, 조금만 더 기다려" 남은 이들 고통 줄지 않았다

진도 | 배명재·박용근·권순재 기자 2014. 7. 23.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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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 가족들의 100일.. 실종자 아직도 10명
딸을 반갑게 맞이하려.. 바지선서 잠수사와 숙식
2~3일마다 링거 맞으며 실낱같은 희망으로 버텨

23일 이른 새벽, 안개가 옅게 내려앉은 전남 진도군 팽목항 앞바다에 어김없이 파도가 밀려왔다.

단원고 조모양(17)의 어머니 이금희씨(45)가 방파제에 부딪히고는 멀리 되돌아가는 잔물결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았다. "우리 예쁜 딸, 거기 그대로 있지?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이씨는 "벌써 99일째인데 매일 기도 말고는 할 게 없는 내 자신이 부끄럽다"면서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 같은 눈자위를 다시 눌렀다.

단원고 황모양(17)의 아버지 황인열씨(52)는 사흘째 사고해역에 있는 바지선 안에서 잠수사들과 함께 숙식을 하고 있다. 결혼 7년 만에 어렵게 얻은 딸을 반갑게 보듬어 올리기 위해서다. 그는 사고 이후 60여일을 잠수사들과 어울리며 '뱃사람'이 된 지 오래다.

세월호 침몰사고 99일째인 23일 전남 진도군 팽목항 방파제에 실종자들의 이름이 적힌 노란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이날까지 시신이 수습된 사고 희생자는 294명이며 10명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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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의 실종자 가족들은 세월호 참사 이후 말로 형언하기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오직 바닷속에 있는 가족들을 만날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이 이들을 움직이게 했다. 체력이 바닥난 몸을 이끌고 바지선으로, 팽목항으로 오가며 꿈에도 그리운 가족을 맞을 준비를 했다. 얼굴이 새카맣게 탔지만 이미 숯덩이가 된 가슴에 비할 바는 아니다.

'4월16일.' 그날 진도 실내체육관과 팽목항은 '분노와 통곡의 바다'였다. 울부짖는 가족들, 이들을 돕기 위해 달려온 수천명의 자원봉사자들 모두 끔찍한 대참사에 속수무책인 정부에 절망했다. 진도는 "이젠 달라져야 한다"는 공감을 이끌어낸 공간이기도 했다.

그 후 99일. 실종자 294명의 시신이 어렵게 수습됐다. 남은 실종자는 10명. 단원고 학생 5명, 교사 2명, 일반인 3명이다. 함께 의지하며 아픔을 나눠온 삶터였던 진도체육관과 팽목항은 그러나 떠나는 가족들이 늘어나면서 빈 공간이 유독 커 보였다. 진도체육관을 에워쌌던 30여개의 천막은 이제 5개만 남았다. 그 많던 자원봉사자들도 대부분 귀가해 현재 50여명만 활동 중이다. '무사귀환'의 바람을 적은 색색의 포스트잇, 팽목항 방파제 난간에 빈틈없이 걸린 노란색 리본도 조금씩 퇴색하고 있다. 남은 가족들은 더욱 힘겨워한다. 혼자 남게 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한다.

제주 서귀포로 이삿짐을 가져가다 변을 당한 누나를 기다리는 이영호씨(45)는 "실종자가 10명으로 줄어들면서 최악의 상상을 하곤 한다"며 "신경들이 예민해지면서 터놓고 고민을 이야기하던 가족들끼리도 말문을 닫고 있다"고 전했다.

지치고 상한 몸도 가족들을 위축시킨다. 남은 가족 대부분이 2~3일마다 링거를 맞고 있다. 상태가 중해 1시간 떨어진 목포시내 병원으로 실려가는 이들도 있다. 실종자 가족 대표 남경원씨(45)는 "어머니 한 분은 당장 수술이 필요한 희귀병 뇌신경섬유종증을 앓고 있지만 딸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그나마 24일 만에 실종자가 발견되면서 희망의 불씨를 지피게 된 것이 가족들에겐 위안이 된다. 물속 수색시간을 2배 이상으로 늘리는 잠수방식이 도입된 지 얼마 안돼 실종자 한 명을 찾아냈다. 동생(52)과 조카(7)를 찾고 있는 권오복씨(59)는 "왜 진작 잠수방식을 바꾸지 않았는지 따지고 싶지만 꾹 참는다"면서도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변함없는 응원을 보내주고 있는 진도 주민들도 가족들의 버팀목이다. 단원고 양승진 교사의 동생 양승찬씨(55)는 "셔틀버스가 팽목항과 체육관을 오갈 때마다 들일을 하던 어른들이 허리를 펴고 손을 흔들어주신다"면서 "사고로 진도 경제가 어렵게 됐지만 넉넉하게 대해주는 주민들이 힘이 된다"고 말했다.

반면 사고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이 정치권에서 표류해 가족들이 또 한번 절망하고 있다. 국회의원들은 "사고현장에 정답이 있다"며 국정조사 기관보고를 진도에서 하겠다던 약속을 어겼다. 국정조사를 지켜보던 가족들에게 막말을 해대는 국회의원들의 '변하지 않는' 모습에 무력감도 느낀다. 특별법 제정 반대 집회를 열어 상처를 덧내는 어긋난 시선들과도 맞서야 할 처지가 됐다.

실종자 가족의 법률대리인 배의철 변호사는 "가족들 요구의 핵심은 이런 희생이 반복되지 않도록 진상규명을 확실히 하자는 것"이라며 "잘못한 사람은 처벌받고, 잘못된 점은 고쳐져야 한다는 상식이 거부되는 현실에 가족들은 허탈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실종자 어머니는 "대통령이 눈물까지 흘리면서 고치겠다고 했는데도 100일 동안 달라진 게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날 밤부터 팽목항에서 열린 '100일의 기다림, 100일의 약속' 행사에는 전국에서 달려온 500여명이 가족들과 힘을 모았다. 경기 안산시·서울 광화문광장·대구·광주에서 '기다림의 버스'를 타고 온 시민·학생들은 실종자 가족들과 문화공연을 함께하며 '안전한 나라' 건설과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 진도 | 배명재·박용근·권순재 기자 ninaplus@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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