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신분증 내밀어도 확인도 않고 승선? 기자가 여객선 타보니..

2014. 4. 25.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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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정부 "여객선 긴급 점검" 요란했던 날

'여객선 안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신분증 내밀어도 확인 않고…11분 만에 177명 '우르르' 통과어린이가 타도 모니터엔 "성인"배안 자판기·냉장고 고정도 허술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세월호 침몰사고 직후 정부는 긴급 안전점검을 한다고 야단법석이었다. 공직자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안전, 안전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래서 배를 타봤다.

23~24일 <한겨레> 취재진이 전남 완도~제주, 제주~전남 해남을 잇는 여객선에 올랐다. 승선자 명부 작성과 확인은 대충대충이었고, 비상구와 구명조끼가 있는 일부 객실은 아예 문이 잠겨 있었다. 화물의 결박은 허술했고, 육중한 자판기는 언제든 쓰러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취재진이 배에 오른 23일은 검찰과 해양수산부가 전국 연안여객선들에 대해 요란한 안전점검에 나선 날이다. 24일 정홍원 국무총리는 "혁명적 발상으로 안전혁신의 마스터플랜을 마련하라"고 엄숙하게 지시했다. 그러나 항구에도 배에도 정 총리가 말한 '혁명'은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 1분에 승선자 신원 16명 파악?

23일 오후 3시30분 완도연안여객선터미널. 30분 뒤 제주로 떠나는 'ㅎ카페리 1호'의 개찰이 시작됐다. ㅎ카페리는 세월호(6825t·정원 921명)와 비슷한 규모인 6327t이다. 최대 승선 인원은 세월호보다 많은 975명이다. 11분 동안 177명이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어린이 4명도 승선했지만 개찰구 옆 승객 정보 모니터에는 모두 '성인'으로 나왔다. 아이 엄마는 "혹시 아이 신분증이 필요할까봐 의료보험증을 가져왔는데 검사를 안 해서 그냥 나왔다"고 했다.

해운법과 해운법 시행규칙에는 승선신고서에 이름·성별·생년월일·연락처를 적어 승선 수속 과정에서 확인받아야 한다고 돼 있다. 신분증 제시를 요구받은 이는 없었다. 1분에 16명꼴로 개찰구를 지나간 셈이다.

177명 가운데 16명은 신분증을 제시했지만 직원은 확인도 하지 않고 그대로 돌려줬다. 3명만이 이름이나 주민등록번호 공간을 빈칸으로 해놓는 바람에 다시 개찰을 해야 했다. 그러나 대조 작업은 없었다. 한 외국인 관광객이 "메르시"(감사합니다)라고 말하자, 개찰구 직원은 신분증 확인 없이 그냥 통과시켰다. 이름이나 연락처를 제대로 적지 않아도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개찰 과정에 입회한 해양경찰청 소속 경찰관은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했다.

완도에서 청산도로 가는 ㅅ호 개찰구도 마찬가지였다. 관광객 27명은 아예 승선권을 한데 모아서 넘겨주고 우르르 배에 올랐다. 터미널 직원은 승객 수를 세느라 바빴다.

개찰 통과 뒤 배 입구에서도 승선권을 검사하지만 이 역시 부실했다. 승선권을 요구하는 직원의 말에 주머니를 뒤지며 표를 찾자 "개찰하고 온 것 맞죠?"라고 물은 뒤 객실로 안내했다.

세월호의 전체 승객이 몇 명이었는지는 아직도 불명확하다. 청해진해운은 사고 직후인 16일 오전 승객이 477명이라고 했다가 오후 들어 459명, 462명, 475명으로 정정했다. 범정부사고대책본부는 18일 476명이라고 다시 고치면서 "정확한 승객 수는 바뀔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세월호 승선자 명단에서는 생년월일과 연락처를 적지 않거나 이름을 불명확하게 적은 이들이 다수 발견된다. 화물차에 동승한 탓에 아예 명단에 없는 이들도 있다.

■ 화물 쏠림 위험 방치

부실하게 결박된 화물과 차량이 한쪽으로 쏠린 것도 세월호 침몰 원인의 하나로 꼽힌다. ㅎ카페리의 차량 결박 상태도 위험했다. 대형 화물차는 커다란 타이어가 16개나 됐지만, 앞바퀴와 뒷바퀴 4개만 쇠사슬로 고정돼 있었다. 이 배와 비슷한 규모의 세월호 항행관리규정을 보면, 바퀴 10개가 달린 25t 트럭은 전후좌우 10곳을 결박하도록 돼 있다.

항행관리규정은 차량에 실린 화물에도 결박 기준을 적용한다. 하지만 ㅎ카페리에 실린 화물 트럭들은 이것도 지키지 않았다. 과적 여부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있었다. 세월호는 2~3배 정도 화물을 과적한 것으로 드러났다. ㅎ카페리로 제주를 자주 오가는 한 화물차주는 "세 번에 두 번은 과적 단속에 걸리지 않는다. 재수 없으면 걸린다"고 했다. 그 옆의 다른 화물차주는 "고속도로 과적만 피하면 된다"고 했다.

세월호 침몰 당시 승객들이 스마트폰으로 찍은 동영상에는 자판기와 집기 등이 쓰러져 통로와 입구를 막은 장면이 나온다. 부상자 다수도 자판기에 깔린 이들이었다. ㅎ카페리도 마찬가지였다. 휴게실에는 묵직한 소파 23개가 고정되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사진 ①) 음료 자판기는 오른쪽 두 곳에만 나사가 박혀 있었다.(사진 ②) 매점 냉장고는 바퀴까지 달렸다. 식당에도 커다란 테이블 9개와 의자 60개가 고정장치 없이 배치돼 있었다.

오락실에는 육중한 오락기 6대가 서로 철근으로 연결돼 있었는데, 고정 나사는 양쪽 끝 오락기에 두 개씩만 있었다. 배가 일정 각도 이상 기울면 모조리 승객이나 통로를 향해 '돌진'하는 흉기가 될 수 있는 상태였다. 승객 박재필(66)씨는 "의자나 각종 집기가 고정되지 않아 배가 기울면 매우 위험할 것 같다"고 했다. 24일 낮 12시30분 제주를 떠나 해남으로 향하는 ㄹ호(3046t·정원 574명)도 매점 판매대와 집기들이 고정돼 있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 아무도 모르는 구명보트…비상구까지 폐쇄

안내 방송은 두 선박 모두 형식적이었다. 배가 출항하자 스피커에서는 구명조끼 착용법 설명이 나왔다. 승객들은 객실 텔레비전으로 야구 중계와 뉴스를 봤다. 구명조끼 설명 방송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ㅎ카페리 승무원들은 리모컨을 들고 객실을 돌아다니며 일일이 안내방송 화면으로 채널을 조정했다. 이미 구명조끼 착용법 설명은 끝나가고 있었다. ㄹ호는 채널이 고정돼 있었지만 우등석과 달리 공간이 넓은 일반석 일부에서는 스피커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비상대피로 등 필수적인 정보도 안내하지 않았다. 객실마다 붙어 있는 비상구 안내도가 전부였다. ㅎ카페리에는 이마저도 일반인들은 알아보기 힘든 '평면도'에 영어로 적혀 있었다. 객실 번호도 없어서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바로 알기 어려웠다. ㄹ호도 손바닥만한 평면도에 붉은 안내줄만 그어져 있었다. 미국에서 온 요나 로웬스틴(28)은 "한국 선박 사고 소식을 듣고 배를 탔는데 안내방송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걱정했다.

ㅎ카페리 갑판에는 비상 집결지 두 곳과 구명보트 40대가 있지만, 어느 누구도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다. 2~4인실인 1등석은 구명조끼 위치가 바로 눈에 보였지만 80명 이상이 들어가는 저가 객실에는 한쪽 구석에 수납장을 만들어 구명조끼를 몰아넣었다. 한국에서 2주째 여행을 한다는 미국인 마야 비바스(26)는 "선박이 매우 오래돼 보이는데 구명조끼와 구명보트가 어디 있는지, 비상탈출로는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ㅎ카페리는 승객이 많지 않아 일부 객실이 폐쇄된 상태였다. 문이 잠긴 2층 객실에는 구명조끼 100여개와 비상탈출구 두 곳이 있었다. 2층 식당과 휴게실에서는 승객 40여명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들은 세월호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구명조끼조차 입지 못하고 자판기 밑에 깔렸을 것이다. ㅎ카페리 선사 쪽은 "일부 관행적으로 잘못해온 부분이 있었다. 안전점검과 비상훈련을 진행하고 있는데, 지속적으로 보완해 나가겠다"고 해명했다.

완도 제주 해남/박승헌 기자 abc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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