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 가담자는 출세.. 나는 '드레퓌스'가 아닙니다"

입력 2014. 12. 12. 09:01 수정 2014. 12. 12.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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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관의 인물현대사②] '유서대필' 확정심 기다리는 강기훈

[오마이뉴스 이희훈,손병관 기자]

지난 2월 13일 서울고법은 자살방조 혐의로 3년 징역을 산 강기훈(51)씨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내놓았다. 강씨는 그날 "오늘 사법부의 판결은 1992년 대법원 판결 등 자신들의 판단과 징역 등 일련 과정의 잘못을 고백한 것이란 점에 큰 의미가 있다"고 하면서도 기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 이희훈

지난 2월 13일 서울고법은 자살방조 혐의로 3년 징역을 산 강기훈(51)씨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내놓았다. 1991년 검찰에 의해 '유서를 대필한 확실한 범인'(1991년 전재기 당시 서울지검장)으로 지목된 이래 23년 간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그러나 강씨는 그날 "오늘 사법부의 판결은 1992년 대법원 판결 등 자신들의 판단과 징역 등 일련 과정의 잘못을 고백한 것이란 점에 큰 의미가 있다"고 하면서도 기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세월호 사건 등으로 어수선했던 지난 6월, 사단법인 박종철기념사업회가 그를 제10회 박종철인권상 수상자로 지명했지만 그는 "받을 자격이 없다"고 고사했다.

기자는 8일 저녁 강씨를 인터뷰했다. 그가 살아온 길을 되짚어본 이 글이 그의 최근 행동들을 설명하는 하나의 '열쇠'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강기훈씨는 1964년 3월 29일 서울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82년 단국대 화학과에 입학했다. 그 무렵의 많은 대학생들처럼 학업과 학생운동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고, '80년 광주'가 그를 이끈 모티브가 됐다.

'구류 10일'...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1984년 11월 3일 학생의 날 가두시위 도중 남대문경찰서로 연행돼 '구류 10일'에 처해진 사건은 미래의 그를 덮칠 거센 파도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이듬해 단국대 삼민투(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 당대의 학생운동 조직) 위원장을 맡은 후에는 수업도 들어갈 수 없었다. "이대로 놔두면 제적할 수밖에 없다"는 학교측 설명에도 그의 아버지는 "네 신념대로, 소신대로 해봐라"는 말을 전했다.

"윗세대 어른들의 가부장적 권위는 당연히 있었고, '꼰대' 기질도 있었죠. 지금 생각해보니 굉장히 낭만적인 분이었어요. '차라리 군대 가라'고 했는데 당시 한창 '녹화사업'(운동권 대학생 상대의 의식화 및 프락치 공작)에 대한 흉흉한 얘기들이 많아서 역으로 아버지를 설득했죠. '지금 군대 가면 어떤 선배들처럼 죽을 수도 있으니 졸업 후 군대 가겠다'고 말씀드렸죠."

그러나 그는 군대가 아니라 감옥으로 가게 된다.

1985년 11월 18일 서울 가락동 구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본관을 점거한 대학생 191명 중 한 명이 강씨였다. 그는 연행 과정에서 옆구리와 무릎을 심하게 다쳤고, 지금도 궂은 날이 되면 무릎이 저리는 통증을 느낀다.

1986년 징역 2년을 선고받은 그는 이듬해 7월 8일 잔형 4개월을 남기고 출소했다. 그해 6월항쟁에서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한 후에 찾아온 유화 정국이었다. 1988년 4월 26일 13대 총선을 앞두고 만들어진 진보정당 '민중의당'에도 4~5개월 몸 담았고,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것도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1989년 4월의 어느 날,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노운협)에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으로 파견됐다. 성남 민청련(민주화청년운동연합)에서 전민련에 온 김기설씨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도 그해 말이었다.

"하는 일은 재야단체 간사였지만 '부장으로 부르자'고 해서 총무부장 직함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매달 5만 원(지금의 30~40만 원) 정도 활동비가 나왔지만, 얼마 후에는 그나마 끊어졌어요. 지금은 주머니가 비면 겁이 나지만 그때는 젊었으니까…."

1991년 4월 26일(이하 91년) 명지대학생 강경대씨가 경찰의 시위 진압 도중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자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대학생들(4월 29일 박승희, 5월 1일 김영균, 5월 3일 천세용)의 분신이 잇달아 발생했다.

한동안 조용했던 대학가는 대규모 시위의 격랑에 휩쓸렸고, 5월 8일 새벽 분신자살의 대열에 강씨의 전민련 동료 김기설씨가 합류했다.

김씨가 분신 장소로 택한 서강대에서 서울지검 곽상도 검사(전 청와대 민정수석)가 현장검증을 하던 그날 정오 무렵, 박홍 서강대 총장이 교내 메리홀강당에 기자들을 모아놓고 "우리 사회에 죽음을 선동, 이용하려는 반생명적 세력의 정체가 이제 나타나고 있다. 모두가 나서 그 세력을 끊고 쫓아내는 결단식을 갖자"고 주장했다.

딱 부러진 근거가 있는 말도 아니었지만, 검찰이 주목했다. 정구영 검찰총장은 '분신자살 배후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일선 검사들에게 지시했다.

"유서가 김기설의 필적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수사를 편 결과, 유서 써 준 용의자를 1명으로 압축했다"는 강신욱 서울지검 강력부장의 발표가 있던 1991년 5월18일. 그날 <국민일보>에 "김기설 유서는 전민련에서 같이 근무하는 K모씨에 의해 대필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검사, 맥주 마시다 취하면 주먹으로 때려"

분신한 김기설 전민련 사회부장의 유서를 대신 썼다는 혐의를 받던 강기훈은 1991년 6월 24일 명동성당에서 나와 검찰에 자진 출두했다. 사진은 <동아> 1991년 6월 24일자 23면

ⓒ 동아일보PDF

"신촌사거리의 강경대 노제 현장에 있었는데, 후배가 저를 급히 찾아서 그 기사를 보여줬어요. 'K모씨'라고 이니셜을 넣었지만, 저밖에 없었어요. 처음에는 나와 주변 동료들 모두 '이젠 별 짓을 다하는구나'하고 웃었어요.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웃을 일이 아니더군요."

검찰 수사망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피신한 그에게 '자진출두하라'는 압박이 밀려왔다. 6월 3일 정원식 총리가 학생들의 밀가루를 뒤집어쓰는 봉변을 당하고, 같은 달 20일 시·도 광역의회 선거에서 야당이 참패하면서 여론은 더욱 불리해졌다.

당시 강씨는 "명동의 직장인들이 점심식사 후 산책 삼아 슬슬 올라와서는 나를 구경하고 내려가곤 한다. 내가 꼭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라고 답답한 심경을 호소했다.

6월 24일 검찰에 출두한 강씨가 구속되자 어머니 권태평씨는 좋아하던 프로야구 중계도 끊어버렸다. 당대의 강타자였던 '강기O'이 나올 때마다 감옥에 간 아들 생각에 마음이 언짢았기 때문이다.

지난 2월 13일 서울고법은 자살방조 혐의로 3년 징역을 산 강기훈(51)씨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내놓았다. 강씨는 그날 "오늘 사법부의 판결은 1992년 대법원 판결 등 자신들의 판단과 징역 등 일련 과정의 잘못을 고백한 것이란 점에 큰 의미가 있다"고 하면서도 기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 이희훈

한편, 강씨는 수사과정에서 어떠한 대접을 받았을까? 강씨는 신상규 당시 수석검사(동덕여대재단 이사장)를 "조사 도중 맥주를 마시고 취기가 오르면 주먹으로 자신의 얼굴을 때린 사람"으로 기억했다.

6월29일 오전부터 다음날 자정까지는 강씨가 잠이 모자라 졸면 세워놓고 진술을 요구하는 40시간 '잠 안재우기' 조사가 이뤄졌다. 검찰은 2004년 9월30일 스스로 만든 '인권존중을 위한 수사제도·관행개선위원회' 건의를 받아들여 원칙적으로 밤샘조사를 없애겠다는 방침을 내놓았지만 '밤샘조사'는 좀처럼 근절되지 않고 있다.

좀 더 물어봤다.

- 정말 그랬나요? 아무리 20여년 전이라지만 검사가 피의자에게 직접 폭력을 휘두른다는 게...

"그건 사실이예요. 때리더라도 피의자를 항거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놓고 때리죠. 검사 7~8명, 수사관 7~8명이 나 하나 조사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반항합니까? 피의자가 고립무원의 조사실에 있다보면 '검사가 내 편이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도 생기죠. 일종의 스톡홀름 신드롬이랄까, 나를 박살내려고 하는 검사 편이 돼서 그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까지 생겨요. 우리나라 수사기관이 쌓은 노하우가 단순하지 않아요."

- 화교간첩으로 몰린 유우성씨는 수사기관의 가혹행위 폭로하고 조작된 증거를 뒤엎어 무죄까지 받아냈는데...

"거기까지 가는 데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검찰은) 이틀이면 사람 하나 망가뜨릴 수 있어요. 유우성의 경우 검찰이 너무 터무니없는 짓을 해놔서 그나마 빠른 시일 내에 해결된 거죠. 다른 수많은 사건들에서 피의자는 아무 것도 못해요. 그냥 수사기관 의지대로 가게 돼 있어요."강씨가 당시 재야단체의 핵심 실무자였다는 점에서 검찰의 결론은 일찌감치 정해져 있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1991년 12월 4일 구형 공판에서 신 검사는 "피고는 소위 민족민주혁명론에 심취한 좌경혁명분자로서 유서를 대필해 주어 자살을 방조한 것도 피고의 전력과 성향에 비추어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고 논고했다.

강씨는 "만약 공안검사였다면 좀 더 세련되게 얘기했겠죠. 그분 말대로 '뽕쟁이'(마약사범) 잡으러 다니던 사람이니..."라고 씁쓸하게 웃었다.

잘못된 판결 당사자들은 승승장구

1991년 유서 대필 사건 당시 강기훈과 김기설의 필적 대조에 쓰인 자료들

ⓒ 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2월 20일 선고공판에서 노원욱 판사는 강씨에게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했다. 노 판사는 "김형영 국과수 문서분석실장의 경력과 감정 과정, 법정 진술 등을 종합할 때 국과수의 필적 감정이 공정하게 이뤄진 것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근거를 들었다.

노 판사가 신뢰한 김 실장은 이듬해 2월 9일 다른 사건에서 뇌물을 받고 허위감정한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같은 해 4월 16일 항소심을 맡은 임대화 판사도 1심의 판단을 그대로 유지했다. (김 실장은 1998년 2월 12일 또 다른 허위감정 혐의로 2번째 구속 기소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강씨에게 유리한 취지의 진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됐던 홍아무개(고 김기설의 여자친구)씨의 법정 증언도 4차 공판 전날 검찰 수사관이 홍씨를 찾아간 뒤 무산됐다.

대법원(주심 박만호 대법관)의 상고심이 있었던 1992년 7월 24일 대전교도소의 중구금 독거시설. 강씨의 담당 교도관은 배식구에 두툼한 서류뭉치를 밀어넣고 한마디 툭 던졌다.

"별 일 없어? 음, 말야. 법원에서 판결문이 왔네. 두꺼워서 다 읽지는 못했는데 기각이라는 군."

1994년 8월 17일 3년 2개월 만에 만기출소한 그는 같은 해 10월 29일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는 3년 전 유서대필 정국에서 강씨와 산전수전을 함께 겪은 동지였다. 당시 학원강사였던 아내의 집에 수사관들이 갑자기 찾아왔고, 직장 일도 그만둬야 했다.

함경남도 흥남 출신 실향민이었던 장인(2000년 작고)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검찰 수사관들이 다녀간 어느 날 그는 딸을 불러 "그 사람 배신하면 안 된다"는 언질을 줬다.

"그날 술을 직접 담그셨는데 제가 출소해서 처음 찾아뵐 때 그 술을 꺼내 따라주셨어요. 3년간 묵힌 그 술을. 그 술 다 먹고 죽는 줄 알았어요. 오래 살아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한동안 '보통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유서대필' 사건이 불쑥불쑥 그를 '1991년'으로 되돌려놓곤 했다.

"출소 후 초창기에는 근무하던 회사에 카메라 들고 쫓아오는 언론사도 있었어요. '알권리가 먼저'라는 거죠. 그것 때문에 나에 대해 모르던 회사 사람들도 다 알게 되고... 처음에는 신기하게 생각하죠. 고객들도 호기심 반에 약간의 호의를 갖고 저를 대했죠. 대놓고 '그런데 유서는 왜 써주셨어요?'라고 묻는 사람도 있었어요.

'우리 회사에 영업하러 오는 사람인데, 예전에 꽤 유명했구나. 어쨌든 유서 대신 써줬으니 유죄 받았고, 감옥에서 고생 많이 한 사람이구나' 이런 거겠죠. 그 얘기 잠시 하다가 비즈니스 얘기로 돌아가도 내 멘탈은 이미 깨지는 거죠. 결국 재심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처음 10년 정도는 어림없었어요."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자살방조)로 1992년 징역 3년을 선고받았던 강기훈씨(왼쪽 두번째). 사진은 지난 2월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 결심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김상근 목사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는 모습.

ⓒ 유성호

그 사이 검사들은 승승장구했다. 대법관까지 오른 강신욱씨는 2000년 7월 7일 인사청문회에서 "엄격하게 수사를 했으며 1·2·3심에서 모두 (강기훈이) 유죄를 받았다"고 말했다.

2005년 12월 16일 경찰청 과거사위원회는 14년 전 국과수의 필적 감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조사결과를 내놓고, 2007년 11월 13일 진실화해과거사위원회가 "김기설 유서의 필적은 김씨 본인 것이 맞다"는 재감정 결과를 발표한 후에야 재심의 길이 열렸다.

재심을 기다리는 사이 아버지(2008년)와 어머니(2010년) 모두 유명을 달리했고, 그 자신도 2012년 4월 무렵 간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두 차례 수술을 견뎌내고 2월 서울고법의 재심 무죄 판결까지 받아냈다.

- 재심 결과에 대한 소감을 덤덤하게 얘기했는데...

"판검사들이 무리한 수사나 재판에 대해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하면 '인간사 살 만하구나' 생각도 들겠지만 그분들이 사과할 분들도 아니고.. 2월에는 제가 마치 그들에게 사과 요구하는 것처럼 기사들을 쓰셨는데 제 원래 생각과는 좀 달랐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재판은 법적 절차에 불과하고 부질없다는 생각도 들어요. 지난 세월이 뒤집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저의 무죄로 인해 23년 전 '분신 조종이나 하는 놈들'이라는 매도에 고통 받은 분들에게 위로라도 될 수 있다면 의미가 있겠죠."

'유서대필 사건' 주인공들, 언제 입 열까?

강씨는 유서대필 사건을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보는 시각에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도 한 때 그런 표현을 쓴 적이 있지만, 지금은 전혀 동의할 수 없어요. 당시 진범을 찾아내 드레퓌스를 도운 피카르 중령은 공화주의자였지만, 정작 드레퓌스는 공화주의자가 아니었죠. 죽을 때까지 군부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고... 심지어 드레퓌스는 피카르를 싫어하기까지 했어요. 드레퓌스를 옹호했던 에밀 졸라는 그 후 집필 활동을 제대로 못하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드레퓌스 사건이 오늘의 프랑스를 만든 이정표가 된 것은 맞아요. 하지만 내 사건이 그런가요? 우리 사회에 무슨 영향을 줬나요? 사건 조작에 가담해서 입신출세한 사람들이나 사법부의 생각이 바뀌었나요? 권력이 깨끗해졌나요? 그 이후 나같은 피해자들이 안 나왔나요? 나는 아무 영향도 못 줬어요. 오히려 그들의 권력은 더 세졌고..."

인터뷰 말미에 강씨는 "나도 세상을 바꾸려고 했고,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최선을 다하지 말았어야 했다"며 "몸이 아프지 않았다면 계속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살았겠죠. 인생이 '제로섬 게임'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는 말을 남겼다.

이 기사를 쓰면서 1995년 9월 12일 프랑스의 <리베라시옹>에 프랑스군 역사학자 장 루이 무뤼 장군이 "드레퓌스 사건은 조작된 서류에 입각하여 무고한 사람을 추방한 군사적 음모"라고 인정하는 연설을 했다는 기사가 실렸음을 알게 됐다. 1894년 프랑스 군법회의 유죄 판결 이후 1906년 대법원이 드레퓌스의 복권을 결정했지만 정작 군부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데는 다시 89년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유서대필 사건의 또 다른 주인공들은 23년이 지난 사건에 대해 다시 언급하기를 극히 꺼리고 있다. 그들의 견해를 듣기 위해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할까?이 기사를 응원하는 방법!☞ 자발적 유료 구독 [ 10만인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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