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재산 29만원"이라며 버티더니.. 아들 사법처리 칼끝에 '항복'

장은교 기자 입력 2013. 9. 10. 23:07 수정 2013. 9. 11.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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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징금 확정부터 완납까지

1995년 12월2일 겨울바람 속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종이 몇 장을 들고 서울 연희동 자택 앞 골목에 섰다. 검은색 코트에 흰색 목도리를 신경 써 두른 모습이었다. 그는 준비한 원고를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이 나라가 과연 어디로 가고 있고 또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채 심히 비통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만일 제가 국가 헌정질서를 문란케 한 범죄자라면 이러한 내란 세력과 야합해온 김(영삼) 대통령 자신도 응분의 책임을 져야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검찰의 태도는 진상규명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현 정국의 정치적 필요에 따른 것이라고 보아 저는 검찰의 소환 요구 및 여타의 어떠한 조치에도 협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의 뒤에는 장세동·허문도씨 등 5공화국 실세 여러 명이 병풍처럼 섰다. 조직폭력배 보스와 부하들의 모습을 연상케 했던 '연희동 골목성명'이다. 골목성명에서 드러났듯, 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그의 강력한 의지는 '2205억원 추징금' 선고부터 완납까지 16년 동안 계속됐다.

▲ 3년 시효 계속 연장하며 16년간 검찰과 숨바꼭질2004년 차남 구속되자 이순자씨 200억원 납부도

김영삼 정부는 1995년 '5공비리 청산 및 역사 바로 세우기'를 선언했다. 검찰 수사가 시작됐고, 전 전 대통령은 골목성명을 낸 뒤 그날로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떠났다. 검찰은 다음날 고향집에서 그를 체포해 구속했다. 당시 전 전 대통령의 구속영장을 집행한 검사가 채동욱 검찰총장이다. 서울지검 강력부 평검사로 마약사건을 전담하던 채 총장은 '5·18 특별법'에 따라 꾸려진 '12·12, 5·18 사건 특별수사본부'에 차출된 터였다.

대법원은 1997년 4월17일 전 전 대통령에게 내란과 반란, 뇌물수수 등의 혐의에 유죄를 인정해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을 최종 선고했다. 추징금은 그가 대통령 재직 시 부정하게 받은 돈 중 민주정의당 창당자금 등 이른바 '통치자금'으로 썼다고 주장한 것을 모두 제외해주고 남은 액수만을 따진 것이었다. 당시 수사팀 관계자는 전 전 대통령이 조성한 비자금 규모가 총 9500억원 이상으로 파악됐다고 밝힌 바 있다.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뒤, 전 전 대통령의 죄는 사면됐지만 추징금은 남았다.

추징금 첫 환수는 선고 직후였다. 검찰이 압수해둔 예금 107억원과 무기명 산업금융채권 124장, 장기신용채권 12장 등 총 312억9000만원이 추징됐다. 전체 추징금의 7분의 1 정도다. 이때부터 전 전 대통령 측은 "돈이 없다"고 버티고, 검찰은 일부라도 찾아서 추징시효를 3년씩 연장해 가는 지루한 숨바꼭질이 계속됐다. 추징시효는 3년이지만 1원이라도 납부하면 시효가 3년씩 연장된다. 두 번째 환수는 2000년 5월. 검찰은 전 전 대통령의 벤츠 승용차와 장남 재국씨 명의의 콘도회원권을 강제추징한 뒤 경매 처분했다. 2003년에는 진돗개 두 마리와 TV, 냉장고, 피아노 등을 경매 처분해 1억7950만원을 환수했다.

전 전 대통령은 이때 경매 처분을 위해 법원에 낸 재산신고서에 "예금 29만1000원뿐"이라고 해 두고두고 비난의 대상이 됐다. 전 전 대통령은 법원에서 판사가 호화생활을 할 수 있는 배경을 묻자 "주위 사람들이 도와준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해 연희동 자택 별채가 경매에 부쳐져 16억4800만원이 환수됐는데, 별채를 낙찰받은 사람은 전 전 대통령의 처남인 이창석씨다. 그는 공시지가보다 두 배 가까이 높은 금액을 써내 낙찰에 성공한 뒤 전 전 대통령 부부에게 집을 돌려줬다.

전재국씨가 대표로 있는 서울 서초동 시공사 사옥. | 정지윤 기자

2004년에는 부인 이순자씨로부터 200억원을 추징했다. 차남 재용씨가 조세포탈 등의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 직후다. 아들이 포승에 묶이자 이씨는 "알토란 같은 내 돈(전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아니라는 뜻)"이라며 억지로 돈을 내놨다. 재용씨 수사를 통해 검찰은 전 전 대통령의 비자금 채권 73억원을 찾아냈으나 당시 추징을 하지 않아 비난을 샀다. 재용씨 판결문을 보면 그가 노숙인과 사채업자의 명의까지 도용해 아버지의 비자금을 관리한 것으로 나온다.

검찰은 2004년 전 전 대통령의 서울 서초동 땅을 압류, 2006년 경매에 부쳐 1억1900만원을 환수했다. 2008년에는 채권 추심을 통해 전 전 대통령의 통장에서 4만7000원을 추징했다. 2010년 10월에는 전 전 대통령이 대구에서 강연을 하고 받은 강연료 300만원을 추가로 냈다. 이런 식으로 판결 선고부터 13년 동안 추징한 금액은 553억원이다.

2013년 9월10일. "추징금 낼 돈이 없다"던 전 전 대통령 일가는 따가운 여론과 검찰의 전방위적 수사 압박 속에 16년 동안 미뤄온 추징금 완납 계획을 검찰에 제출했다. 추징금이 확정 선고된 16년 전과 현재, '2205억원의 가치'는 다르다. 그러나 현행법은 추징금에 이자는 붙이지 않고 원금만 환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추징금 원금에 민사소송에서 적용되는 연 5%의 법정이자율을 적용하면 대법원 판결이 선고된 1997년부터 16년 동안의 이자만 1764억원이 나온다.

< 장은교 기자 indi@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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