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 사과'로 끝낼 일인가

문정인 2014. 4. 24.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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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4일,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 간첩 사건 증거 조작에 관한 검찰 수사 결과가 발표됐다. 국정원 대공수사국 간부 2명이 불구속 기소되고, 자살을 기도했던 국정원 권 아무개 과장(4급)에 대해서는 시한부 기소중지 처분이 내려졌다. 이로써 앞서 구속된 대공수사국 김 아무개 과장과 공작원 김 아무개씨를 포함해 5명의 사법 처리를 확정지었고, 남재준 국정원장과 사건 공판 담당 검사 2명에 대해서는 '혐의 없음'으로 불기소 처분했다. 이번 사건을 지켜보면서 누가 피고이고 원고이며, 누가 피해자이고 가해자인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은 간첩 혐의로 기소된 유우성씨, 자살을 기도했던 공작원 김 아무개씨, 그리고 권 과장 모두 이 시대가 만들어낸 비극의 주역이라는 점이다.

먼저 간첩 혐의로 기소된 유우성씨. 그가 1심 판결처럼 항소심에서도 무죄가 확정될 경우, 이는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방증이 아닐 수 없다. 증거를 조작해 한 사람의 인생을 파국으로 몰고 간 국정원과 검찰의 처사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반민주적 행위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기본권은 국적을 불문한 보편적 자연권이고, 국정원의 존재 이유는 이러한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지키는 데 있다. 이 헌법적 원칙을 저버리고 유우성이란 한 인간을 비극의 나락으로 빠지게 했던 것이다.

구속된 국정원 공작원 김씨. 김씨는 묵고 있던 모텔방 벽면에 '국조원(국가조작원)'이라는 혈서를 쓰고 자살을 기도했다. 왜 그랬을까? 그가 국정원을 도운 것은 단순히 금전적 이유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나름 대한민국을 돕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소름 끼치는 배신이었다. 설령 김씨가 독자적으로 관련 문건을 위조했다 하더라도 그를 지켜주는 게 비밀 공작기관의 윤리다.

대공 수사 베테랑이었던 권 과장. 30년 가까이 대공 수사 분야에서 활약했던 권 과장에게 돌아온 대가도 냉혹했다. 국정원 조직 생리상 4급 직원이 유우성 사건처럼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실패의 모든 책임이 권 과장에게 집중되고 있다. 이번 사건 하나로 몸도, 마음도, 그리고 국가 안보를 최전방에서 수호한다는 명예마저도 만신창이가 됐다. 엄밀히 말하면 그 역시 희생자이다.

왜 이런 비극의 삼중주가 발생한 것인가? 일차적으로 남북 분단과 대결 구도라는 우리의 냉엄한 현실에 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분단과 대립의 타성에 젖어 있는 한 이러한 비극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번 비극의 직접적 책임은 국정원 리더십에 있다. 국정원은 비밀 정보기관이다. 자국의 국익을 위해 해외에서 불법행위를 할 수 있도록 일정 부분 용인이 되는 조직이다. 그러나 이 면허가 국내에서 간첩 사건 관련 문건을 조작하고 한 개인의 인권과 존엄을 파괴하도록 주어진 것은 아니다. 애초부터 이런 무리수를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시대가 만들어낸 비극의 주역들

설령 수사관이 자신의 업적을 위해 지휘부 몰래 단독으로 증거 조작을 지시했거나, 혹은 국정원 주장대로 공작원 김씨가 자발적으로 조작을 주도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국정원 지휘부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조직 관리 소홀과 지휘부의 무능을 만천하에 드러냈기 때문이다. 지휘부가 핵심 물증에 대해 철저한 검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그것도 베테랑 수사관들이 포진해 있고 파견 검사의 조언을 받는 수사 부서에서 말이다. 특히 위기관리 혹은 '대미지 컨트롤' 능력은 제로다. 지휘부가 초기부터 대승적 결단을 내리고 명민하게 사태 수습을 했다면 일개 공작원으로부터 역풍을 맞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대공 수사 조직과 요원들의 수난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 사건은 서천호 2차장의 사퇴나 남재준 국정원장의 '3분짜리 사과'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번 사건을 '과거의 관행' 정도로 치부하는 지휘부를 믿고 어떻게 우리의 안보를 맡길 수 있겠는가? 환골탈태가 아니라 살신성인의 자세로 최고 책임자가 거취를 결정해야 한다. 그것이 상식이고 순리다. 그래야만 유우성, 공작원 김씨, 그리고 권 과장 같은 비극적 희생자들이 다시 생겨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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