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초유 간첩증거 조작, '꼬리'만 잡고 끝냈다

윤시내 2014. 4. 22. 09:0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울=뉴시스】박준호 기자 = 국가정보원이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1심 무죄 판결을 뒤집기 위해 법을 아랑곳 않고 무리수를 둔 사실이 낱낱이 드러났다. 국가 최고정보기관이 간첩을 만들어내기 위해 사상 초유의 증거를 조작하는 범죄를 저질렀지만 검찰은 국정원 수뇌부를 처벌하지 않고 중간 간부급 직원만 최종 사법처리하는데 그쳤다.

검찰이 이 사건에서 재판에 회부한 인물은 국정원 대공수사국 이모(54·3급·불구속 기소) 처장(대공수사팀장)과 김모(48·4급·구속 기소) 과장, 주(駐)선양총영사관에 파견된 국정원 소속 이모(48·4급·불구속 기소) 영사, 그리고 국정원 협조자로 알려진 중국 국적의 조선족 김모(61·구속 기소)씨 등 총 4명이다. 자살을 시도한 권모(50·4급) 과장은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 시한부 기소중지했다.

◇국정원 간부가 증거조작 '주범'

검찰의 수사결과와 설명을 종합하면, 이 처장은 권 과장, 김 과장과 공모해 지난해 11월 중국 국적의 협조자를 통해 '중국 허룽(和龍)시 공안국에서 유우성(34·중국명 리우지아강)씨에 대한 출입경기록을 발급한 사실이 있다'는 취지의 허룽시 공안국 명의 출입경기록 발급확인서를 위조했다. 또 같은 무렵 서울 내곡동 국정원 사무실에서 인터넷팩스 발신번호를 조작해 마치 허룽시 공화국에서 주선양총영사관으로 출입경기록 발급확인서를 전송한 것처럼 가장, 관련 서류를 법원에 제출했다.

이어 이 처장과 김·권 과장, 이 영사는 지난해 12월 '중국 싼허(三合)변방검사참에서 변호인 측 정황설명에 대한 답변서(정황설명 일사적답복)를 발급했다'는 내용의 허위 확인서를 작성, 법원에 제출했다. 이 처장과 권 과장은 지난해 9월에도 허룽시 공안국 명의 출입경기록과 관련해 허위 확인서를 이 영사로부터 전달받아 검찰에 제출했다. 김 과장은 국정원 협조자 김씨와 공모해 지난해 12월 중국 싼허(三合)변방검사참 명의 답변서를 위조하고 이를 진본인 것처럼 속여 법원에 제출했고, 올해 2월에는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공안국 명의 출입경기록 1부와 장춘시 공증처 명의 공증서 2부를 위조한 것으로 밝혀졌다.

◇국정원 사무실서 팩스번호 '조작'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이 처장과 김 과장, 권 과장 등은 허룽시 공안국에 정식으로 출입경기록 발급 여부를 문의할 경우 비공식 루트로 입수한 사실이 드러날 것을 우려했고, 결국 출입경기록 발급사실확인서를 '바꿔치기'하기로 공모했다.

수법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김 과장과 권 과장 등은 이 영사(국정원 출신 4급)에게 허룽시 공안국에 사전 약속한 시간에 팩스를 발송하되 누군가가 이를 낚아채도록 일러 뒀고 실제 허룽시 공안국의 담당직원이 팩스를 수신하지 못했다. 이어 곧바로 김 과장은 신원 미상의 제3의 인물을 통해 '2013년 9월26일 허룽시 공안국에서 유가강(유우성씨 본명)에 대한 출입경기록을 발급한 사실이 있다'는 취지로 허룽시 공안국 명의 회신 공문 1부(출입경기록 발급사실 확인서)를 위조했고, 이를 마치 허룽시 공안국이 선양영사관에 실제 발송한 것처럼 꾸몄다.

이 과정에서 김 과장과 권 과장은 팩스 발신번호를 임의로 조작했다. 김 과장 등은 지난해 11월27일 오전 10시20분께 국정원 사무실에서 중국 인터넷팩스인 '엔팩스24' 홈페이지에 접속, 이 영사에게 허룽시 공안국 회신 공문을 전송했다. 그러나 첫 번째 보낸 팩스번호(9680-2000)가 중국 선양 현지에서 자주 쓰이는 스팸번호임을 알고 발신번호를 허룽시 공안국 대표 팩스번호(043-3422-3692)로 설정해 다시 두 번째 팩스를 전송했다. 이 영사는 허룽시 공안국으로부터 출입경기록 발급사실 확인 공문을 송신한 것처럼 속이기 위해 '대검의 수사협조요청(중국, 유가강) 관련 회시'라는 제목 하에 "허룽시 공안국에서 확인한 결과 유가강에 대한 출입경기록을 발급한 사실이 있음"이라는 내용의 외교전문을 첨부해 대검찰청에 보냈다.

◇中 공문서 위조 수수료로 4만 위안 지불

김 과장과 국정원 협조자 김씨가 싼허(三合)변방검사참의 정황설명서에 대한 답변서(관우유가강출입경기록 정황설명 일사적답복)를 4만 위안(한화 약 740만원)을 주고 위조한 사실도 검찰 수사로 드러난 사실이다. 김 과장은 "위조를 지시하거나 위조 사실을 몰랐다"는 주장으로 일관했지만 증거조작에 깊숙이 관여한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검찰에 따르면 김 과장은 지난해 12월7~9일 분당 등에서 협조자 김씨를 만나 "변호인이 제출한 정황설명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싼허검사참 명의의 확인서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김씨가 "군부인 싼허검사참으로부터 확인서를 받을 수 없으므로 가짜로 만들어오는 방법 밖에는 없다"고 난색을 표하자, 오히려 김 과장은 "중국에서 문제될 리가 없으니 걱정 말라"며 위조를 독려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후 김씨는 지난해 12월 10~14일 중국 칭다오시에서 다른 변방검사참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리모씨를 통해 "유가강의 정황설명서는 결재 없이 발급된 것이고 출입경기록에서 발견된 착오는 '출(出)'을 '입(入)'으로 잘못 입력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내용의 문서를 위조했다.

김씨는 리씨와 함께 위조업자를 찾아가 싼허검사참 명의 관인 제작을 의뢰하면서 사전에 김 과장의 승낙을 얻어 수수료로 4만 위안을 지불했다. 이 과정에서 김씨는 싼허검사참에서 유씨에게 위법하게 정황설명서를 발급했고 이를 자신이 신고해 정황설명서에 대한 답변서를 발급받은 것처럼 보이도록 일종의 범죄신고서('거보재료')를 거짓으로 작성, 날인하는 치밀함을 보였다.◇검찰 '제 식구 감싸기'도 논란

수사 초기부터 검찰 안팎에서는 과연 검찰이 국정원의 '벽'을 넘을 수 있을지 관심을 모았다. 지난해 '국정원 대선 개입 댓글' 사건으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검찰이 올해 또 국정원과 '악연'을 맺으면서 관심은 더했다. 그러나 검찰은 국정원 윗선을 파헤치는데 한계를 드러냈다.

검찰은 국가정보원직원법의 제17조(비밀의 엄수)와 제23조(직원에 대한 수사 등)로 인해 국정원 직원들에 대한 신병처리에 어려움을 겪었다. 국정원 직원들은 직무상 비밀에 관한 사항을 증언하거나 진술하는 경우 사전에 국정원장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이들이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직무상 비밀을 이유로 진술을 거부하거나 서로 입을 맞췄을 가능성이 크다.

권 과장의 자살 기도 역시 검찰 수사에 악재로 작용했다. 수사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최모 대공수사단장을 소환하고, 대공수사국장에 대해서는 서면 조사에 그치는 등 국정원 직원의 자살 기도 이후 수사의 동력을 상실한 것 아니냐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결국 검찰은 국정원 지휘라인에 대해서는 다가가지 못하고 대공수사처장(3급)까지 재판에 넘기는 선에서 수사를 종결했다. 국정원 대공수사단장(2급)-대공수사국장(1급)-2차장-원장 등으로 이어지는 윗선에게는 책임을 지우지 않았다.

검찰이 유우성씨 간첩사건의 수사 및 공판을 담당한 검사 2명을 무혐의 처분한 것도 논란이다. 검사들이 증거위조 등에 관여하거나 위조문서를 알고도 법원에 증거로 제출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아 혐의점이 없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다만 허위 문서를 증거자료로 제출하는 등 공소유지 과정에서 상당한 과실이 드러난 만큼 내부 감찰을 통해 징계할 방침이다.그러나 해당 검사들이 사전에 문서 위조 여부를 알고 있었을 정황은 곳곳에 있다. 검사들은 항소심 공판 과정에서 중국 지린성 공안청에 협조 공문을 보냈다가 거절당한 사실을 숨긴 채 '정상적인 외교절차를 통해 공문을 발송했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재판부에 수차례 제출했다. 또 국정원 직원들이 팩스번호를 조작한 뒤 서로 다른 번호로 2건의 문건을 보낸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의심 없이 재판부에 제출, 지나치게 안이했던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적지 않다. 결국 유우성씨 간첩사건을 변호한 시민단체 민변은 검찰의 수사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며 수사팀을 경찰에 고발했다.

이번 증거조작 사건으로 박근혜 대통령과 남재준 국정원장, 황교안 법무부 장관과 김진태 검찰총장은 "환골탈태"를 약속하며 국민들에게 사과했고 서천호 국정원 2차장은 전격 사퇴했다. 그러나 검찰의 수사결과를 놓고 정치권을 중심으로 특검론이 대두되는 등 한동안 후유증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pjh@newsis.com

<저작권자ⓒ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Copyright © 뉴시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