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을 왜 갚아? 국가가 갚아주는데.. 돈 갚는 사람만 바보" 행복기금 부작용, 빚을 안갚기 시작했다

김정훈 기자 2013. 4. 1.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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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체 급증.. 도덕적 해이 확산] 출범하자마자 먹구름 - 신한은행 서민금융 연체율 4.58%에서 5.14%로 올라.. 두달만에 이례적으로 치솟아 "빚 안갚은 걸로 해주소" - 착실하게 갚은 사람만 억울, 은행 창구마다 항의 빗발 뻔뻔한 채무자 만드는 정부 - 대선공약으로 내세워 문제.. '빚은 꼭 갚는것' 원칙 흔들려

"정부에서 원금 반 깎아주는 거 신청해 보려고요. 남의 돈 쓰고 안 갚는 거 나쁜 짓인 줄 알지만, 돌려막기 하다 어쩔 수 없이 그리 된 거고 절대 고의는 아닙니다."

최근 A신용정보사의 채권 추심 직원이 채무자 김모(53)씨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하신 날짜에 돈이 입금이 안 됐다"고 말하자 그는 이런 말을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김씨는 2003년부터 은행·캐피탈 등 3곳에서 원금 1700만원을 빌렸다가 갚지 못했다. 은행·캐피탈은 A신용정보에 채권을 넘겼고, 김씨는 지난해 12월 이자를 감면받고 한 달에 12만원씩 나눠 갚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김씨는 이후 한 번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데, 빚 상환을 독촉하자 '국민행복기금'을 방패막이로 내세웠다. A신용정보 관계자는 "이달 들어 돈을 입금하지 않는 사람이 크게 늘어 3월 한 달 매출은 1년 전보다 15% 줄었다"고 푸념했다.

◇'행복기금'발 도덕적 해이 확산

"국민행복기금은 (빚을) 50%나 탕감해준다는데, 여기(신용회복위원회)는 왜 안 해줍니까?" 29일 서울 중구 신용회복위원회 상담 창구. 한 노신사가 "그동안 신용회복위원회에서 이자율은 반으로 줄여 주고 갚으라고 하길래 제일 좋은 방법인 줄 알았는데 아니지 않으냐"며 역정을 냈다. 그는 신복위의 채무재조정 프로그램을 통해 빚 5000만원에 대해 채무조정을 받고, 매달 50만원씩 이자와 원금을 갚아 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는 "신복위를 통해 빚을 갚는 사람들은 국민행복기금에 채무조정 신청을 할 수 없다고 한다. 빚 안 갚고 버티면 나라에서 구제해 주는데, 우리같이 빚 갚으려고 노력한 사람들만 바보가 된 꼴"이라고 말했다.

B은행 부천지점에서 대출 업무를 하는 직원은 최근 항의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재작년에 대출 원금 500만원을 연체했다가 은행의 채무조정으로 월 10만원 정도씩 잘 나눠 갚아 오던 중이었다. 그는 "나도 행복기금으로 원금을 탕감받을 수 있었는데 당신네들 때문에 못 했다. 내가 그동안 갚았던 돈과 이자를 돌려달라"고 따졌다.

국민행복기금의 또 다른 부작용은 대출자들 사이에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원칙을 흐리게 만든다는 점이다.

C은행 당산동 지점의 직원은 이달 들어 어이없는 상담을 해야 했다. 1000만원 대출을 받으러 온 손님이 "지금 돈 빌려서 6개월 연체하면 국민행복기금에서 탕감 대상자가 되느냐"고 물어본 것이다. 정부가 이번이 마지막 부채 탕감이라고 공언했음에도 불구, 채무자들 사이에 막연한 기대감이 퍼져가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추가 부채 탕감에 대한 헛된 기대

정부가 나서 채무자들의 부채를 탕감해 주는 조치를 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3년 카드사태 후 한마음금융(2004년), 희망모아(2005년), 신용회복기금(2009년)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 빚 탕감 조치다.

박창균 중앙대 교수는 "똑같은 정책을 카드사태 후 몇 번이나 했고, 탕감해 줄 때마다 '이번이 끝'이라고 했다. 국가가 나서서 대규모 부실채권을 한꺼번에 처리하려고 하니까 사달이 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행복기금의 경우 광범위한 부채 탕감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우다 보니 과거 부채 탕감 때보다 더 많은 도덕적 해이 문제를 촉발하고 있다는 게 금융계의 시각이다. 한 카드사 임원은 "앞서 세 번의 부채 감면 프로그램은 카드사태·금융위기가 양산한 부실채권의 정리에 방점이 찍혀 비교적 조용히 진행된 반면, 행복기금은 대선 공약으로 요란하게 홍보가 되면서 채권자들이 과도한 기대를 품게 됐다"고 말했다.

게다가 국민행복기금 프로그램은 설익은 정책 설계로 문제를 악화시킨 측면이 있다. 지난해 말 박근혜 캠프는 공약집에서 '322만명에게 18조원 지원'이라는 얼개로 국민행복기금 공약을 내놓았다. 그러나 실제 발표된 운영 계획에선 '33만명 대상, 1조5000억원 지원'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왜 안 되느냐', '나도 빚 탕감을 해달라'고 불평하는 수많은 채무자를 낳게 됐다.

국민행복기금이 채무자의 모럴 해저드를 촉발하고 있는 것은 서민 대출 상품의 연체율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해 말 4.58%였던 신한은행의 서민금융상품 연체율은 2월 말 기준으로 5.14%로 치솟았다. 대출 연체율이 두 달 만에 0.56%포인트 늘어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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